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이 없는 숲엔 독한 비밀이 있지//슬픔이 없는 숲엔 독한 슬픔이 있고//우리가 화창한 날에 죽은 나무도 있어

「적절한 웃음이 떠오르지 않았다」 (2021, 시인동네)

조성국 시인은 서울 출생으로 201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으로 등단했다. 최근에 첫 시조집 ‘적절한 웃음이 떠오르지 않았다’를 상재했다.

우리는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살고 있다. 특히 글 쓰는 이에게는 이 사실이 중요하다. 보고 듣고 느끼는 것으로부터 글감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제 조건이 있다. 누구나 아는 낯익은 발상인가 하는 문제다. 새로운 발화, 새로운 착상이 없다면 독자는 금세 싫증을 느끼게 된다. 또 유사한 읊조림이구나 하고 눈길을 거둬 간다. 조성국 시인은 첫 시조집 ‘적절한 웃음이 떠오르지 않았다’에서 독창적인 형상화 과정을 거친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이 시인이 이러한 생각과 사상과 시풍을 지닌 줄을 미처 몰랐구나, 하는 느낌을 전편을 통해서 강하게 받는다. 시조에 관한 글을 쓰는 자리에서라면 누누이 개진하는 지론인 새로운 목소리의 발현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그가 얼마나 한 편의 작품을 위해 몸을 던지고 있는가를 여실히 느낄 수 있다. 그의 남다른 개성은 연조와 상관없이 큰 기대를 걸어도 좋을 터다.

‘숲’을 보자. 남들이 듣든 말든 능청스럽게 독백 중인 것을 눈여겨볼 일이다. 비밀이 없는 숲엔 독한 비밀이 있단다. 슬픔이 없는 숲엔 독한 슬픔이 있단다. 그러다가 종장은 예상 밖의 반전을 보인다. 우리가 화창한 날에 죽은 나무도 있어, 라고 태연자약하게 끝맺는다. 사실 숲은 생태학적 상상력의 보고가 아닌가? 생명이 약동하는 초록의 세계다. 그 세계에 독한 비밀이 있고, 독한 슬픔이 있으며, 우리로 지칭된 무리가 화창한 날에 죽은 나무도 있다는 진술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 점은 물론 독자의 몫이다. 독자가 운신할 수 있는 상상의 공간이 그만큼 확보돼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오래 전 일찍이 김정휴 시인이 보여준 바 있는 단시조 ‘장경각’의 이미지가 불현듯 떠오른다. 조성국 시인의 정신적 수맥은 이렇듯 도저한 데가 있다. 다른 단시조 몇 편을 더 보겠다. 싹이 노랗다거나 무청이 짧다거나 색감 있는 샐러드에 끼어들지 못하거나, 독하게 속 썩은 죄로 조각난 무는 있다, 라면서 ‘깍두기’를 노래하고 있다. 진실로 실감실정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서 한 사람의 초상이 그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압축됐던 천 년이 일시에 개봉 되자 햇빛이 기다리다 눈부시게 파고들었다, 라고 하다가 어딨지, 하면서 금동신 벗어놓고 달아난 신라 여자를 ‘낮달’을 통해 읽어낸 점도 예사롭지가 않다. 그의 상상력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서 작동하고 있다. ‘달팽이’라는 단시조는 모래알만 한 입과 위장 컨테이너에 싣고 세상 저 바깥으로 포복해나가는 동안 그이가 먹은 풀잎과 이슬 총량은 2.8g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이 역시 생태학적·생명시학적 태도와 발상에서 기인된 구체적인 생생한 비유가 낳은 시편이다. 많은 시인들이 달팽이를 시화했지만, 여기 이 ‘달팽이’는 조성국표 달팽이다.

보기 드물게 그는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은 일체를 이뤄야 한다는 ‘녹색평론’ 발행인이었던 김종철의 지론을 시조로 잘 보여주고 있다. 그의 이번 시조집 제목 ‘적절한 웃음이 떠오르지 않았다’는 참신하다. 사실 시조집 제목만 봐도 그 작품 세계를 웬만큼은 진단할 수 있다.

앞으로 시조문단을 융성케 하는데 일익이 되리라 믿는다.

이정환(시조 시인)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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