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 천영애
▲ 시인 천영애
천영애

시인

지인의 포도밭에서 종일을 보냈다. 지금 막 자라나오는 새순 중에서 못 쓰는 순을 잘라주고, 여기저기 잡을 곳만 있으면 휘감고 올라서는 포도손을 잘라주기 위해서이다. 지인은 도시에 사는 내가 하기 힘든 일이라고 극구 말리지만 나는 가끔 밭에 들러 그렇게 시간을 보낸다.

그렇게 포도나무의 새순을 잘라주고 또 시간이 지나면 포도 알맹이를 빼주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날은 지인이 모르는 충만감이 내 속에 가득 찬다. 노동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다. 흐트러졌던 줄기가 가지런히 정리된 포도나무를 되돌아보면 알 수 없는 만족감과 기쁨이 생긴다. 노동은 힘들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작은 만족감과 더 나아가 알 수 없는 삶의 충만감까지 느끼게 해준다. 책상에 앉아 책만 보는 시간에서는 느끼기 힘든 기분이다.

무엇보다 그런 일이 좋은 이유는 머릿속이 아주 단순하게 비워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끔 오전 내내 책을 보다가 농장에 들러 일을 도와주기도 하는데 여자이면서 도시인이기도 한 사람들은 잘 하려 하지 않는 일이라 농장주는 신기하다고 하지만 내 속셈은 몸도 좀 움직이고 싶고 머릿속도 비우고 싶어서이다.

흔히 노동은 힘들다고 여긴다. 물론 힘들지 않은 노동은 없다. 어쩌면 내가 하는 그런 일들은 노동이라기보다는 놀이이기도 하다. 노동이 수입으로 연결돼야 하는 스트레스와 짧은 시간 동안에 하는 일이라서 고단함이 적다. 그냥 해도 좋고 안 해도 그만인 그런 일들은 노동이라고 하기조차 민망하지만 포도나무 새순이 올라오고 수확 때까지 나는 자주 그런 일들을 한다. 머리를 쓰는 일을 하는 내게 그 일들은 복잡한 머리를 비우는데 최적의 일이기 때문이다.

노동이 놀이가 되고 놀이가 노동이 되는 환경은 노동자에게는 최상의 환경이다. 이 말은 곧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람은 일 없이는 살아가기 힘든 종족인데 이것은 일이 없는 사람의 무력감에서 잘 느껴진다. 힘들다고 하면서도 일을 손에서 놓지 않는 것에서 보듯 사람은 일을 통해서 살아간다.

그러나 그러한 일이 노동이 돼 버리면 인간은 불행해진다. 인간은 노동하는 인간이 돼 그 일에 끌려다니고 종속된다. 그러나 일이 놀이가 되는 순간 그 일은 인간을 행복하게 한다. 포도밭에서 일을 도와주고 온 날은 온 몸이 아플 정도로 고생하는 날도 있지만 내가 즐겨 포도밭을 찾는 이유는 그 일이 나를 행복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가능하면 일을 기피하려고 한다. 일이 노동이 돼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가 일을 하는 이유는 꼭 금전적인 것으로 댓가를 지불받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금전적인 댓가는 그 일을 하는 큰 이유 중의 하나지만 반드시 그 이유만으로 노동을 한다면 대부분의 인간은 스트레스로 지쳐 쓰러질 것이다. 일을 하면서 느끼는 보람이나 성취감, 충만감 등이 알게 모르게 노동하는 인간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행복하게 한다.

오월은 근로자의 날이 있는 달이다. 문명을 만들어내는 가장 선두에 서 있는 노동자들은 예로부터 열악한 환경에서 악전고투해 오면서 자본과 투쟁해 왔다. 그 오랜 투쟁이 좀 더 나은 노동환경을 만들어내는데 지대한 역할을 해왔는데 오월에 들어 인간의 노동에 대한 가치를 다시금 생각해 본다. 노동자들이 만들어낸 각종 전자제품과 자동차와 각종 사물들이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다. 많은 일들을 로봇이 대체하면서 노동자들의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지만 앞으로 당분간은 노동자 없이 이 도시가 유지되기는 힘들 것이다.

오월이 되면 여기저기서 휘날리던 투쟁의 깃발은 이제 사라지고 여가를 찾아 휴가를 떠나는 노동자들이 대부분이다. 근로자의 날 복잡한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차 속에 있는 많은 노동자들의 노동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들의 여가에는 그동안의 오랜 노동에 대한 수고로움이 스며 있을 것이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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