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콩을 끓이고 끓여/ 푹 익혀서/ 밟고 짓이기고 으깨고/ 문드러진 모습으로/ 한 덩어리가 되어 붙는 사랑/ 다시는 혼자가 되어 콩이 될 수 없는/ 집단의 정으로 유입되는/ 저 혼신의 정 덩어리/ 으깨지고 문드러진 몸으로/ 다시 익고 익어/ 오랜 맛으로 퍼져가는/ 어설프고 못나고 냄새나는/ 한국의 얼굴/ 우리는 엉켜버렸다/ 끈적끈적한 점액질의/ 실 날로 서로 엉켜/ 네 살인지 내 살인지/ 떼어내기 어려운 동질성/ 네가 아프면 내가 아프고/ 내가 아프면 네가 아픈/ 그래서 더는 날콩으로 돌아갈 수 없는/ 발효의 하얀 금줄의 맛/ 분장과 장식을 모두 버리고/ 콧대마저 문지른 다음에야/ 바닥에서 높고 깊은 울림으로/ 온몸으로 오는 성(聖)의 말씀 하나

「오래 말하는 사이」 (민음사, 2004)

시 ‘메주’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메주에 대한 고찰이 선행될 필요가 있다. 메주는 발효식품이다. 우리 전통음식엔 발효가 많이 응용된다. 김치나 젓갈이 대표적이고 모든 요리의 감초인 된장, 간장, 고추장 등이 또한 그러하다. 된장 등 장류는 한식에서 간을 맞추고 고유한 맛을 내는 기초식자재일 뿐 아니라 조미 기능까지 일부 수행한다. 그만큼 이들 장류는 우리 식생활에서 절대적인 위상을 점하고 있다.

된장을 비롯한 장류는 모두 메주에서 나온다. 그런 의미에서 메주는 가장 중요한 토종음식의 바탕이고 우리 전통음식의 모체다. 메주는 콩을 삶거나 쪄서 절구나 방아 따위로 찧은 다음 나무틀로 찍어낸다. 삶은 콩을 담은 천 포대를 발로 밟아 콩알을 으깬 후 메주 틀로 찍어내는 집도 있다. 집집마다 조금 다를 수 있지만 대개 맷돌 모양이거나 납작한 직육면체가 일반적이다. 메주를 말린 다음 짚 위에 올려놓고 따뜻한 아랫목에서 적당하게 띄우는 게 신의 한 수다. 적당히 뜨면 겨울동안 매달아 놨다가 봄날이 오면 햇볕에 말린다.

자급자족하던 시절 방이나 처마에 매달린 메주는 어느 집에서나 볼 수 있는 친숙한 광경이었다. 방안은 쾨쾨한 메주 뜨는 냄새로 가득 찼다. 횃대에 걸어둔 옷에도 머리카락에도 살갗에도 온통 쾨쾨한 냄새가 배여 들었다. 그 뿐이랴. 된장찌개나 된장국을 먹고 나면 속까지 쾨쾨했다. 한식의 또 다른 감초인 마늘이 가미된 독특한 냄새는 생활 속에 체화된 우리 삶이었다.

집집마다 메주 띄우는 방법이 조금 다른 까닭에 메주 외양이나 품질도 제각각이었다. 누르스름한 것에서부터 거무스름한 것까지 각양각색이었다. 메주의 색깔과 냄새는 그 집안 전통으로 자리 잡을 만큼 고유한 차별성이 있었다. 잘 익은 메주를 가지고 된장, 간장, 고추장 등을 빚는다. 메주는 장맛뿐만 아니라 그 집안음식의 정체성과 위상을 좌우하는 키였다. 메주는 치즈와 비슷한 점이 많다.

메주는 자신을 낮추고 남을 존중한 결과, 네와 내가 하나 된 상태다. 뭉치고 엉켜서 떨어질 수 없고, 이전의 개체로 돌아갈 수 없다. 섞어서 해를 끼치는 게 아니라 발효해 몸에 이로운 것이다. 상호 화학적 결합을 이룬 상태다. 곰삭아 끈적끈적한 실을 공유하게 된다. 메주는 집단적 정서를 가지며 동질성을 보여주는 우리네 얼굴이다. 어설프고 못나고 냄새 나면 어떠랴. 가식과 허세를 버리고 겸손하게 처신하며 너와 나를 차별하지 않고, 관용하고 포용하고 사랑하는 미덕은 성인의 가르침에 다름 아니다. 메주가 주는 은유는 깊고 의미심장하다.

오철환(문인)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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