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 이건희 컬렉션

발행일 2021-05-12 13:24:08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대구는 한국 근대미술의 개창지다. 이는 한국 근대미술을 말할 때면 늘 나오는 얘기다. 왜 그렇게 주장할까. 당연히 근거가 있다.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대개 시기적으로는 19세기 말부터 1960~70년대까지를 한국 근대미술기로 많이들 얘기한다.

이 시기 대구에는 석재 서병오가 1920년대 초 발족시킨 ‘교남시서화연구회’라는 단체가 있었다. 글씨와 문인화를 주로 한 서화계의 교류와 교육을 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여기에서는 당시 막 들어오기 시작한 서양화에 대한 연구도 이루어졌다.

연구회는 1922년 서화를 위주로 한 첫 전람회를 개최한 데 이어 1923년에는 이를 확대해 서화 외에 서양화부를 별도로 둔 대구미술전람회를 개최했다. 또 당시 대구뿐 아니라 영남 일대 그리고 서울 등 더른 지역과의 교류에도 힘을 쏟았다. 대구 미술인들이 근대미술의 기초를 앞서 배우고 그 토양을 닦아 나갈 수 있는 배경이었다.

한국 근대미술에서 천재화가로 불리는 이인성과 이쾌대가 나올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대구의 토양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쾌대(1913~1965년)는 경북 칠곡 출신으로 어린 시절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대구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1928년 서울 휘문고를 거쳐 1934년 일본 도쿄제국미술대학교에 유학해 본격적으로 그림을 공부했다.

반면 이인성(1912~1950년)은 대구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초교를 졸업한 뒤 상급 학교 진학을 못 해 그림을 독학으로 배워야 했다. 1931년 일본에 건너가 1935년까지 도쿄의 태평양미술학교에서 그림 수업을 받았다. 두 사람 모두 대구 수창초교를 졸업했다.

이인성은 대표작 ‘가을 어느 날’(1934년) ‘경주의 산곡에서’(1935년) 등을 통해 나라는 빼앗겼지만 여전히 우리 땅인 한반도에서 사는 한국인의 모습과 자연 풍광을 그려 한국의 전통을 그 뿌리부터 표현해 냈다는 평을 받았다. 1950년 6.25 전쟁 중에 사망했다.

이쾌대는 이념의 희생양이 돼 6·25전쟁 이후 한동안 남과 북 양쪽 모두에서 잊혔던 불운의 화가였다. 1980년대 해금 이후 남한에서 그의 천재성이 재조명됐다. 대표작 ‘자화상’과 함께 ‘군상’ 연작은 그에게 근대미술 최고의 군상작가라는 평가를 안겨 주었다.

고 이건희 회장의 타계 이후 후손들이 유산 사회환원의 일환으로 소장 미술품을 정부와 각 지자체에 기증했다. 이를 계기로, 지역 출신 근대작가 8인의 작품 21점을 기증받은 대구에서는 대구 근대미술 재조명 분위기가 일고 있다. 또 전국 지자체에서는 ‘(가칭)이건희 미술관’ 유치전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 대구에 온 ‘이건희 컬렉션’ 21점

대구시는 이건희 컬렉션 21점을 기증받은 대구미술관에 ‘상설 기증 전시실’을 운영할 계획이다. 올해로 개관 10돌을 맞은 대구미술관에서 시민들이 기증된 최고 수준의 작품들을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조치이다.

또 시는 별도의 전시 공간 마련 외에, 기증된 21점이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통찰할 수 있는 작가들의 대표성 있는 작품이라는 점을 고려해 기증 작가와 작품에 대한 심도 있는 전문 연구도 추진할 계획이다. 대구미술관은 우선 8명의 작가별로 시리즈 8편을 제작해 유튜브와 홈페이지를 통해 영상물을 소개한다. 또 작가와 작품 연구가 마무리되는 대로 올해 12월께 이건희 기증작 21점의 기획전시도 할 예정이다.

기증된 21점은 작가의 명성은 물론이고, 작품성에서도 최고 수준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이인성과 이쾌대 외에 한국 추상화의 거장 유영국, 서동진, 서진달, 변종하, 김종영, 문학진 등의 대표작이 모두 망라돼 있다.

