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107>명랑법사의 신인종

발행일 2021-03-29 08:54:5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명랑법사 문두루비법으로 당나라 50만 대군 물리쳐



명랑법사의 후계자들과 김유신 장군, 술종 등의 신라 대신들이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외동에 건설한 호국사찰 원원사지에 남은 동서 삼층석탑 중의 서탑. 보물 제1429호로 지정돼 있다.


명랑법사는 귀족의 아들이었다.

어머니가 남간부인으로 자장율사의 누이동생이자 소판 무림의 딸이었다.

아버지는 사간인 재량의 아들로 삼형제 중 막내였다.

형들도 국교대덕, 의안대덕 등으로 불린 고승들이었다.

명랑은 아무래도 외삼촌인 자장율사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하다.

명랑이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 불도를 깊이 배웠다.

명랑법사는 혜통과 같이 경주 남간마을이 고향이다.

중국 유학에서 돌아오는 길에 용궁으로 들어가 용왕에게 불법을 전수하고, 용왕의 시주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와 금광사를 지었다.

못이 된 절터에서 석조입상 부처를 비롯한 유적들이 발굴됐지만 지금은 논밭이 되어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명랑은 주문으로 힘을 얻는 밀교 쪽에 깊숙이 파고들어 신라에 신인종을 뿌리내리게 했다.

사천왕사를 지어 저 유명한 문두루비법을 시전해 당나라 50만 명의 대군을 바다에 수장시켜 나라를 지킨 호국승으로 삼국유사와 역사서들은 기록하고 있다.

명랑법사의 제자들이 신인종을 크게 일으켜 김유신 장군 등과 신라의 동남부지역에 호국사찰 원원사를 건립해 호국불교의 이념을 굳건하게 했다.

호국사찰 원원사지에 남아있는 동서 삼층석탑 사이에 석등이 우뚝 서있다.


◆삼국유사: 명랑법사의 신인종

금광사본기의 기록을 살펴보면 이러하다.

신라에서 걸출하게 태어난 명랑법사는 당나라로 건너가 불도를 배웠다.

돌아오는 길에 바다 용의 요청으로 용궁에 들어가 비법을 전하고 황금 천 냥을 시주받아 땅 밑으로 잠행하여 자기 집 우물 밑에서 솟아 나왔다.

곧 자기 집을 희사해 절을 만들고 용왕이 시주한 황금으로 탑과 불상을 꾸미니 번쩍이는 광채가 빼어나게 특이해서 절 이름을 금광사라고 했다.

법사의 이름은 명랑이고 자는 국육이며 신라에서 벼슬이 사간인 재량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남간부인으로 혹은 법승랑이라고도 불렸는데, 벼슬이 소판인 무림의 딸 김씨이니 바로 자장의 누이동생이다.

아들 셋이 있으니 맏아들은 국교대덕이고 그 다음이 의안대덕이며 명랑법사가 막내아들이다.

처음에 그의 어머니가 푸른색 구슬을 삼키는 꿈을 꾸고 아이를 갖게 됐다.

선덕왕 원년(632)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정관 9년 을미(635)에 돌아왔다. 총장 원년 무진(668)에 당나라 장수 이적이 대군을 거느리고 신라군과 합세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원원사지 삼층석탑의 기단석에는 12지신상이 돌아가면서 두텁게 새겨져 있고, 위층의 몸돌에는 사천왕상이 동서남북으로 새겨져 있다. 조각수법이 섬세하고 수려해 예술성이 뛰어나다.


그 후에 남은 군사가 백제에 머물면서 장차 신라를 습격하여 멸망시키려 하는 것을 신라 사람들이 알고 군사를 내어 이를 막았다. 당나라의 고종이 이를 듣고 크게 화가 나서 설방에게 명하여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치려고 했다.

문무왕이 이것을 듣고 두려워하여 명랑법사를 청해 비법을 써서 이를 물리치게 했다. 이로 인해서 그는 신인종의 시조가 됐다.

고려 태조가 나라를 세울 즈음에 또한 해적이 나타나 소란을 피우므로 즉시 안해와 낭융의 후예인 광학과 대연 두 큰스님을 청해 비법으로 빌어서 진압하니 모두 명랑법사의 계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이 때문에 명랑법사와 아울러 위로 용수에 이르기까지를 9조로 삼았다. 또 태조가 이들을 위해 현성사를 창건해 한 종파의 토대로 삼았다.

