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사 가노라면, 마음에 빈 헛간처럼 헛헛한 그 무엇 있어/ 절 한참 아래 저수지 둑 옆 소의 굽은 잔등 같은 가장자리에 차 멈추고/ 진흙으로 빚은 테라코타처럼 한참을 서 있곤 하지// 가을 햇볕에 잘 익은 바람이 나뭇잎과 풀잎 통해 서성대는 곳/ 공기의 바스락대는 소리까지 또렷하게 보이는 곳/ 해거름이면 본질을 감싸 도는 신비로움이 옹알거리는 곳// 알 수 없는 누군가 그림자 끌며 오갈 듯한/ 저수지 안쪽, 우물처럼 한없이 깊어 보이는/ 잡초 뒤덮인 어둑한 숲속/ 그 속에, 아주 오래전 이 마을 살던/ 할머니가 저수지에 몸 던져/ 동네 사람들이 할마이 저수지라 부르는 이곳/ 그 혼령 떠돈다는 흉한 소문까지 어슬렁거리며 등뼈처럼 버티고 섰지// 저수지는 윗마을에서 흘러내려 오는 개울물 가뒀다가 곧장 아랫마을 농업용수로/ 되돌려주는 곳이라, 사철 엇비슷한 담수를 저장하고 있는 곳 다시 말해 저수지를/ 사이에 두고 윗마을과 아랫마을이 물의 파이프에 꽂혀 있다네// 하여튼, 그렇게 저수지 주변 거닐며/ 세속에 허물어진 몸 한 번 추스른 뒤/ 연식 오래된 차 시동 걸고 곧 쓰러질 듯 덜컹 삐걱거리며/ 도리사 깔딱 고갯길, 걷듯 느릿느릿 겨우 올라 절 마당 들어서면// 시골 늙으신 어머니가 오랜 타향살이 끝에 모처럼 고향 찾아온 자식 위해/ 부엌 사잇문 열고 슬며시 따스한 한 끼 밥상 내미시듯/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늑함 있어/ 그 아늑함의 맨발바닥 찰바닥거리는 소리 따라가노라면/ 세상 모든 시간들 커다란 빈 항아리 속처럼 깊고 고요해져 환하다

「대구문학」 (대구문인협회, 2021. 3)

도리사는 신라에 불교를 전한 아도화상이 구미 태조산에 세운 천년고찰이다. 복숭아꽃과 오얏꽃은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상스러운 꽃이다. 그래서 도리사(桃李寺)는 극락정토로 가기 위해 기도하는 도량이다. 극락정토를 주재하는 아미타불을 모시는 극락전이 그 중심 가람인 것도 그런 연유이다. 도리사 가는 길의 감회는 남다르다.

절 한참 아래에 전개되는 속세는 소의 굽은 잔등처럼 굴곡지고 힘들다. 빈 헛간처럼 헛헛하고 황량한 마음이 발길을 잡는다. 정신 나간 사람마냥 우두커니 서서 저수지에 깊이 담긴 검푸른 물을 바라본다. 손 흔드는 나뭇잎과 여유로운 풀잎이 햇볕을 태운 바람을 맞아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옹알거린다. 이야기를 품은 외로운 그림자는 가냘픈 한숨을 살포시 내쉰다.

잡초로 뒤덮인 내밀한 우물처럼 깊은 저수지 안쪽엔 슬픈 전설이 스며있다. 옛날 옛적에 마을 할머니가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저수지에 몸을 던졌다. 그로부터 주인 없던 못은 ‘할마이 저수지’가 됐다. 갈 길 잃은 할마이 영혼은 한 많은 사연을 들고 저수지를 마냥 어슬렁거릴 터. 물에 뛰어들면 세상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리라 믿었건만 정작 남은 것은 벗을 수 없는 업이다. 이미 엎질러진 물인걸 어리석은 선택을 후회한들 무엇 하리.

윗마을과 아랫마을은 물로 연결된 운명공동체다. 허나 그 파이프가 끊어지면 연이 끊어지는 허무한 관계다. 이해관계에 매달린 인간세상의 덧없음이 물과 같다. 물을 모아둔 곳이라고 다를 건 없다. 저수지를 거닐다가 ‘색즉시공, 인생무상’의 깨달음을 얻는다. 도리사로 발길을 재촉한다. 도리사엔 어머니 같은 아늑함이 있고, ‘커다란 빈 항아리 속처럼 깊고 고요해져 환하다.’ 아미타불.

오철환(문인)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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