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향교

옛날 신라의 궁성이었던 월성의 서쪽이자 김알지의 탄생처로 전해지는 계림의 남쪽 지역은 경주시 교동(혹은 교촌・교리)이다. 이곳에는 신라의 유적인 월정교나 김유신 가문의 상징인 재매정 등과 함께 원효와 혼인했던 요석궁주가 살았다는 요석궁 터로 알려진 신라 국립대학인 국학 자리에 세워진 경주 향교, 그리고 약 2천여 평의 넓은 대지를 차지한 교촌 최부자댁 등 고대로부터 근현대에 걸치는 여러 역사유적이 몰려 있다. 볼 것 많은 경주 안에서도 많은 탐방객들이 즐겨 찾는 답사의 명소가 되고 있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그 중에서 오늘날 가장 유명세를 타고 있는 곳은 아마도 9대 만석지기, 9대 진사의 전통을 자랑하는 경주 최부자댁 문파재(汶坡齋: 최부자댁의 당호)인 것 같다. 가옥의 규모나 크기가 당당할 뿐 아니라, 그 댁에 전해오는 “사방 백리 안에 밥 굶는 사람을 없게 하라.”는 등의 가훈과 역대 당주들의 살아 온 행적이 이른바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전형적인 모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우리에게 큰 울림과 교훈을 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처음 이 자리에 최부자댁이 입향할 당시 경주향교와 얽힌 에피소드 하나가 향교의 위상이나 사회적 인식을 보여주고 있어서 먼저 소개해 둔다. 교촌 최부자댁의 선대는 원래 경주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내남면 이조리에서 세거해 왔다. 파조(派祖)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 이후 그 후손들이 대대로 이조리에 살면서 가산을 일구고 부를 축적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8세기 후반(1779년경)에 6대손 최언경이 아들 용암 최기영과 함께 내남에서 교촌으로 이거하면서 경주 교촌 최부자댁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최부자댁의 교촌 입향과 경주향교에 얽힌 이야기

최언경이 교촌으로 옮기기 위해 이사를 계획하고 대지를 조성하고 가옥을 신축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사단이 일어났다. 먼저 경주 향내 유림들이 학궁인 향교 곁에 사가를 짓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력히 반대하고 나섰다. 이 논란은 쉽게 해결되지 않다가 마침 경주를 암행 순찰하던 암행어사에게까지 알려져, 어사가 “맹모삼천지교(맹자의 어머니가 아들 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한 끝에 마지막에는 결국 학교 근처에 살면서 맹자를 성인으로 키웠다는 고사)”를 사례로 들어 유림들을 설득하여 해결을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건축공사를 시작하면서 또 다른 문제가 불거졌다. 자칫 일개 민가에 불과한 최부자댁 가옥의 높이가 향교 대성전보다 높다면, 그것은 그 곳에 모셔진 선성(先聖)・선사(先師)에 대한 불경이라는 지적이 나왔던 것이다. 이에 최부자댁에서는 이조리의 고택을 헐어 가져온 재목 가운데서 안채와 대문의 기둥을 1자(尺)쯤 잘라내어 새집 건물의 높이를 향교보다 낮추어 건축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최기영의 아랫대인 최세린이 1831년에 향교 동쪽에 새로 큰집을 짓게 되었는데, 그 때에도 인접한 향교의 지붕과 용마루보다 높이가 높아지지 않도록, 가옥이 들어설 대지를 미리 3~5자(90~150cm) 정도 낮추어 삭평(削平)한 다음 새집을 지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최부자댁의 교촌 입향과 정착 과정에서 전해지는 경주향교 관련 에피소드는 일차적으로 최부자댁 역대 당주들의 자신을 과시하지 않는 겸손한 삶의 방식에 대한 미담의 하나로 전승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금만 달리 생각해 보면, 이 이야기 속에는 18세기 말~19세기 초에도 경주 향중(鄕中)에서는 경주향교의 권위와 위상이 여전히 살아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전국적 차원에서 보면 이 무렵은 사립 교육기관인 서원이 크게 번성하여 향촌사회의 정치사회적 주도권은 이미 향교로부터 서원으로 넘어갔던 시기였다. 하지만 경주향교는 그 나름대로 경주 향촌사회에서 권위를 유지하고 있었던 셈이다.

조선말에 이르기까지 경주향교가 비교적 높은 위상을 가졌음을 보여주는 사례로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지면 관계상 한 사례만 살펴본다. 1907년 1월에 대구에서 발의된 “금연을 통해 일제에게 진 나랏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은 3월에 이르면 경주지역에도 활발헤게 전개되기에 이른다. 근래 “국채보상운동 관련 기록물”이 최부자댁 서고에서 발견되어 경주 국채보상운동의 전모와 전개상황이 드러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경주의 국채보상운동은 ‘경주향교단연회사’라는 명칭의 단체가 중심이 되어 추진했으며, 그 본부가 경주향교에 두어져 있었다. 발견 기록물 중의 하나인 ‘경상북도 경주 국채보상의연금 성책(成冊)’에 의하면, 경주 주민 5천여 명 이상이 납부에 동참하여 3천300여 원의 의연금이 수납되었음이 확인된다. 말하자면 경주향교는 한말까지 여전히 경주 사람들의 정신적 구심점이자 정치사회적으로도 중심 거점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건축물 기단부에 사용된 석재, 대부분 신라시대 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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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鄕校)는 말 그대로 지방에 두어진 학교이다. 국가가 설립과 운영을 주도했던 지방 국립학교였다.

