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일반

삼국유사 기행<109>계집종 욱면이 극락가다

영주 영전사에 신라시대 석불입상과 목조삼존불 등의 흔적 남아



영주시 동부동의 영전사 대웅전. 1층은 어린이집으로 운영되고 2층 대웅전에는 신라시대 불상으로 전해지는 석조여래입상과 목조삼존불을 모시고 있다.


삼국유사 계집종 욱면 편에 소개된 강주지역은 지금의 진주 또는 영주로 나눠 해석되고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과 유사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 영주 욱금동 영전마을 등으로 보아 영주지역이 삼국유사에서 소개한 강주지역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욱면은 본래 영주 부석사의 불경을 싣고 가는 소였지만 이후 인근지역 관리의 계집종 욱면으로 환생했다. 욱면이 가까운 절 미타사에서 주인을 따라 늘 불공을 드렸는데 어느 날 불공을 드리다가 지붕을 뚫고 날아올라 승천했다.

그의 흔적은 모두 사라지고 미타사로 불렸던 절이 영전사로 바꿔 불린다는 주장이 있다. 그 영전사터에서 신라시대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석불입상과 석탑조각 등의 유적이 발견됐다.

지금은 풍기 욱금마을 영전사터에서 다시 현재 영주시 동부동으로 옮겨 절을 짓고 석불입상과 목조삼존불을 안치하고 있다. 지금의 영전사 마당에는 머리가 없는 훼손된 석불좌상과 기초석, 석탑옥개석, 탑신석 등의 용도조차 잘 모르는 석재들이 많이 흩어져 있다. 모두 전의 절터에서 옮겨온 역사의 흔적이다.

경북도유형문화재 제324호 영주 영전사 석조여래입상. 추동 영전사터에서 옮겨왔다. 하나의 돌로 조각했던 광배는 사라지고 얼굴과 팔 등이 많이 훼손된 상태다.


◆삼국유사: 계집종 욱면이 염불하여 극락가다

경덕왕 대에 강주의 남자 신도 수십 명이 극락으로 가고 싶은 뜻을 가지고 강주지역에 미타사라는 절을 세우고 1만 일을 기약해 계를 만들었다. 이때 벼슬이 아간인 귀진의 집에 이름이 욱면이라는 한 계집종이 있었다.

욱면은 그의 주인을 모시고 절에 가 마당에 서서 스님을 따라 염불을 했다. 주인이 그녀의 직분에 맞지 않는 행동을 미워해 늘 곡식 두 섬을 하룻밤 동안에 다 찧으라고 했다. 계집종은 초저녁에 다 찧어버리고 절에 가서 염불을 했다.

밤낮으로 조금도 게으르지 않아 마당의 좌우에 긴 말뚝을 세우고 두 손바닥을 뚫어 노끈으로 꿰어 말뚝 위에 매어 합장을 하고 양쪽에서 이를 흔들어 자신을 격려했다.

이때 하늘에서 공중으로 외치기를 “욱면랑은 법당으로 들어가 염불하라”고 했다. 절의 승려들이 듣고 계집종 욱면을 권해서 법당으로 들어가게 해 예에 따라 정진토록 했다.

영주 추동의 영전사 터에서 석불입상과 함께 1949년 현재 동부동으로 옮겨온 것으로 전해지는 목조삼존불이 대웅전에 모셔져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의 음악 소리가 서쪽으로부터 들려오면서 계집종의 몸이 솟구처 올라 집 대들보를 뚫고 나가 서쪽 교외로 가더니 본래의 몸을 버리고 부처의 몸으로 변해 연화대에 앉아 큰 빛을 발하면서 천천히 가버렸는데 음악 소리는 하늘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 법당에는 지금도 구멍 뚫린 자리가 있다고 한다.(이상은 향전에 있다.)

관음보살의 현신인 동량팔진이 1천 명의 무리를 모아 그들을 두 패로 나누어 한패는 힘쓰는 일을 하게 하고 한패는 정성껏 도를 닦게 했다.

