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생활자/ 임성용

발행일 2021-06-09 13:52:21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 상황이 사람을 만든다 ~

…모노드라마에서 내가 연출을 맡고 그녀가 주연을 맡았다. 마지막 무대의 관객은 11명. 공연이 끝나고 그녀와 포차에서 술을 마셨다. 그녀는 심각한 이야기를 복잡하게 풀어놓았다.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지. 뜬금없이 아랫도리가 꿈틀거렸다. 포차를 나와 모텔로 갔다. 급한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그녀 옆구리에 난 사마귀를 보고 있었다. 머리를 말리던 그녀가 상황이 사람을 만든다고 말했다. 내가 그녀 애인이 된 것도 상황이 만든 결과였고 이젠 상황이 우리를 헤어지게 만든다는 의미인 듯하다. 빙빙 돌리다가 마침내 헤어지자고 마침표를 찍었다. 동의했다. 이제 모텔을 나가면 서로 남남이다. 그래도 내가 싫은 건 아니란다. 그 후 그녀는 극단도 그만두고 어떤 세무사와 결혼했다./ 지하기계실에서 TV를 보고 있다. 다섯 사람이 눈보라 속에서 발이 묶였다. 가이드는 끊어진 무전을 서쪽 봉우리로 가서 연결해보자고 한다. 그때 관리실에서 인터폰이 왔다. 2005호에서 화재경보기가 운다며 지금 가서 해결하란다. 또 그 할아버지 집이다. 치매노인이 신문지에 불을 붙여 스프링클러를 작동시키고선 샤워를 하고 있을 터다. 나는 시설관리를 하는 사람이지만 세대의 형광등 가는 일부터 치매노인 뒤치다꺼리까지 하고 있다. 2005호 문 앞엔 반백의 할머니가 홀딱 젖은 몸으로 서 있다. 거실로 들어가니 벌거벗은 치매노인이 물을 한 바가지 뿌렸다. 우선 수도 밸브를 잠갔다. 거실 스프링클러마저 틀어막고 싶었다. 안방과 작은방은 벌써 막았다. 소방법 운운하는 소장의 반대로 거실만 살려둔 상태다. 치매노인은 아이처럼 물을 뿌리며 장난을 걸어왔다. 치매노인은 자기 아내인 할머니를 엄마로 여겼다. 대충 청소를 하고 연기도 내보냈다. 할머니가 목욕 값 만원을 건네주었지만 거부했다. 할머니 동의를 얻어 거실 스프링클러를 틀어막았다. 기계실로 돌아와 소장에게 처리결과를 보고했다. 스프링클러를 다 막았다고 하자 소장은 문제가 생기면 나보고 책임지라고 했다. 다시 가서 복구시켜놓겠다고 하자 그제야 두리뭉실하게 넘어가려 했다. 계약기간이 끝나면 다시 무대로 돌아가야겠다. TV를 보면서 자장면을 시켜먹었다. 먹는 중에 스프링클러를 살리라는 소장의 지시가 내려왔다. 다시 2005호로 갔다. 벨을 울렸으나 반응이 없다. 문은 열려있었다. 집안은 연기와 가스로 가득 찼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거실바닥에 쓰러져있다. 관리실로 응급상황을 알렸다. 곧 직원들이 왔으나 정신이 스멀스멀 멀어져갔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나는 구급차 안에서 산소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구급대원이 나를 실험대상으로 삼아 수습대원에게 교육을 실시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안부를 물어보았다. 구급차에 실려 갔는데 자세한 경위는 모른단다. 머리가 지근거렸다. 수습대원이 눈을 까집고 플래시를 비췄다.…

연극 연출을 하다가 흥행에 실패하면서 낙담한다. 애인은 상황 운운하며 떠나간다. 헤어진 애인은 경제력 있는 세무사와 결혼한다. 실의에 빠져 괴로운 현실을 도피하고자 지하로 숨었지만 현실은 더 처절하게 쫓아온다. 거기서 치매노인부부를 만나고 극한적인 삶의 민낯을 경험한다. 엄혹한 현실을 피한다고 해 엄혹함이 사라질까. 삶이 비록 무심하게 비켜가더라도 결코 외면할 수 없다. 허무를 극복하고 현실을 수용해야 한다. 인간이 상황을 만든다. 인생은 연극이다.

오철환(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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