바위 5/ 문효치

발행일 2021-07-05 15:20:4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발이 없으니/ 구르기라도 하고 싶다// 태어날 때부터/ 움쩍할 수 없는/ 이 자리// 씩씩거리며 지나가는​/ 길짐승 볼 때마다// 날갯짓 퍼덕이며 가는/ 날짐승을 볼 때마다// 이방의 낯선 거리/ 신비의 세계에 가고 싶지만/ 不動은 깊은 감옥/ 작은 돌멩이가 되어/ 바람의 발끝에라도 채여/ 어딘가 굴러가 보기 위해// 벼락을 기다리고 있다/ 나를 깨뜨려 산산조각 낼/ 섬광 번쩍거리는/ 벼락을 기다리고 있다

「바위 가라사대」 (미네르바, 2021)

바위는 보통 움직이기 힘든 큰 돌이다. 성인 장정의 완력 정도로는 들 수 없는 무거운 돌이다. 크고 무거운 바위를 굳이 옮기려한다면 포클레인이나 기중기를 동원해야 한다. 그런 연유로 바위는 원래 있던 곳에 늘 변함없이 있는, 믿을 수 있는 듬직한 존재로 받아들여진다. 거대한 바위나 신비한 형상을 한 바위는 토속신앙이나 도교의 우상으로 받들어지기도 한다.

바위는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열 가지 신성한 사물인 십장생의 하나로 꼽힌다. 그래서 그런지 바위에 관한 시가를 찾기 어렵지 않다. 윤선도의 연시조 ‘오우가’ 중 바위, 유치환의 시 ‘바위’ 등이 애송된다. 시집 ‘바위 가라사대’엔 칠십 편의 시가 바위라는 시제를 달고 있다. 그 창의적 시각이 신선하다.

바위는 그 속성으로 인해 윤리나 형이상학과 생활 속에서 맞닿아 있다. 바위에 대한 알레고리와 메타포는 시인이 직관하는 상징세계의 시적 표상이다. 시인은 바위 속에서 바위가 아닌 또 다른 내재적 범주를 창조한다. 신이 만든 바위에 쟁여 있는 ‘하고 싶은 말’을 찾아내고 싶은 것이다. 바위의 함묵과 무표정은 바위의 말이고 언어다. 그 함묵과 무표정을 채록한 결실이 시집 ‘바위 가라사대’다.

바위는 발이 없어 걸어 다닐 수 없다. 태어날 때부터 꼼짝할 수 없다. 지나가는 길짐승을 볼 때마다 산과 들로 뛰어 다니고 싶은 욕망이 인다. 푸른 하늘로 날아오르는 날짐승을 볼 때마다 구름 위로 훨훨 날고 싶은 꿈을 꾼다. 변화 없는 일상을 깨고 미지의 세계, 낯선 거리를 활보하고 싶다. 저 산 너머엔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신비한 세상이 있으리라. 신비한 세상이 없으면 또 어떠랴.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갈 수만 있다면 그걸로 족할 일이다.

움직이지 못하는 건 감옥살이와 다르지 않다. 작은 돌멩이로 굴러다니거나 바람을 타고 날아다닐 수만 있다면 벼락이라도 맞을 각오가 돼 있다. 몸이 산산조각이 난다해도 움직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이제 섬광 번쩍이는 벼락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을 따름이다. 침묵과 인내의 듬직한 미덕은 그저 고전적 넋두리일 뿐일까.

밤이면 밤마다 울어대는 바위의 애틋한 사연을 잘 아는 산은 돌아서서 눈물짓는다. 그러던 어느 날, 바람을 타고 온 솔 씨 하나가 바위틈에 내려앉는다. 무심한 솔은 그곳이 제 운명의 땅인 양 둥지를 튼다. 눈보라와 추위, 배고픔과 목마름을 이겨내고 어린 솔이 뿌리내리면 바위는 엄마의 가슴으로 보듬고 마냥 기다릴 터이다.

고단한 삶에 무력감을 느낄 때, 침묵과 인내의 상징 바위 앞에서 위로받고자 했던 이호우의 주름 잡힌 얼굴이 떠오른다. ‘차라리 절망을 배워 바위 앞에 섰습니다/ 무수한 주름살 위에 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 바위도 세월이 아픈가 또 하나 금이 갑니다’(이호우의 시조 ‘균열’)

오철환(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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