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려 깊은 사람처럼 속이 꽉 찬 배추와/저 혼자 양껏 자란 청무 앞에 만난 저녁/어머니 손맛 떠올라 입에 침이 고인다//살짝 데친 잎에다 송송 썬 추억을 얹어/된장까지 올린 쌈을 미어지게 한 입 물면/햇살에 그윽해진 맛이 입 안 가득 번지는//나이를 먹는다는 건 일테면 비로소/무진장 엄마 맛이 그리워진다는 것/어릴 적/데면데면하던 일들이/때로 몹시/고픈 것

「시조세계포엠」(2018, 시조세계시인회)

권영희 시인은 경북 안동에서 출생해 2007년 유심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조집으로 ‘오독의 시간’, ‘달팽이의 별’이 있다.

‘시간이 고이는 저녁’은 일상에서 얻은 시다. 사려 깊은 사람처럼 속이 꽉 찬 배추와 저 혼자 양껏 자란 청무 앞에 만난 저녁에 어머니 손맛이 떠올라 입에 침이 고인다, 라고 노래하고 있다. 나이가 들수록 어머니는 더욱 그립고 어머니의 손맛은 아련해서 그리움은 더욱 깊어진다. 그래서 시의 화자는 살짝 데친 잎에다 송송 썬 추억을 얹어 된장까지 올린 쌈을 미어지게 한 입 물고 있다. 그때 햇살에 그윽해진 맛이 입 안 가득 번지는 것을 느끼며 다시금 어머니를 떠올리게 된다. 어느덧 예전의 어머니의 모습을 빼닮은 자신을 보며 나이를 먹는다는 건 일테면 비로소 무진장 엄마 맛이 그리워진다는 것임을 깨닫는다. 그것은 또한 어릴 적 데면데면하던 일들마저 때로 몹시 고픈 것이라는 사실까지도 환기한다.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친밀성이 없고 어색한 것이 데면데면한 일인데 어릴 적에는 숫기가 없으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일조차도 나이 들면서 아쉽고 그리운 것이 돼버렸다. 시간은 무섭게 흘러가서 모든 것을 과거 속으로 묻어 버리고 물 밀들 밀려오는 미래는 예측불허라서 때로 조바심을 친다.

하여 시인은 또 다른 정경을 떠올리면서 은은한 정서에 젖는다. ‘기억 속의 멜로디’다. 아주 오래 전 하모니카 부는 밭이 하나 있었는데 키 큰 옥수수와 키 낮은 덩굴 콩이 높은음 낮은음을 무는 어린 날의 놀이터에 대한 회상이다. 그곳은 꿈같은 곳이어서 꿈꾸게 하는 곳이고 살랑거리는 바람으로 설레는 공간이다. 흡사 동화 속의 한 장면 같은 그곳의 추억은 지금의 삶을 견인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둑에 앉아 흙으로 두꺼비집을 지으면 짓궂은 뱀도 하나 슬며시 끼어들어 버려 아버지가 달려와 안아줬을 때에야 울음보가 터졌다. 가까운 곳에 아버지가 있었기에 그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화자는 아아 다시 그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라면서 세월은 나조차 날 몰라보게 했지만 풀물 든 원피스 입고 다시금 거기에 서고 싶다고 말한다. 꿈같은 그날로 돌아가고 싶기 때문이다. 그 순간 누구인들 그렇지 않으랴.

그는 또 두 수로 된 ‘탈모’에서 나이가 들면 피할 수 없는 경험을 표출한다. 여긴 그대가 뜨겁게 앉았던 자리는 사랑이 가버렸어도 지지 않는 분화구여서 기억을 벌목해 보아도 베어지지 않는다, 라고 읊조리고 있다. 참신한 비유가 눈길을 끈다. 삶이라는 주사에 망각이란 약을 삼켜도 면역이란 좀체 생기지 않는 자리인 내 안에 우주처럼 앓다 간 그리움이 하나 피어 있는 것으로 의미 부여를 하고 있다. 탈모를 이렇듯 다른 시선으로 형상화한 것은 새롭다. 사랑, 분화구, 벌목, 망각, 면역, 우주, 그리움과 같은 이미지들이 자연스럽게 결합돼 시에 이채로움을 더한다.

권영희 시인의 시편은 사람살이의 살가움과 그리움, 애틋함을 들춰 보여준다. 이젠 유월, 본격적으로 여름이다. 짙푸른 숲이 삶에 부대끼고 지친 이들을 부를 때 한걸음에 달려갈 일이다. 시 한 편 나직이 읊조리며.

이정환(시조 시인)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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