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물지 않은 망국의 상흔 ~

…‘고타냐’와 만나기로 하였으나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는 ‘김한슈라’의 딸. ‘김한슈라’가 아버지의 첫 부인 ‘김분례’와 동일인임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녀는 ‘김분례’란 이름도 들어본 적 없으며 20년 전 타슈켄트에서 이주해왔다고만 했다. 그녀 어머니 묘소에 함께 가볼 작정이었다. 이리저리 수소문한 끝에 ‘김한슈라’를 ‘김분례’로 추론, 그 딸과 약속을 잡았는데 허사가 됐다./ 우수리스크 묘지로 가서 고타냐의 말을 참고해 김한슈라 묘를 찾았다. 이름과 생몰연도만 있을 뿐 다른 기록은 없었다. 출생연도는 같았지만 김한슈라와 김분례가 동일인이라는 증거는 없었다. 발길을 돌려 육성촌으로 갔다. 육성촌은 증조부가 함경도 온성에서 이주했던 곳, 아버지의 고향. 마을묘지로 가서 조모 묘를 찾아봤다. 혹시나 해서 둘러보았지만 역시나 없었다./ 블라디보스크를 거쳐 하바롭스크로 가는 일정이 잡혀있다. 가는 길에 신한촌을 들렀다. 신한촌은 당시 최대의 한인 집단마을로 하룻밤사이에 많은 사람이 살육된 곳. 기념비만 서있을 뿐 한인들 흔적은 없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열차를 탔다. 아무르만을 지나 라즈돌노예역에 도착했다. 한인들이 중앙아시아로 떠났던 통곡의 역. 화물열차 안에서 수없이 죽고, 허허벌판에 버려져 혹한과 기아로 또 수없이 죽었다. 그런 상황을 감안해서 아버지는 몸이 편찮았던 조모를 홀로 남겨놓았다. 대책 없이 버려졌던 조모의 슬픈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열차는 우수리강을 따라갔다. ‘제야강을 건넜다면 우수리강도 건넜을 거야.’ 아버지의 말이 바람에 실려왔다. 자유시 참변을 생각하며 했던 말. 내부갈등으로 붉은 군대에 의해 독립군이 괴멸된 사건이다. 그 현장을 빠져나온 독립군도 대부분 제야강에서 숨졌다. 그 이후 독립군이었던 조부의 행적이 끊겼다. 아버지가 아내를 남겨두고 하얼빈으로 갔던 것도 조부 생사 확인 차였다. 거기서 확인한 것에 대해선 무슨 연유인지 침묵했다. 사회주의자 아버지는 붉은 독립군과 그 만행을 숨기고 싶었을 것일까. 아버지는 반정부 활동에 빠져 집안을 돌보지 않았다. 어머니는 주정과 폭언에 시달리며 나를 키워냈다. 역사의 질곡에 갇혀 엉거주춤 서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바롭스크에 도착했다. 시립묘지로 가서 명단을 확인했지만 조부 이름은 없었다./ 우수리스크로 돌아왔다. 기록보관소에서 기록과 사진을 열람했다. 소득이 없었다. 아버지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반지를 주면서 첫 아내의 묘를 찾거든 돌려주라고 유언했다. 만주로 갈 때 위급한 일이 생기면 쓰려고 갖고 갔다고 했다. 고타냐 여인의 집을 다시 찾아갔다. 허사였다. 수이펀 강가로 갔다. 강 위로 반지를 던졌다. 강물이 대신 반지를 돌려주기를 바라면서.…

나라 잃은 백성의 아픈 상흔이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다. 무능한 황제와 썩어빠진 지배계급이 잘못해 나라를 빼앗겼지만 그로 인한 고초는 무고한 민초가 겪었다. 몽골의 침략으로 온갖 곤혹을 치르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철저하게 유린당해놓고도 또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으니 안타깝고 비분강개할 일이다. 지난 일을 생각하면 치가 떨리지만 감정을 추스르고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 더 이상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하려면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지금 한반도 주변정세는 살얼음판이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말이 떠오른다.

오철환(문인)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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