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복할 수 없는 첫사랑의 미련 ~

…나는 다섯 명의 작가와 함께 산골에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어제 저녁부터 함박눈이 내렸다. 분위기를 살려보고자 즐겨듣던 음악을 듣고 있었다. 그때 뜻밖에도 첫사랑 그녀의 문자가 왔다. 오늘 만나자고 약속했다. 함박눈의 군무가 장관이었다. 눈을 밟고 버스정거장으로 갔다. 첫사랑의 기억을 떠올리며 애송시를 읊조렸다. 버스가 운행할지 알 수 없었다. 간절함이 통했던지 버스가 눈길을 헤치고 왔다. 돌아오는 차편은 폭설로 인해 없을 거라고 했다. 그녀와 약속한 서방시장에서 내렸다. 비상등을 켜고 대기하는 외제승용차가 있었다. 마침내 첫사랑 그녀와 만났다. 32년의 세월이 두 사람을 서먹서먹하게 했다. 전에 그녀 소식을 듣긴 했다. 그녀의 여고동창이자 나의 초교친구 영아를 통해서였다. 영아는 그녀를 처음 소개해준 주인공이다. 방송국에 취직하고 자수성가한 사업가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를 그리워할 일은 없겠다고 생각했다. 어색한 침묵을 깨고자 두 사람의 연결고리인 영아의 소식을 물었다. 연락이 끊겼다가 며칠 전에 연결이 되었단다. 이민 가서 갖은 고생을 하다가 겨우 자리를 잡았는데 화재가 나는 바람에 남편은 죽고 혼자 어렵게 산다고 했다. 영아에게서 내 폰 번호를 받은 듯하다. 그녀는 내가 소설가가 된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한적한 한정식 집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여전히 고왔다. 어색함을 극복하고자 나는 소주를 거푸 들이켰다. 그녀는 안주시중만 들었다. 폰을 열어 나의 가족사진을 보여주고 그녀의 가족이 보고 싶다고 했다. 그녀도 가족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 그녀 학과 친구들과 죽기 살기로 했던 ‘주량대전’이 떠올랐다. 그녀는 그 기억마저 잊고 있었다. 섭섭한 마음에 술잔만 비워냈다. 미안했던지 하숙집의 말간 추억을 꺼냈다. 결정적인 한방이 없었던 걸 탓하는 뉘앙스다./ 식당을 나왔을 땐 10시가 넘었다. 커피숍을 찾아 서방시장까지 갔다. 그때, 그녀의 폰이 울었다. 들어올 때 떡볶이를 사오라는 남편의 전화인 듯했다. 김이 빠졌다. 커피숍을 찾아 들어갔으나 취기가 올라 거기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소설집과 CD를 선물하고 그녀와 헤어졌다./ 근처 모텔로 들어갔다. 시원섭섭했다. 또 30년이 흐른 후에 만나보려나. 요상한 소음에 시달리며 잠을 설쳤다. 대설주의보가 내렸다는 아내의 문자가 들어와 있었다. 점심 때 쯤 모텔을 나왔다. 발을 동동거리며 버스를 기다렸다. 그때 영아의 국제전화가 왔다. 혼자된 첫사랑을 눈치 없이 그냥 보냈다고 타박했다. 떡볶이 주인공은 아들인 모양. 버스는 오지 않고 함박눈만 쏟아졌다.…

진정한 사랑은 맺어질 수 없는 환상인가, 맺어질 수 없는 환상이 진정한 사랑인가. 사랑이 결실을 맺고 결혼으로 골인해 아들딸 낳고 살면, 달콤한 환상은 깨어지고 꿈같은 사랑은 끝장나고 만다. 아름다운 첫사랑이 아름답게 남아있으려면 이별의 아픔이란 대가를 치러야 할 터다. 이별하지 않은 사랑은 자식들 뒷바라지에 찌들고 인생의 생로병사에 고뇌한다. 첫사랑의 순수와 아름다운 환상을 지켜주려면 ‘첫사랑은 맺어지지 않는다’는 신화는 계속돼야 한다. 하숙집에서 하얗게 보낸 숨 막히던 전율의 시간과 모텔 방에서 홀로 뒤척인 불면의 밤은 평생을 통해 아름다운 추억으로 보상받을 것이다. 함박눈이 새하얀 나비처럼 너울거리며 첫사랑의 추억을 수놓고 있다.

오철환(문인)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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