힘써 일하던 패의 우두머리가 계를 얻지 못하고 축생도에 떨어져 부석사의 소가 됐다. 그 소가 일찍이 불경을 싣고 가다가 불경의 힘으로 아간 귀진의 계집종으로 태어났는데 이름을 욱면이라고 불렀다.

욱면이 일이 있어 하가산에 갔다가 꿈에 감응을 받고 드디어 불도를 닦을 마음이 생겼다. 아간의 집은 혜숙법사가 세운 미타사에서 그리 멀지 않으므로 아간이 언제나 그 절에 가서 염불을 하니 계집종도 따라가 마당에서 염불을 했다고 했다.

이러하기 9년 되는 을미(755) 정월 21일에 예불을 올리다가 집의 대들보를 뚫고 나갔다. 소백산에 이르러 신발 한 짝을 떨어뜨리니 바로 그 자리에 보리사를 세우고 산 밑에 이르러서는 그의 육신을 버렸으므로 그곳에는 제2보리사를 짓고 그 전각에 표시하기를 ‘욱면 등천지전’이라 했다.

과거 영전사터에서 옮겨온 석재들로 마당에 세운 삼층석탑. 석탑은 팔각의 부도 하대석에 탑신석을 올리고, 석탑의 옥개석을 3층으로 포개어 두고 석등 또는 부도의 옥개석으로 보이는 부재를 지붕으로 얹었다.


지붕의 용마루에 뚫린 구멍이 10위 가량 되었는데도 폭우나 세찬 눈이 내려도 젖지를 않았다.

그뒤에 일 벌이기를 좋아하는 자가 금탑 한 개를 본떠 만들어 구멍에 맞춰 소란반자 위에 모시고 그 이적을 기록했으니 지금까지도 방과 탑이 그대로 남아 있다.

욱면이 떠난 후 귀진도 또한 그의 집이 신이한 사람이 의탁했던 곳이라 해 집을 희사하고 절을 만들고 그 절 이름을 법왕사라 불렀으며 전답과 일할 사람을 바쳤다. 오랜 뒤에 절은 허물어지고 빈 터만 남았다.

대사 회경이 승선 유석 및 소경 이원장과 함께 발원해 절을 중창하는데 회경이 몸소 토목 일을 했다.

처음 재목을 나르던 날 꿈에 노인이 삼으로 만든 신과 칡으로 만든 신발을 각각 한 켤레씩 주고는 옛 신사로 데리고 가서 불법의 이치를 깨우쳐주었다.

사당 옆의 재목을 베어다가 거의 5년 만에 공사를 마치고 노비를 더 두니 이 절은 매우 번창하여 동남 지역의 이름 있는 사찰이 됐다.

사람들은 회경을 귀진의 후신이라 했다.

영전사 마당의 석불좌상은 2009년 영전사지에서 옮겨왔다. 머리 부분은 사라지고, 어깨와 팔 등이 많이 훼손됐다. 우견편단의 법의와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보이고 있다.


논평해서 말한다. 고을 안에 있는 고전을 살펴보면 욱면의 일은 바로 경덕왕 대의 사건인데 징(진)의 본전에 의하면 원화 3년 무자(808)로서 애장왕 때의 일이라고 했다. 경덕왕 이후 왕의 계통은 혜공, 선덕, 원성, 소성, 애장 등이니 5대까지를 합하면 60여 년이나 된다. 귀진이 먼저이고 욱면이 뒤가 되어 향전과는 틀리다. 그러므로 여기에 두 가지를 다 실어 의심을 없앤다.

아래와 같이 찬미한다.

‘서편 이웃 옛 절에는 불등이 밝은데/ 방아 찧고 절로 가면 밤 깊어 이경이네/ 한마디 염불마다 성불을 스스로 기약하매/ 손바닥 뚫어 노끈 꿰니 그 몸 바로 잊음이네.’

