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지가 구름을 타고 신라 영축산에서 중국 오가며 불법 전해

▲ 양산 통도사로 이어지는 영축산 정상. 영축산은 석가모니가 설법했다던 인도의 영축산 이름을 본떠 신라시대에 불교 성지로 표현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 양산 통도사로 이어지는 영축산 정상. 영축산은 석가모니가 설법했다던 인도의 영축산 이름을 본떠 신라시대에 불교 성지로 표현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삼국유사에서 소개하고 있는 신라의 낭지 스님은 출생과 사망년도는 물론 그의 가족 관계, 속명조차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일부 학자는 낭지도 가공인물일 것이라 추측하기도 한다.

유사의 기록으로 보면 낭지 스님은 진흥왕과 진평왕 시대를 전후해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진평왕대에 신라는 중국의 진나라와 수나라와 비교적 활발하게 교섭했다.

이때 중국의 영향으로 법화경 독송이 성행했는데 낭지 스님도 법화경을 익혔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 왕실의 도움으로 불교진흥에 앞장섰던 승려로 짐작이 간다.



낭지의 활동은 신라는 물론 중국에서도 사적기에 기록되는 등 널리 알려질 정도로 성취가 뛰어났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낭지가 머물렀다는 영축산은 지금 울산 울주군에 있는 산으로 인도의 석가모니가 법화경과 무량수경 등을 설법한 산으로 유명한 이름을 따서 붙인 것으로 해석된다. 신라시대 불법이 성했던 곳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겠다.



▲ 영축산은 해발 1천81m 높이로 사방이 훤하게 조망된다. 영축산 8부 능선에서 조망된 양산 시가지.
▲ 영축산은 해발 1천81m 높이로 사방이 훤하게 조망된다. 영축산 8부 능선에서 조망된 양산 시가지.


◆삼국유사: 낭지와 보현보살 나무

삼랑주 아곡현의 영축산에 신비롭고 기이한 승려가 있었다. 암자에 오랫동안 머물렀지만 그 고을에서는 아무도 그를 알지 못했다. 스님도 또한 성과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언제나 법화경을 강론하니 그로 인해 신통력이 있었다.



용삭 초년(661)에 지통이란 승려가 있었는데 이량공 집의 종이었다. 일곱 살에 출가하니 그때 까마귀가 와서 울면서 말하기를 “영축산으로 가서 낭지의 제자가 되라”고 했다.



지통이 이 말을 듣고 영축산을 찾아가서 골짜기의 나무 밑에서 쉬고 있는데 별안간 신이한 사람이 나타나서 “나는 보현보살인데 너에게 계율을 주려고 왔노라”며 계를 베풀고는 그만 사라졌다. 지통은 신비스럽게도 마음이 넓어지고 지증이 일시에 두루 통했다.





▲ 영축산은 고지가 높아 수시로 해무가 몰려와 신비스런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 영축산은 고지가 높아 수시로 해무가 몰려와 신비스런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이에 앞으로 나아가는데 길에서 한 승려를 만나서 낭지스님이 어디에 계시느냐고 묻자 그 스님이 “어찌해 낭지를 찾는가”라고 물었다.

지통이 신비스런 까마귀 이야기를 자세히 했더니 그 스님이 빙그레 웃으면서 “내가 바로 낭지인데 지금 막 법당 앞에 까마귀가 와서 알리기를 성스런 아이가 스님에게로 올터이니 나가 영접하라고 해 이렇게 나와 맞이하는 것이다”고 대답했다.



이어 손을 잡고 감탄하며 “신령스런 까마귀가 너를 깨우쳐 나에게 오도록 하고 나에게 알려 너를 맞이하게 하니 이 얼마나 상서로운 일이냐. 아마도 산신령이 몰래 도우신 듯하다”고 말했다. 전해오는 말에 산신령은 변재천녀라고 한다.



