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남자들은 그곳에/ 심상치 않은 것이 있음을 안다/ 치마 속에 확실히 무언가 있기는 있다// 가만두면 사라지는 달을 감추고/ 뜨겁게 불어오는 회오리 같은 것/ 대리석 두 기둥으로 받쳐 든 신전에/ 어쩌면 신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은밀한 곳에서 일어나는/ 흥망의 비밀이 궁금하여/ 남자들은 평생 신전 주위를 맴도는 관광객이다// 굳이 아니라면 신의 후손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자꾸 족보를 확인하고/ 후계자를 만들려고 애쓴다/ 치마 속에 확실히 무언가 있다// 여자들이 감춘 바다가 있을지도 모른다/ 참혹하게 아름다운 갯벌이 있고/ 꿈꾸는 조개들이 살고 있는 바다/ 한번 들어가면 영원히 죽는/ 허무한 동굴?// 놀라운 것은/ 그 힘은 벗었을 때 더욱 눈부시다는 것이다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 (민음사, 2004)

식욕과 수면욕 다음으로 강력한 본능은 성욕이다. 순서로 따진다면 식욕과 수면욕이 앞서겠지만 최종 목적성에서 보면 성욕도 결코 만만찮다. 먹고 자는 것도 종족을 보존하고 번식하기 위한 워밍업 정도로 볼 수 있다. 동물의 세계를 눈 여겨 지켜보노라면 꾸밈없는 본능의 적나라한 원형질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기초적인 생존조건이 충족되고 생식 가능한 상태로 진입하면 수컷은 짝짓기에 목숨을 건다.

본심을 가리고 절차가 우회적일 뿐 인간도 별반 다르지 않다. 강한 힘과 출세를 향한 수컷의 집착과 욕망은 좀 더 나은 유전자를 복제할 짝을 선점하기 위한 본능에 터 잡고 있다. 아름다움과 섹스어필에 대한 암컷의 끝없는 열망과 자식에 대한 맹목적인 모성애도 우성 수컷 유인과 안전한 양육을 위해서 부여받은 속성이다. 때로는 신비적 베일에 가려있지만 그 빨가벗은 나신은 노골적인 원시의 모습 그대로다.

남자가 호기심을 극복하지 못하고 치마 주위를 맴도는 광경은 낯설지 않다. 치마 속을 봤다고 호기심이 사라지지 않고, 실체를 안다고 떠나가지 않는다. 남자는 관광객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나이에 관계없이 남자라고 생겨먹은 인간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하나 같이 치마 속에서 무너진다. 그 속엔 신비한 무언가가 있다. 그것이 회오리든, 신전이든, 바다든, 남자는 부나비처럼 머리를 들이댄다. 일단 들어가면 죽어버리는 동굴이라 하더라도 하등 신경 쓰지 않는다. 부나비가 어찌 불을 두려워하랴.

치마 속엔 정신 줄이 나가는 환상이 존재한다. 다가가면 사라지는 신기루 같지만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쫓아가는 모습은 ROM에 새겨진 프로그램과 진 배 없다. 그렇지만 그러한 무모한 저돌성으로 인해 인간의 삶이 지속되고 있는 터다. ‘그 힘은 벗었을 때 더욱 눈부시다는 것이다’ 치마를 벗었다고 그 마법이 사라지지 않을뿐더러 신비의 동굴을 탐험하는 일에 더욱 사로잡히기 마련이다. 진정 경이롭다.

이 시에 대해 임보 시인이 시 ‘팬티’로 답했다. 재미있는 알레고리가 웃음을 자아낸다. 젠더 갈등으로 청춘남녀 간에 얼굴을 붉히는 작금의 살벌한 분위기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러나, 여자들이여 상상해 보라/ 참배객이 끊긴,/ 닫힌 신전의 문은 얼마나 적막하던가!/ 그 깊고도 오묘한 문을 여는/ 신비의 열쇠를 남자들이 지녔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보라/ 그 소중한 열쇠를 혹 잃어버릴까 봐/ 단단히 감싸고 있는 저 탱탱한/ 남자들의 팬티를!’(임보의 시 ‘팬티’ 중에서)

오철환(문인)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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