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113>월명사 도솔가

발행일 2021-05-10 09:59:37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경덕왕이 월명을 청해 도솔가를 들어 하늘의 변괴를 막아

경덕왕 대에 사천왕사에 월명 스님이 머물고 있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사천왕사지를 발굴하면서 목탑 기단부에서 녹유신장상을 출토하는 장면.


삼국유사가 소개하는 스님들의 이름이 수상하다.

경덕왕 대에 유명했던 월명 스님의 이름이 그렇다.

밝은 달이라고 해석된다.

유사에서 소개하는 글의 내용과 딱 맞아 떨어지는 이름이다.

그리고 월명사는 이 대목 이외에서는 찾아볼 수 없어 더욱 가공인물일 것이라는 추측이 정당성을 확보한다.

충담 스님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경덕왕 대에 안민가를 지은 내용과 같이 충성스런 이야기를 했던 스님이라는 뜻으로 유사가 소개하는 의미를 그대로 담은 이름이다.

충담 스님도 삼국유사의 다른 곳에서는 등장하지 않아 가공 인물일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월명사와 충담사의 예를 보아도 일연 스님이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내용에 맞는 이름을 붙인 것으로 추정하는 학자들의 의구심이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른다.

사천왕사에서만 머물렀다는 스님이 달밤에 길을 가면서 피리를 불었더니 달이 가는 길을 멈추고 그의 걸음을 비추고 있었다는 월명 스님의 전설 같은 이야기에는 경덕왕의 마음도 함께 깃들어 있다.

경주 낭산 입구의 사천왕사는 문무왕이 당나라 수군의 침략을 막기 위해 명랑법사로 하여금 문두루 비법을 시행하게 했던 호국사찰이다. 당시 든든하게 지었지만 1천300여 년이 지난 지금 주춧돌 흔적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동서 목탑지의 모습.


◆삼국유사: 월명사 도솔가

경덕왕 19년 경자(760) 4월 초하루에 해 두 개가 나란히 나타나 열흘 동안이나 사라지지 않았다. 일관이 왕에게 “인연 있는 승려를 청해서 산화공덕을 베풀면 재앙을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왕은 조원전에 정결한 단을 만들고 청양루에 행차해 인연 있는 승려를 기다렸다.

이때 월명사가 밭두둑으로 난 남쪽 길을 가고 있는데 왕이 사람을 보내 그를 불러서 단을 열고 기도문을 짓게 했다.

월명이 “소승은 그저 국선의 무리에 속해 있을 따름이라 안다는 것이 향가뿐이오며, 불교노래는 익숙하지 못하옵니다”고 말했다.

이에 왕이 “이미 인연 있는 스님으로 지목됐으니 향가를 짓는다 해도 좋소이다”며 요청했다.

월명이 왕의 청을 받들어 도솔가를 지어 올렸다.

문무왕 대에 지은 호국사찰 사천왕사는 7번 국도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500여m 거리에 망덕사를 지어 중국의 사신을 사천왕사로 속여 전쟁을 예방했다. 사천왕사지 금당터.


도솔가를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용루에서 오늘 산화가 불러/ 청운에 한 송이 꽃을 날려보낸다/ 은근하며 정중한 곧은 마음이 시킨 것이니/ 멀리 도솔천의 부처님을 맞이하라.’

지금 세간에서는 이를 가리켜 산화가라고 하지만 틀린 것이다.

마땅히 도솔가라 해야 한다.

따로 산화가가 있으나 글이 길어서 싣지 않는다.

이러고 나니 해의 변괴가 즉시 사라졌다.

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좋은 차 1봉지와 수정염주 108개를 내려 줬더니 깨끗한 몸차림을 한 어떤 동자가 공손히 꿇어앉아 차와 염주를 받아 궁전의 서쪽 작은 문으로 나가버렸다.

월명은 이 동자가 대궐 안에서 심부름하는 아이라고 여겼고, 왕은 스님의 시종이라 생각했다. 서로 알아보니 모두 아니었다. 왕이 이를 매우 괴이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뒤쫓게 했더니 동자는 내원의 탑 안으로 사라지고 차와 염주는 남쪽 벽에 그려져 있는 미륵보살상 앞에 있었다.

사천왕사지의 목탑과 형식을 비슷하게 지었던 망덕사 터에 기단부에 신장이 새겨진 동서목탑지가 발견됐다. 경주시가 사천왕사지 목탑지 기단을 복원하는 공사가 진행 중이다.


월명의 지극한 덕과 정성이 미륵보살을 강림시킬 수 있음을 알았다. 조정에서나 민간에서 이 일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왕이 더욱 그를 공경해 다시 비단 100필을 줘 큰 정성을 보였다.

월명이 일찍이 죽은 누이동생을 위해 재를 올리면서 향가를 지어 제사를 지내자 홀연히 회오리바람이 일어나더니 종이돈이 날아 올라가 서쪽으로 사라졌다.

그 향가는 제망매가라 하여 다음과 같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은/ 이 세상에 있으매 저어하고/ 너는 나는 갑니다라는 말도 하지 못하고 어찌해 가버렸느냐/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 저기에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한 가지에 나고서도 떨어져 가는 곳은 모르는구나/ 아아, 서방 극락세계로 간 누이를 만날 날을 나는 도 닦아 기다리리라.’

월명은 언제나 사천왕사에 살았는데 피리를 잘 불었다. 언젠가 달밤에 피리를 불면서 문 앞의 큰길을 지나가니 달이 그를 위해 가는 것을 멈췄다. 이로 인해 그 길을 월명리라 했으며 월명사란 이름도 이 일로 해서 불리게 됐다. 스님은 바로 능준대사의 제자이다.

