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일보 연중기획]삼국유사 기행<121>염불사

발행일 2021-07-05 09:13:3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염불 스님의 염불 소리는 신라 360방 17만 호의 백성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경주 동남산자락 남산리의 염불사 터에는 여러 조각의 석재와 동서쪽에서 마주보며 우뚝 서있는 삼층석탑이 복원돼 있다. 염불사는 신라시대 360방 17만 호에 고루 들리는 염불을 낭송하던 스님이 주석하던 절이라 전한다.


삼국유사는 왕력과 기이편에 이어 흥법, 탑상, 의해, 신주, 감통, 피은, 효선으로 모두 9편으로 편성했다.

특히 후반부 피은편은 낭지, 연회, 혜현, 신충, 관기와 도성, 영재, 물계자, 잉여사, 염불사의 10개 조로 구성돼 있다.

피은편에서는 대부분 신라의 승려를 소개하고 있지만 혜현 등 백제 승려를 소개하기도 하고, 불교가 들어오기 전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승려가 아닌 물계자 장군을 소개해 특이하다.

이는 승려가 아니지만 권력을 버리고 혼자 숨어 사는 인물을 통해 일연 스님이 의도하는 무엇을 전하려 했다는 것을 간파하게 한다.

여기에서는 흔적을 찾기 어려운 영재, 물계자, 잉여사, 포천산의 5비구 등에 대해서는 따로 소개하지 않기로 한다.

염불사는 비록 간단하게 소개해 학자들이 따로 연구 발표한 부분은 찾아보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신라 360방 17만 호 등의 행정구역과 당시 인구에 대한 자료로 역사연구에 큰 실마리가 되고 있다.

삼국유사 피은편 10개의 편목 중에서 유일하게 불교와 관계가 없는 물계자 이야기 해석본과 염불사에 대한 학자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염불사 삼층석탑을 복원하면서 처음 불국사역 앞에 상징적으로 신라의 석탑을 세우면서 염불사지와 이거사지 석재를 사용했다가 염불사지 석탑을 옮겨 복원하면서 당시 사용됐던 이거사지 석재를 옮겨 두고 있다.


◆삼국유사: 염불사

경주 남산 동쪽 기슭에 피리촌이라는 마을이 있다. 마을에는 절이 있어 마을 이름을 따서 피리사라고 이름지었다.

절에는 신이한 승려가 있었는데 성명을 말하지 아니하고 항상 아미타불을 염불했다. 그 소리가 성안에까지 들려 360방 17만 호에서 염불 소리를 듣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 소리는 높고 낮음이 없으며 한결같이 낭랑했다. 이것을 신이하게 여겨 공경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며 모두 그를 염불사라고 이름지어 불렀다.

그가 죽은 후에 진흙으로 그의 형상을 빚어 민장사 안에 모셨다. 그가 본래 머물렀던 피리사는 염불사로 이름을 고쳤다. 이 절 옆에 또 절이 있었는데 이름을 양피사라 했으니 마을이름에서 취한 것이다.

염불사지 동삼층석탑을 복원하면서 1층 옥개석은 이거사지 석탑의 옥개석을 모방해 새로 다듬어 사용하고 있다.


◆삼국유사: 물계자

신라 제 10대 내해왕이 왕위에 오른지 17년 되는 임진년(212년)에 보라국, 고자국, 사물국 등 여덟 나라가 힘을 합쳐 변경을 침범했다. 왕이 태자 내음과 장군 일벌 등에게 명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이를 막게 하니 여덟 나라가 모두 항복했다.

이 당시에 물계자의 군공이 으뜸이었으나 태자가 미워하여 그 공을 포상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물계자에게 “이번 전쟁에서의 공은 오직 그대뿐인데 상이 그대에게 미치지 않은 것은 태자가 그대를 미워함인데 원망스럽지 않은가”라고 물었다.