지통이 이 말을 듣고 울며 감사드리면서 스님에게 예를 올렸다. 이윽고 계를 주려하자 지통이 “저는 골짜기 입구에 있는 나무 아래서 이미 보현보살의 은혜를 입어 정계를 받았습니다”고 이야기했다.







▲ 영축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등산로와 넓게 조성한 임도가 있어 8부 능선까지는 차량 진입이 가능하다.
▲ 영축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등산로와 넓게 조성한 임도가 있어 8부 능선까지는 차량 진입이 가능하다.






낭지가 감탄하면서 “훌륭하도다. 너는 이미 보현보살이 친히 주는 만분계를 받았구나. 나는 태어난 후 매일 삼가면서 절실하게 보현보살님 만나기를 염원했지만 아직도 정성이 통하지 못했는데 너는 벌써 계를 받았으니 내가 너에게 아득히 미치지 못하는구나”고 하면서 도리어 지통에게 예를 갖췄다.

이로 인해 그 나무를 보현수라 이름지었다.



지통이 말하기를 “법사님은 이곳에 머무신 지 오래된 듯합니다”라고 하니 낭지가 “법흥왕 정미(527)에 처음으로 발을 붙였으니 지금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다”고 답했다.

지통이 이 산에 왔을 때는 바로 문무왕 즉위 원년인 신유(661)이니 계산해 보면 이미 135년이 된다.



지통은 그 후에 의상의 처소로 가서 오묘한 이치를 깨달아 심오한 경지까지 올랐으며 불교의 교화에 커다란 도움이 됐다. 지통이 바로 ‘추동기’의 저자이다.



원효가 반고사에 있을 때 늘 낭지를 찾아갔다. 당시 낭지가 원효에게 ‘초장판문’과 ‘안신사심론’을 저술하게 했다. 원효가 저술을 끝마치자 은사 문선을 시켜 책을 받들어 보냈다. 그편 끝에 게를 적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영축산 등산로는 바위길로 좁고 급경사로 가파르게 조성돼 오르기가 쉽지 않다.
▲ 영축산 등산로는 바위길로 좁고 급경사로 가파르게 조성돼 오르기가 쉽지 않다.


‘서쪽 골짜기의 사미가 머리 조아려/ 동쪽 봉우리 높고 높은 큰스님 앞에/ 예 올리나이다/ 가는 티끌 불어 영축산에 보내고/ 작은 물방울 날려 용연에 더하나이다. (등으로 기록돼 있다.)’



산의 동쪽에 태화강이 있으니 이는 곧 중국 태화지 용의 복을 옮겨오기 위해 만든 것이므로 용연이라 했다.



지통과 원효는 모두 큰 성인다. 두 성인도 그를 공경해 스승으로 섬겼으니 낭지스님의 도가 고매함을 알 수 있다. 스님은 일찍이 구름을 타고 중국의 청량산으로 가서 청중과 함께 강의를 듣고 삽시간에 돌아왔으므로 그곳 중국의 승려들은 그가 이웃에 사는 사람으로 여겼다. 그러나 어디에 사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하루는 여러 승려들에게 “이 절에 상주하는 사람들은 제외하고 다른 절에서 온 스님들은 각자 자기가 사는 곳의 이름난 꽃과 진귀한 식물을 가져다 도량에 바쳐라”고 지시했다.





▲ 영축산 자락에 자리잡은 통도사로 진입하는 산문.
▲ 영축산 자락에 자리잡은 통도사로 진입하는 산문.


낭지가 이튿날 산중에 있는 이상한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 와 바쳤다. 그곳 승려들이 그것을 보고 바로 “이 나무는 범어로 달제가라 하며 여기서는 혁이라 하는데 오직 서천축과 신라의 영축산 두 곳에만 있다. 그 두산은 모두 제10 법운지로서 보살이 머무는 곳이니 이는 필시 성자일 것이다”라 말했다.