대웅전 옆 뜰에 놓인 팔각대좌. 대좌의 여덟면마다 비천상 등의 섬세한 조각이 많이 마멸됐지만 뛰어난 수법으로 예술성이 뛰어나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계집종 욱면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창건한 영주 부석사에 염불을 따라 외는 소가 있었다. 스님이 염불하며 공양을 드리는 시간에는 같이 무릎을 꿇고 절을 하기도 하여 모두가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이 소가 어느 날 부석사 뒤편의 바위를 뚫고 들어가버렸다. 그 바위에 소가 들어간만큼 크기의 글씨로 욱면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이와 같은 날에 이웃마을 관리 귀진의 계집종이 딸을 낳았는데 꿈에 욱면이라 이름을 지으라고 했다.

욱면은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어머니를 따라 부지런히 일을 배우는 착한 아이로 자랐다. 부엌일이든 밭일이든 어릴 때부터 어른보다 재바르게 일을 잘해 칭찬을 많이 들으며 집안 종들의 본보기가 됐다.

영전사 대웅전 벽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에 따라 의상대사가 용의 호위를 받으며 배를 타고 중국에서 신라로 돌아오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 있다.


욱면은 일도 암팡지게 잘했지만 행동거지도 바르고, 예의범절에도 밝을 뿐 아니라 똑똑해 일처리가 분명해 모두가 좋아했다.

소문이 마을에 퍼지면서 드디어 관리의 눈에도 들었다.

욱면이 자라면서 스스로 글을 깨우치고, 사리판단이 정확해 관리가 소소한 외부 일들을 맡기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미타사에 불공드리는 일에도 데리고 다니며 잔심부름까지 시켰다.

나리가 불공을 드리는 동안 욱면은 밖에서 염불을 따라 외거나 탑을 돌면서 기도를 부지런히 올렸다. 욱면은 스님이 외는 불경을 따라 외우는데 스님이 틀리거나 머뭇거리는 부분까지 앞서가며 줄줄 바르게 외웠다.

당시 신분의 구분이 엄격하던 터라 계집종 욱면이 워낙 영민하게 굴자 귀진은 한편으로 어여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시기하기도 했다.

또 미타사의 스님도 욱면이 혼자 귀진의 심부름을 올때는 귀하게 대했다.

그러다 귀진이 불공을 드리러 함께 와서 욱면이 밖에서 염불을 따라 외는 소리가 스님의 귀에까지 생생하게 들려올때면 놀라면서도 미워하는 마음이 일어 멀리했다.

욱면이 나리를 따라 미타사로 출입한 지 10년이 되던 해에 절에서 유명 스님을 초청해 대규모 법회를 열었다. 사람들이 법당을 가득 메우고 마당까지 왁자하게 기도를 드리는 행사가 크게 열렸다.

영주 풍기면 욱금동 영전마을에서 1923년 석조여래입상과 불적이 발견돼 중창했지만 1949년에 영주 동부동으로 옮겨와 영전사를 다시 지었다. 당시 옮겨온 석재들이 절 마당 곳곳에 쌓여 있다.


마침 눈발이 세차게 날려 마당에서 기도를 드리는 신도들이 힘겨워 했다. 그러나 욱면은 얇은 적삼 하나를 입고도 꼼짝하지 않고 제자리에서 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욱면이 서 있는 곳 사방에는 눈이 내리지 않고 오히려 뜨거운 기운이 기도하는 계집종의 몸을 감싸고 돌았다.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겨 스님에게 일렀더니 스님이 욱면을 법당으로 들어와 불공을 드리게 했다. 사양하던 욱면이 법당으로 들어가 기도를 올리던 중 욱면 주변이 환하게 밝아지면서 그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라 지붕을 뚫고 날아올라 부처의 몸으로 변신해 동쪽으로 날아가버렸다.

이에 귀진은 자신의 집을 절로 고쳐짓고, 전 재산을 희사해 불법공부에 매달렸다. 이후 욱면이 승천한 영전사로 부처님의 모습을 만나려는 발걸음이 줄을 이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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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시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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