물계자는 “나라의 임금이 위에 계신데 신하로서 어찌 원망이 있을 것인가”라고 당연한 듯 답했다.

그 사람이 다시 “그러면 임금께 말씀드리는 것이 좋을 것이오”라고 말하니 물계자는 “공로를 자랑하고 이름을 다투며 자기를 추켜세우고 다른 사람을 덮어 묻는 것은 뜻 있는 사람이 행할 바가 아니다. 힘써 때를 기다릴 뿐이다”고 답했다.

소지왕을 살린 글이 출토됐다고 해서 서출지라고 불리는 연못. 양피지로 불리던 못과 이름이 서로 혼돈되기도 했지만 양피지보다 북쪽 300m 지점에 있는 이곳이 서출지로 인식되고 있다.


내해왕 20년 을미년(215)에 골포국 등 세 나라의 왕이 각각 군사들을 거느리고 와서 갈화를 쳤다.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막으니 세 나라가 모두 패했다. 물계자가 수십 급을 베었으나 사람들은 물계자의 공을 말하지 않았다.

물계자가 그의 아내에게 “내가 듣기로는 임금을 섬기는 도리는 임금이 위기를 만나면 목숨을 바치고 임금이 어려움에 처하면 몸을 잊어버리며, 절의를 지켜 생사를 돌보지 않음을 충이라고 했소. 갈화의 싸움은 진실로 이 나라의 환란이었고 임금이 위태로웠소”라고 말했다.

이어 “그런데도 나는 내 몸을 잊고 목숨을 바치는 용기가 없었으니 이것은 바로 매우 충성스럽지 못한 일이었소. 이미 불충으로써 임금을 섬겨 누가 선조까지 미쳤는데 이것을 효라 할 수 있겠소. 이미 충과 효를 잃었는데 무슨 낯으로 다시 조정과 시정에 나설 수 있겠소”라며 스스로를 탓했다.

물계자는 이에 머리를 풀어헤치고 거문고를 메고 사체산으로 들어갔다. 대나무의 곧은 성벽을 슬퍼하며 그것에 빗대어 노래를 짓기도 하고 계곡물의 흐르는 소리에 맞춰 거문고를 타며 곡조를 붙이기도 했다. 그는 그곳에 숨어서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염불사가 있던 마을은 피리, 양피리 등으로 불렸고, 피리사로도 불리던 염불사 앞에 있었다던 못을 복원한 양피지.


◆염불사

지금 경주 남산에 위치한 피리사에 주석했던 신라시대 유명한 승려를 염불 스님이라 불렀다. 염불 스님은 신라의 수도 서라벌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민장사에 거주하다 그의 주장이 민장사의 방향과 맞지 않아 남산 피리사로 도피해 나무아미타불을 낭송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신라시대 피리촌으로 불렸던 마을의 피리사를 염불 스님이 나무아미타불을 낭송하다가 입적한 이후 마을 사람들은 염불사로 절 이름을 고쳐 불렀다.

염불 스님이 서라벌 민장사에서 피리촌으로 와서 염불을 외웠던 것과 피촌 또는 피리, 피리촌으로 불렸던 마을 이름에서 학자들은 피촌이 신라의 서울 서라벌과 가까웠지만 중요한 신분을 가졌던 사람들이 피해 은거했던 지역으로 기능했다고 본다.

남산리 염불사에서 북쪽으로 300m 정도 위치에 동서 삼층석탑이 나란히 복원돼 있다. 보물 124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오른쪽이 기단에 팔부중상이 새겨진 서탑, 왼쪽은 모전석탑 형식의 동탑.


◆새로 쓰는 삼국유사: 염불 스님과 표훈대덕

통일신라시대 불교문화를 비롯한 전반적인 부문에서 가장 화려하게 꽃피었던 때는 경덕왕 때로 추정된다. 특히 불교예술은 최고 정점에 이르러 불국사와 석굴암 등의 조형예술은 현시대에서도 극찬을 받고 있다.