이인성은 1929년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선전)에서 수채화 ‘그늘’로 처음으로 입선했다. 이후 일본에서 서양화를 본격적으로 공부한 그는 1934년 제13회 선전에 ‘가을 어느 날’을 출품해 특선을 차지했으며, 1935년 제14회 선전에서는 ‘경주의 산곳에서’로 최고상을 받았다. 대표작 ‘노란옷을 입은 여인상’(1934년)이 이번 기증 목록에 들어있다.

이쾌대는 1932년 제11회 선전에서 처음 입선했다. 1941년 이중섭 최재덕 문학수 등과 함께 조선미술가협회를 조직해 도쿄와 서울에서 동인전을 열었다. 해방 이후에는 좌익계 미술 단체에 가담해 활동했다. 전쟁 중 국군에 포로가 돼 거제도수용소에 있다가 1953년 남북 포로교환 때 북쪽을 택했다.

1908년생인 서진달은 일본 유학 후 1941년 대구 계성중에 출강했는데 당시 미술부에는 변종하 김우조 백태오 김창락 등이 있었다. 변종하는 1926년 출생으로 1956년 제4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았으며 1959년 프랑스로 건너가 작품활동을 하다 1975년 귀국했다. 유영국은 1916년 경북 울진에서 태어났다. 한국 추상미술 영역을 개척한 선구자로, 한국의 자연을 아름다운 색채와 대담한 추상 형태로 빚어내 최고의 조형감각을 지난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 지금 전국은 ‘이건희 미술관’ 유치전

‘이건희 미술관’ 유치전이 전국을 후끈 달구고 있다. 유족이 소장 미술품 2만3천여 점을 기증한 뒤 대통령이 이들 기증 미술품을 위한 전용 전시공간 마련의 필요성을 언급한 이후부터다.

현재 서울을 비롯해 대구 부산 창원 광주 의령 수원 대전 등, 이건희 회장이나 삼성그룹과 이런저런 인연이 있는 지역에선 다 유치전에 뛰어들고 있다. 대구시는 ‘이건희 미술관’의 대구 유치를 위해 5월7일 지역 미술계 인사들이 참여한 가운데 협의회를 열고 앞으로 민간 주도로 유치추진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했다.

시는 대구와 삼성과의 오랜 인연을 유치 명분으로 앞세우고 있다. 고 이병철 회장이 1938년 삼성그룹 모태인 삼성상회를 창업한 곳이 중구 인교동이고, 1942년 이건희 회장이 출생한 곳도 대구라는 점을 강조한다.

또 한국 근대미술사에서 대구가 차지하고 있는 위상도 강조한다. 서양화가 국내에 처음 도입되던 1920년대, 이여성(이쾌대의 친형) 박명조 서동진 등 대구 출신 선각자들의 역할이 컸다는 점에서 사실상 대구가 근대미술의 발상지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현재 건립 중인 간송미술관, 기존 대구미술관에다 이건희 미술관까지 세워진다면 대구가 고전과 근대, 현대 미술을 아우르는 명실상부한 미술도시로 자리매김하게 된다는 것이다. 기증된 이건희 컬렉션 중 절반 이상이 근대미술 작품이다.

지역 미술계는 ‘대구는 한국 근대미술의 발상지다. 대구시와 지역미술계에서는 이미 국립근대미술관 대구 건립을 추진해 왔다. 따라서 한국 근대미술의 보고가 될 이건희 미술관은 당연히 대구에 건립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박준우 논설위원 겸 특집부장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유족들이 이 회장이 평생 수집한 개인소장 미술품 1만1천여 건, 2만3천여 점을 국가 박물관 등에 기증했다. 사진은 5월7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기증품 관련 세부 공개 발표회 모습이다.연합뉴스


윗줄 왼쪽부터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단원 김홍도의 ‘추성부도’(보물 1393호), 고려 불화 천수관음 보살도(보물 2015호). 가운뎃줄 왼쪽부터 김환기의 ‘여인들과 항아리’, 이중섭의 ‘황소’, 박수근의 ‘절구질하는 여인’. 아랫줄 왼쪽부터 국외 작품인 호안 미로의 ‘구성’,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 살바도르 달리의 ‘켄타우로스 가족’.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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