향교의 원류는 고려시대에 여러 지방에 건립했던 향학(鄕學)에서 찾을 수 있지만, 향교가 지방 국립학교로서 명실상부하게 기능했던 것은 역시 조선왕조 시대로 보아야 한다. 조선은 이념적 측면에서 숭유배불을 내세운 유교 국가였다. 그래서 건국 직후부터 유교 이념을 널리 보급하고 국가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유교를 적극 권장하였고, 그 정책의 일환으로 향교가 널리 건립되었다. 모든 고을에 1개의 학교를 세운다는 ‘1읍 1교’의 원칙에 따라 전국 군현에 점차적으로 향교를 설치하였으며, 심지어 지방 수령으로 재임 중 “백성을 다스림에 반드시 힘써야 할 일곱 가지 일(守令七事)” 중의 하나로 ‘학교를 일으킴(興學校)’이라는 규정을 둘 정도였다.

전국 군현에 설립된 향교를 통해 지방의 인재들에게 유학을 가르쳐 그들을 관료로 선발하고자 했으며, 향교마다 유학의 여러 성현 곧 선성(先聖)・선사(先師)・선현(先賢)들의 위패를 모셔 제사를 지내는 공간을 따로 두어 백성들을 유교적으로 교화하려고 했다.

이렇듯 향교는 지방의 인재들을 교육하는 교육기관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유교적 성현을 모시는 제사장소라는 복합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래서 향교의 건축물과 공간 구성도 두 가지의 목적에 맞게 나누어져 구성되었다. 먼저 유교의 성현들의 위패를 모셔두고 제사를 지내는 대성전과 동무(東廡)・서무(西廡)가 하나의 공간과 건축물을 구성하고, 다음 교육을 위한 강당인 명륜당과 향교 학생들의 숙소인 동재(東齋)・서재(西齋)가 또 하나의 별도의 공간을 이루고 있다. 다만 향교가 입지한 지형 조건에 맞추어 제사공간과 교육공간의 배치 순서를 조금씩 달리 하였다. 그래서 보통 제사공간(대성전)이 앞에 있으면 ‘전묘후학형(前廟後學形)’ 향교, 반대로 강학공간(명륜당)이 앞에 있으면 ‘전학후묘형(前學後廟形)’ 향교로 나눈다.

경주향교 또한 전묘후학형의 향교로서, 그 공간구성이나 건물 배치에서 다른 향교와 특별히 다른 점은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눈여겨 볼 것은 향교의 크기와 규모이다. 경북은 물론 전국에 걸쳐서도 경주향교 정도의 규모와 크기를 가진 향교는 매우 드물다. 그것은 조선시대 경주가 대읍(大邑)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향교 자리가 원래 신라의 국립대학인 국학(國學)이 있었던 곳도 다른 이유가 된다. 그 국학의 잔영이 고려시대 동경(경주)의 향학으로 이어져 조선시대 경주향교로 계승・정착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정남향하고 있는 정문인 외삼문을 거쳐 신삼문(神三門)을 들어서면, 정면에 대성전이 자리잡고 있고, 좌우에 동무와 서무가 마주보고 있다. 바로 유교 성현의 위패를 모셔두고 향사를 지내는 제향공간이다. 동무와 서무의 바깥을 돌아 들어가면 강학공간인 명륜당과 동・서재가 자리잡고 있다. 아마 일반 군현 향교 건축물과 비교해 본다면, 그 크기와 규모가 장대함에 놀랄 것이다.

한 가지 눈여겨 볼 것은 경주향교 건축물의 기단부에 사용된 석재 대부분이 신라시대의 그것들을 재활용하고 있는 사실이다. 탑, 사찰 부재 등이 향교 건축에 재사용되어 천년을 이어오고 있으니 여러 가지 감회가 교차한다. 현존 건축들의 연혁은 다양하지만 전체적으로 17세기 조선 후기 양식이 주류를 차지한다. 현재 경주향교는 대성전이 보물 1727호, 명륜당이 보물 2097호, 동・서무와 신삼문이 보물 2098호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장대한 목조건물인 향교는 그 유지・보수와 운영에 상당한 재정이 필요하며, 그것은 곧 국민의 혈세이기도 하다. 막대한 비용이 투입되는 이 귀한 건물과 공간을 그대로 버려두는 것은 중요한 그 무엇을 그냥 버리는 듯한 아까운 마음이 든다. 지금도 관계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 고뇌하며 방안을 모색하지만, 아직은 부족한 부분이 많다. 우리 모두가 향교의 전통을 올바르게 계승하면서, 현대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찾기 위해 지혜를 모을 때이다. 금방 철안(鐵案)이 나올 리야 없겠지만, 우리가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이다.

이문기

경북대학교 역사교육과 명예교수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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