이때에는 뛰어난 고승들도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 경덕왕의 뒤를 이을 아들을 점지받기 위해 천상의 세계까지 출입해 천제를 만났던 표훈대덕과 안민가를 지은 충담사, 달을 멈추게 했던 월명사 등의 이름은 지금도 쟁쟁하다. 또 이때 남산 용장사의 대현 스님은 석불좌상 주변을 돌며 아미타불을 염송하면 석불이 그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는 설화도 전한다.

염불 스님 또한 당시 백률사, 중생사와 함께 주요 삼대사찰로 꼽혔던 민장사에 있으면서 주석을 다퉜던 원효대사의 제자이자 고승으로 표훈대덕과 쌍벽을 이뤘다.

이 때문에 민장사에서는 당시 좀처럼 드러나지 않았던 원효대사의 계파와 의상대사의 맥락을 이어오던 계파가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남산리 동서삼층석탑 사이에 신라시대에 활용됐던 것으로 보이는 다양한 석재들이 쌓여 있다.


원효대사는 민중을 위한 대중불교의 창시자로 손꼽힌다. 원효는 철저하게 대중 속으로 파고들어 누구나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면 성불할 수 있다는 대중불교를 설파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군중 속에서 자기수행을 이어갔던 생활실천적인 불교를 뿌리내리게 했다.

그는 분황사에서 그가 깨달은 불교의 진리를 많은 책을 저술해 백성들에게 전하려 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제자를 키우는 일에는 소홀하게 됐다. 이러한 연유로 직접적인 원효의 제자는 찾아보기 어려웠지만 그의 사상을 흠모해 추종하는 세력은 통일신라시대에도 뿌리깊게 퍼져있었다. 염불 스님이 대표적인 그러한 원효의 제자였다.

당나라에서 천 명의 승려들이 신라로 와서 원효의 제자가 됐다는 천성산의 설화가 전하기도 한다. 이렇듯 원효는 백성들이 누구나 성불할 수 있는 구도의 길을 안내하는 대중불교의 꽃을 피우는 화두가 됐다.

반면 원효와 같은 시대에 공부했던 의상대사는 많은 제자를 거느렸다. 특히 오진, 지통, 표훈, 진정, 진장, 도융, 양원 등 10대 제자로 손꼽히는 이름이 지금까지 전해질 정도로 의상의 가르침을 따르는 승려들이 두텁게 계파를 이루며 드러났다.

남산리 서쪽 삼층석탑의 기단부에는 팔부중상이 뚜렷하게 양각돼 있다. 동쪽 삼층석탑이 차별화된 양식인 모전석탑 형식으로 조성됐다.


염불 스님은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원효의 화쟁사상, 대중불교에 심취해 나무아미타불을 크게 염송했다.

민장사에는 경덕왕이 국사로 추대했던 표훈대덕이 주석하며 의상의 화엄사상을 통해 왕권을 강력하게 뒷받침하고 있었기 때문에 염불 스님과는 사사건건 부딪쳤다.

염불 스님은 대중불교를 위해 민장사에서 조용히 벗어나 남산 피리사에서 은거 아닌 은거를 택했다. 피리사에서 염불 스님은 서라벌 360방 17만 호의 만백성들이 모두 들을 수 있도록 나무아미타불을 낭랑한 목소리로 매일 염송했다.

표훈대덕 또한 원효와 의상이 함께 동문수학하며 진리를 깨우치기 위한 길을 걸었던 바를 익히 알고 있었기에 염불 스님의 이러한 진리의 길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결국 염불 스님이 입적하자 표훈대덕은 조용히 그의 소상을 만들어 민장사에 안치하고 누구나 그를 따라 나무아미타불을 암송할 수 있게 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삼국유사 해석은 고운기의 ‘삼국유사’, 이범교의 ‘삼국유사의 종합적 해석’ 등을 참고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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