신라 사람들은 향가를 숭상한 지 오래 됐다. 대개 시가와 송(제사를 지낼 때 덕성과 공을 신명에게 고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이따금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킨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다음과 같이 찬미한다.

‘바람은 종이돈 날려 저승 가는 누이 노자로 하고/ 피리소리는 밝은 달을 흔들어 항아의 걸음 멈추게 하네/ 도솔천이 하늘처럼 멀다고 말하지 말라/ 만덕화 한 곡조로 너의 넋을 맞으리라.’

사천왕사지의 당간지주로 보이는 돌기둥이 낭산 선덕여왕릉 입구에 서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경덕왕과 월명사

경덕왕은 신라 천년을 통틀어 가장 발전했던 정점에 이르렀던 시기의 통치자라 할 수 있다. 역사에 남은 흔적을 보아도 그렇다.

경덕왕은 불교와 깊은 인연을 가졌다. 왕이 재위하던 시기에 신라 최고의 종합예술을 자랑하는 불국사와 석굴암이 탄생했다. 석굴암의 기하학적 신비에 더해 석가탑과 다보탑의 조형미는 예술의 정점을 논하게 한다. 성덕대왕신종을 주조하기 시작했고, 화려한 누각이 있는 복원된 월정교를 가설했다.

경덕왕은 또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처신한다면 나라가 평안할 것’이라는 안민가를 지은 충담사, 도솔가를 지어 하늘의 변괴를 사라지게 한 월명사 등과의 인연을 맺은 왕이기도 하다.

통일신라의 최고 전성기를 맞았던 경덕왕대에 설화를 바탕으로 하는 많은 인물들이 배출됐다. 안민가를 지어받친 충담과 제망매가를 지은 월명도 이때의 사람이다. 경덕왕릉 입구.


손에 칼을 들면 적이 꽁무니를 빼고 달아났다는 화랑 월명이 칼을 버리고 사천왕사에 머물며 목탁과 피리를 손에 잡은 인연은 기구하다.

월명은 하급관리의 아들이었다. 어릴 때부터 체구가 단단하고, 총명하며 무술이 뛰어나고 활달한 성격으로 그의 주변에는 친구들이 항상 많이 모여들었다.

월명은 얼굴이 여자처럼 잘 생기고 단아한 체구였지만 단오날에 열린 씨름대회에서 그를 이긴 사람이 없을 정도로 힘은 천하장사였다. 그는 항상 씨름에서 이기고 상대가 나타날 때까지 모래판에 주저앉아 피리를 불었다.

이때 월명이 부는 피리 가락에 따라 구경꾼들은 어깨춤을 더덩실 추다가 슬픔에 겨워 눈물을 훔치기도 하며 씨름을 보면서 흥분했던 마음을 한순간에 가라앉혔다.

어느 단오날 월명의 활달함과 피리가락에 마음을 빼앗긴 천원마을 과수댁 처녀가 있었다. 어머니를 따라 과일과 채소를 팔며 연명하는 처녀였다. 워낙 미모가 출중해 주변 총각들이 연일 추파를 던졌지만 곁을 주지 않았다.

신라시대 최고 전성기를 누렸던 경덕왕의 왕릉은 호석과 난간이 둘러져 통일신라 왕족무덤을 대표하는 양식을 선보이고 있다.


어느 날 우연히 과일을 사던 월명과 그 처녀가 눈길이 마주친 이후 하루도 보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하는 연인 사이로 발전해버렸다. 그들의 마음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들의 사랑이 채 영글기도 전에 월명의 아비와 그 처녀의 어미가 매파의 주선으로 일가를 이루게 됐다. 월명은 새어머니를 따라와 여동생이 돼 버린 마음속의 정인을 한지붕 아래에서 매일 만나게 된 것을 기쁨이요 다행으로 여기며 살아야 했다.

그들의 애틋한 사랑은 오누이 사랑으로 발전해야 했지만 마음속에는 이미 장마비로 쏟아지는 소나기로도 끌 수 없는 뜨거운 불씨로 타오르고 있었다.

오누이가 된 연인은 하루가 멀다하고 저녁이면 마을 뒷산으로 올라 피리가락에 마음을 실었다. 바람이 불고 달이 차고 기울기를 거듭하면서 그들의 피리사랑은 자꾸 자랐다.

다시 단오날이 되어 씨름판이 열렸지만 월명은 나서지 않았다. 누이가 월명의 등을 떠밀어 다시 씨름판에 서게 했다. “슬픈 어깨보다는 호랑이 모습으로 모래판을 뒤집는 오라버니가 훨씬 보기좋다”는 말에 월명은 그해에도 천하장사가 됐다.

경덕왕릉은 일반 신라초기 왕릉과 다르게 시가지를 벗어나 내남면에 위치가 정해져 지금도 고즈넉한 분위기다.


누이가 소를 타고 돌아오는 오라버니 월명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곤 뒷산에 피어있는 개철쭉 한아름을 묶어주는 일 뿐이었다. 한달음에 뒷산으로 달려간 누이가 더 예쁘게 핀 철쭉을 꺾으려다 벼랑에서 떨어졌다. 그리고는 월명의 피리소리를 들을 수 없는 불귀의 길로 가버렸다.

누이를 철쭉이 핀 벼랑 아래 묻고 사흘 밤낮을 피리로 마음을 달래던 월명은 어버이에게 큰 인사를 올리고는 머리를 깎고 사천왕사로 들어갔다.

월명이 달뜨는 날이면 언덕에 올라 ‘제망매가’를 피리로 불었다. 월명의 피리소리가 멎을 때까지 밝은 달은 걸음을 멈췄다. 피리를 들고 사천왕사로 돌아오는 월명을 경덕왕이 불러 세우고 세상근심을 잠재우는 소리를 청해 도솔가를 들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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