마침내 그의 행색을 살펴보고는 그제야 신라의 영축산에 머물고 있음을 알게 됐다. 이로 인해 낭지를 다시 보게 되고 그의 이름이 온 세상에 드러났다. 신라 사람들이 그 암자를 혁목이라 부르니 지금 혁목사의 북쪽 등성이에 있는 옛터가 바로 그 절이 있던 자리이다.



영축사기에 기록 돼 있기를 ‘낭지가 언젠가 말하기를 이 암자 터는 바로 가섭불 당시의 절터다라 해 땅을 파서 등잔 기름병 두 개를 얻었다. 원성왕 때에는 연희대덕이 이 절에 와서 머물면서 스님의 전기를 지어 세상에 전했다’고 한다.

화엄경을 살펴보면 제10은 법운지라고 했으니 지금 스님이 구름을 탄 것은 대개 부처님이 세 손가락을 구부리고 원효가 몸을 100개로 나누는 것과 같을 것이다.





▲ 영축산은 신라시대 불적이 깃든 곳이다. 전체가 화강암으로 뒤덮힌 바위산이지만 숲이 우거져 절경이다.
▲ 영축산은 신라시대 불적이 깃든 곳이다. 전체가 화강암으로 뒤덮힌 바위산이지만 숲이 우거져 절경이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낭지가 지통을 가르치다

영축산의 낭지 스님은 보현보살의 계를 받아 깨달음이 깊어 육신통에 이르렀다. 세상일에 막힘이 없고 모든 일에 능하여 앞으로 닥칠 일까지 꿰뚫어 보는 신통력을 가졌다.



낭지는 주변 마을 주민과 찾아오는 백성들에게 법화경을 설법하며 부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일에 매진했다. 백성들이 불심을 얻어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 그의 뜻이었다.



낭지는 구름을 타고 하루에도 천리를 가볍게 다녀오는 신출귀몰하는 신법을 깨우쳐 중국의 유명사찰에서 진행되는 법회에도 참여해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전하는 일에 충실했다.



낭지는 직접 설법하는 일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부처님의 말씀을 널리 전하기 위해 찾아오는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에도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다.





▲ 영축산 통도사로 들어가는 길은 모두 울창한 소나무 숲길로 조성되어 있다.
▲ 영축산 통도사로 들어가는 길은 모두 울창한 소나무 숲길로 조성되어 있다.






낭지는 어느날 어린 지통이 공부하러 오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산 아래까지 마중을 나가 맞이했다. 낭지는 허리 굽은 할아버지로 변장해 큰 나무 그늘에서 낮잠을 자는 척하고 있었다.



어린 지통이 땀을 뻘뻘 흘리며 그늘 아래로 오더니 잠든 낭지 스님에게 “영축산 낭지 스님을 찾아가는데 어디로 가면 되는지요?”라고 물었다. 낭지가 대답은 하지 않고 “목이 마르니 물 한바가지 떠오느라”고 이야기했다. 지통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더니 냉큼 달려가 나뭇잎을 모아 물을 떠왔다.



낭지 스님은 웃으며 물을 받아 시원하게 마시고는 그가 머무는 영축산 암자로 가는 길을 가르쳐 줬다.



살을 태우는 둣한 무더위에 쉬지 않고 산길을 올라 암자에 이른 지통이 큰 소리로 낭지 스님을 찾았다.

“왜 그러시오”라며 장난스런 얼굴로 나오는 낭지를 보고 지통이 깜짝 놀라며 “할아버지는 산 아래에서 물을 찾으시던 그분이죠”라며 물었다.



그로부터 지통은 밤을 낮삼아 공부에 전념해 약관의 나이에 부처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낭지 스님은 지통에게 그의 설법에 따라 백성들에게 전할 법화경 해석본을 짓도록 했다.



낭지는 또 이미 몸을 100가지로 변하는 깨달음을 얻은 원효에게도 ‘초장판문’과 ‘안신사심론’을 저술하게 해 불법을 널리 전파하게 했다. 지통과 원효의 발걸음을 따라 영축산을 찾는 발길이 산허리를 깎아내릴 정도로 번잡해졌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저작권자 © 대구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