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확/송유나

발행일 2021-06-29 14:16:26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솜털구름 끌어안은/은밀한 곳 펼쳐있다/옥잠화 잎에 앉은 민물 피라미 물음 하나/의문부 깊어갈수록 포용하는 고요는 깊다//가만가만 다가서면/내가 나를 보고 있어/속내를 들켜 버려 숨죽인 채 멈춰 선다/언제나 하늘도 품는 그런 넓은 품이 될까//쨍쨍한 낮, 물찬 엉덩이/슬몃 내민 저 아낙네/하얗게 제 속 드러낸 벌거숭이 맨몸으로/오래된 돌확이 한 채 마당귀를 응시한다

「오늘의시조」(2019, 제13호)

송유나 시인은 경기 화성 출생으로 월간문학 신인상 시조 당선으로 등단했다.

‘물확’에서 물확은 돌을 우묵하게 파서 만든 절구 모양이다. 물을 채워서 수중식물을 기른다. 그곳은 시의 화자가 말하는 것처럼 솜털구름을 끌어안은 공간이어서 은밀한 곳이 펼쳐져 있다. 옥잠화가 있고 그 잎에 앉은 민물 피라미가 물음을 던지는 장면이 연출된다. 그리해 의문부가 깊어갈수록 포용하는 고요가 깊어지는 것을 눈여겨본다. 그곳은 또한 가만가만 다가서면 내가 나를 보고 있어 속내를 들켜 버려 숨죽인 채 멈춰 서게 하는 곳이다. 자아가 투영된 것을 보면서 화자가 흠칫 놀라는 장면이다. 내가 나를 보는 곳이어서 속내가 들켜버린 듯한 느낌이 든 것이다. 그러면서 화자는 자신을 돌아본다. 언제나 하늘도 품는 그런 넓은 품이 될까, 하고. 물확을 들여다보면서 품을 넓히고자 하는 자성의 시간을 가지고 있다. 맑은 물이 있고 피라미가 헤엄치는 곳이자 옥잠화가 있어 솜털구름과 푸른 하늘이 내려와 있는 공간이다. 그리고 화자는 물확을 두고 쨍쨍한 낮, 물찬 엉덩이 슬몃 내민 저 아낙네, 라고 은유하면서 하얗게 제 속 드러낸 벌거숭이 맨몸으로 오래된 돌확이 한 채 마당귀를 응시한다, 라고 끝맺는다. 결국 화자와 돌확이 하나임이 드러나고 있다. 마당의 물확과 함께 생활하면서 물확의 생태적 정황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비춰보는 중에 돌확이 곧 자기 자신의 모습임을 자각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래된 돌확이 마당귀를 응시하는 일은 일상이다. 제 속을 숨기지 않는 진솔한 삶의 표출을 본다.

또 한 편 ‘비움으로 채우는 시간’을 보자. 한 끼니, 별거 아닌 허튼 시간을 삼키다가 뭔지 모를 꿈틀거림 내 안에 틀고 들어오는 것을 감지하고 화자는 앉았다 서성거리다 하면서 쓸쓸함을 마시고 있다. 사람이 살다보면 자신의 마음 가장 밑바닥으로부터 무언지 모를 꿈틀거림이 시작돼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 혹은 풀어내기 위해 애쓰기 마련이다. 여기서는 이러한 상황에 대처를 잘하고 있다. 앉아 있어 보기도 하고 서성거리기도 하는 움직임 자체가 그러한 점을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시선이 바깥으로 이동한다. 별거 없는 허접 대책 세우다 마는 뉴스를 보면서 그래프에 눈을 두고 찹찹한 채 앉아 있다. 여기서 찹찹한, 이라는 시어가 눈길을 끈다. 푸슬푸슬 부풀지 않고 차곡차곡 가라앉아 가지런하다, 라는 뜻을 지닌 말이 적절하게 잘 배치돼 있다. 그러면서 심각한 사회문제인 출산율 출산율쇼크, 출구조차 없는 길에 대해 혼자 궁구한다. 이어서 둘러앉아 먹던 밥이 언제인지 그립다, 라는 가족공동체에 대한 그리움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젠 푸들이 반기는 집이다. 그래서 아쟁처럼 깊은 울림만 남아 있는 공간이다. 그늘도 이사 가버린 오후에 주인처럼 드는 바람만 이따금씩 불어온다. ‘비움으로 채우는 시간’은 이렇듯 둘러앉아 먹던 밥, 이라는 구절에서 보듯 함께 한 밥상머리가 사라져버린 것을 못내 아쉬워하는 시편이다.

송유나 시인의 작품을 읽으며, 정갈한 삶의 길을 꿈꾼다. 다복한 가정을 통해 우리 사회가 밝아지기를 희망한다.

이정환(시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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