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그늘/ 유시연

발행일 2021-06-23 14:09:53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 귀향의 의미 ~

…오래된 간장독이 광에서 나왔다. 아직도 간장이 맛있게 익고 있었다. 그녀는 씨앗간장으로 대물림할 거라고 했다. 뒤주 옆 항아리엔 소금덩어리가 결기를 품은 듯 빛났다. 그의 할머니가 사용하던 다듬잇돌도 출토되었다. 광과 개집을 헐고 담장을 부쉈다. 화장실을 고치고 보일러를 새로 놓았다. 묵은 생활용구들이 끊임없이 나왔다. 옛날엔 가난한 머슴들이 마을 아래쪽에 살았고 부자들이 위쪽에 살았다. 지금은 역전되었다. 윗마을은 도시로 나가는 바람에 황량하게 변했고 아랫마을은 딸기농사로 부자가 되었다. 두 사람은 3년 전 도보여행 중에 만났다. 폭풍우 속에서 서로 의지하다가 평생 함께 하기로 했다. 불확실한 미래로 인해 불안감을 갖고 있던 터에 그의 고향에 집이 있다고 해서 귀향하기로 했다./ 귀향한 다음날, 그와 함께 마을 인근을 둘러봤다. 산은 파헤쳐져서 붉은 흙이 드러났다. 대단위 분묘단지가 조성 중이었다. 바람과 볕이 잘 들고 전망 좋은 곳엔 무덤이 있었다. 사람은 음습한 저지에 살았다. 산 너머에서 바위 깨는 소리가 들려왔다. 산모퉁이를 돌아서자 개들이 몰려 사는 마을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먹구름이 낀 어둑한 가운데 시커먼 바바리를 걸친 젊은 여인을 얼핏 봤다. 팔부능선에 머슴마을의 사당이 있었다. 사당은 죽은 자의 공간이었다. 언덕 위엔 아름드리 플라타너스가 서 있었다. 그곳에선 마을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산을 내려오다가 범상치 않은 노파를 만났다. 그의 어머니랑 담배친구라며 말을 걸어왔다. 귀신을 본다고 소문이 난 정신이 성치 않은 노파였다./ 미색보자기에 싸인 삼베 뭉치가 발견됐다. 그의 어머니가 쓰던 매끈한 다듬잇돌도 출토됐다. 집안에 묻힌 영혼의 흔적으로 인해 골머리가 아팠다. 버리자니 아깝고 그냥 두자니 찜찜했다. 집은 점점 난장판이 돼갔다. 마당에 서서 옛 물건들을 보며 낯을 찡그렸다. 갓 쓴 비석이 산 중턱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골목어귀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산길에서 만난 노파가 나타나 담배를 달라고 했다. 노파는 그녀를 죽은 딸로 여기고 목을 끌어안았다. 집에까지 동행했다. 그녀가 담근 매실까지 챙겨주자 노파는 무를 주겠다며 그녀를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노파는 배를 무라며 주었다. 얼핏 봤던 시커먼 바바리 여인이 머리를 스쳤다. 노파와 닮았다./ 묘지관련 회의가 있다는 이장의 안내방송이 나왔다. 산과 언덕이 점차 묘지로 채워져 갔다. 산 자도 때가 되면 산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게 될 터, 삶이 양지에서 밀려나 음지로 이동하는 듯하다. 그는 옛 물건을 조상 유산이라며 잘 간수하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죽은 자의 것이라며 거부했다. 자신이 쓰던 물건이 누군가에겐 께름칙한 것이 될 수 있다. 그녀는 플라타너스가 있는 언덕으로 올라갔다. 곳곳에 엎드려있는 무덤들을 보았다. 사람들이 무덤을 만들고 있었다.…

시골마을을 돌아보면 젊은 사람은 눈을 씻고 봐도 없다. 고래 등 같은 고대광실은 대개 죽은 자를 위한 사당이거나 재실이기 십상이다. 산과 언덕은 무덤과 납골당에 점령된 지 오래다. 양택은 줄어들고 음택은 누적적으로 늘어난다. 산 자에 의해 죽은 자들이 세상을 장악해가고 있다. 아이러니다. 산 자의 숫자마저 줄고 있는 현실이 암울하다. 삶은 무덤으로 가는 노정일 뿐일까. 수구초심이 태어난 종착지로 이끄는 현상이 귀향인가. 죽음의 의미와 삶의 정체성을 깊이 천착해 본다.

오철환(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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