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나무 부도/ 박권숙

발행일 2021-06-22 15:22:04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수억 광년 전에 죽은 별이 아직 빛나듯이/다비를 끝낸 꽃이 마지막까지 붙든/찬란한 꽃의 일대기가 밤이슬로 멎어 있다//가장 몸을 낮추어서 가장 높은 곳에 오른/

설산의 순례자가 불가해의 길을 내듯/저렇게 꽃은 나무를 관통한 빛이었다//목조의 붐 한 채를 축조해낸 꽃나무들/꽃 진 자리 봉안된 다라니경 베껴 쓰다/덜 마른 필묵 자국이 밤이슬로 멎어 있다

「문학청춘」(2021, 봄호)

박권숙 시인은 1962년 경남 양산 출생으로 1991년 중앙시조백일장 연말 장원으로 등단했다. 시조집 ‘겨울 묵시록’, ‘객토’, ‘시간의 꽃’, ‘홀씨들의 먼 길’, ‘모든 틈은 꽃 핀다’, ‘뜨거운 묘비명’ 등이 있다. 그는 지난달 11일 이 땅의 삶을 다하고 하늘나라로 떠났다. 소천한 사실은 일주일이 지나서야 세상에 알려졌다. 신록이 초록빛으로 눈부시게 반짝이는 싱그러운 유월의 어느 한낮 금정산 자락에서 두 손으로 시집을 받쳐 든 채 햇살보다 더 환하고 싱그럽게 웃고 있는 눈부신 영정사진 속의 시인, 천사의 모습을 한 시인을 숙연히 그려본다. 그는 하늘이 허락한 천부적인 문학적 재능이 꽃봉오리는 맺었지만 흐드러진 만개함으로 그 절정을 다 누리지 못하고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났다. 실로 그에게 시조는 또 하나의 신앙이었고, 끝까지 그의 삶을 지탱케 하는 불굴의 힘이었다.

‘꽃나무 부도’는 그가 마지막으로 지면에 발표한 작품이다. 수억 광년 전에 죽은 별이 아직 빛나듯이 다비를 끝낸 꽃이 마지막까지 붙든 찬란한 꽃의 일대기가 밤이슬로 멎어 있다, 라고 노래하고 있는 첫수에서 그가 무언가를 감지한 듯한 느낌을 받는다. 부도는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안치한 묘탑인데 어쩌면 작품 제목을 ‘꽃나무 부도’라고 했을까? 첫수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나타나고 있어서 더욱 애절하게 읽힌다. 가장 몸을 낮춰서 가장 높은 곳에 오른 설산의 순례자가 불가해의 길을 내듯 저렇게 꽃은 나무를 관통한 빛이었다, 라는 둘째 수에서 받는 심리적 충격도 크다. 목조의 붐 한 채를 축조해낸 꽃나무들 꽃 진 자리 봉안된 다라니경 베껴 쓰다 덜 마른 필묵 자국이 밤이슬로 멎어 있다, 라면서 첫수 종장 후구가 셋째 수 종장 후구에 다시 쓰인 점이 눈길을 끈다. 시인은 의미망으로나 미학적으로도 잘 직조된 이 작품을 쓰면서 자신의 종언을 은연중 예감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러 이채로운 이미지의 시어들이 서로 조밀하게 꿰맞춰져 있어 거듭해서 읽는 동안 마음이 울컥해진다.

오래 전 그가 쓴 시조 ‘종말이 화사하다’를 찾아 읽는다.

마지막 꽃을 참하고 완결한 적막처럼//날아가 버린 것이 새 뿐이 아니라면//유정한 마침표 하나 세상 밖으로 던져진다//대낮에도 눈 부릅뜬 별이 다 보고 있다//낭자한 빛의 여백 낙화가 여닫을 때//꽃보다 만발한 허공 종말이 화사하다

마지막 꽃, 완결한 적막, 새, 유정한 마침표, 눈 부릅뜬 별, 낭자한 빛의 여백, 낙화라는 이미지가 연첩되다가 둘째 수 종장에서 꽃보다 만발한 허공 종말이 화사하다, 라고 끝맺고 있다. 참 아픈 구절이다.

그는 신산의 세월을 꿰뚫고 혼신을 다해 시혼을 불태우며 창작의 길을 걸었다. 그리해 많은 명작을 남겼다. 그의 시조 세계는 남은 자들의 몫이 돼 연구 대상이 될 것이고 인구에 길이 회자할 것이다. 그가 보내온 다수의 육필 편지를 기억하며, 달포 전 직접 밝은 목소리로 통화했던 일을 떠올린다. 영영 추억이 돼버렸다. 이제 그는 스스로 노래한 것처럼 가장 높은 곳에 올랐다.

그를 마음 깊이 기린다.

이정환(시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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