명랑법사가 유가명승들과 함께 당나라 50만 대군을 수장시키는 문두루비법을 시전했다고 전해지는 사천왕사지의 목탑 기단에 새겨져 있던 녹유신장. 국립경주박물관에 복원 전시되고 있다.


또 신라 서울 동남쪽 20여 리 되는 곳에 원원사가 있었는데 세간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안해 등 네 분의 큰 스님이 김유신, 김의원, 김술종 등과 함께 발원해 세운 것이다.

네 분의 큰 스님 유골도 모두 이 절 동쪽 봉우리에 묻혔다. 그래서 사령산 조사암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큰 스님들은 모두 모두 신라 때의 고승이었다 하겠다.

돌백사 문서의 주석에 실려 있는 것을 살펴보면 이러하다.

경주 호장 거천의 어머니는 아지녀이고 아지녀의 어머니는 명주녀이며, 명주녀의 어머니는 적리녀이다.

적리녀의 아들로 광학대덕과 대연삼중이 있었는데 두 형제가 신인종에 귀의했다.

장흥 2년 신묘(931)에 태조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 임금의 행차를 따라다니며 분향 수도했다.

그 노고를 포상하기 위해 두 사람의 부모를 제사지내는 밑천으로 전답 몇 결을 돌백사에 주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광학, 대연 두사람은 거룩한 태조를 따라 서울로 들어온 사람이다.

안해법사 등은 바로 김유신 등과 함께 원원사를 세운 사람이다.

광학 등 두 사람의 뼈는 여기에 가져다 안치했을 뿐이지 네 분의 큰 스님이 모두 원원사를 세웠다거나 모두 거룩한 태조를 따라간 것이 아니다. 자세히 살펴야 할 것이다.

명랑법사가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용궁을 거쳐 땅속으로 잠행해 남간마을 우물로 솟아올라 금광사를 건설했다고 전해진다. 남간사지 서쪽의 금광사가 있었던 자리.


◆새로 쓰는 삼국유사: 명랑법사의 불력

명랑은 자장율사의 누이동생이 낳은 삼형제 중 막내다.

명랑은 어려서부터 외삼촌인 자장율사의 뒤를 따라다니며 불법에 대한 공부에 관심을 가졌다.

형들이 모두 불법에 귀의해 큰 스님으로 성장하자 명랑 또한 자연스럽게 불교에 깊이 빠져들었다.

명랑은 어려서부터 머리가 남다르게 총명해 한 번 읽은 책은 모두 외워 주변을 놀라게 했다. 불교 경전도 몇 번만 읽으면 그대로 술술 외우며 뜻을 깨우쳐 일찍 공부한 형들에게 뜻풀이까지 해줄 정도였다.

명랑은 경전을 읽으며 염불을 외거나 혼자 수도정진하는 불교에서 벗어나 무언가 힘을 발휘하는 특별한 의미를 찾으려 애썼다.

그러던 중 중국의 무외삼장이 뛰어난 신통력을 발휘한다는 말을 듣고 곧장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

명랑은 무외삼장을 찾아 다짜고짜 불법을 공부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달라고 매달렸다. 무외삼장은 명랑의 뛰어난 자질을 한눈에 알아보고 수제자로 키우려는 욕심이 발동해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과 불법에 대한 공부를 전수했다.

경주 탑동 남간마을 금광사지로 전해지는 금광못에서 출토된 석조입불상이 국립경주박물관 신라미술관에 전시되고 있다.


명랑은 무외삼장으로부터 3년 만에 모든 공부를 전수받았다.

명랑이 일반 승려들이 30년을 공부해도 깨우치기 어려운 내용들을 놀라울 정도로 빠른 시간에 습득하자 같이 공부하던 사형제들이 부러워하기도 하며 시기하기도 했다.

명랑이 무외삼장으로부터 대부분의 공부를 전수받을 무렵 그의 나라 신라가 외세의 침략으로 많은 어려움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돌아가려 하자 스승은 불교의 교리를 잘못 전파할까 우려해 은근히 말렸다.

그렇지만 명랑의 주장이 워낙 완고해 무외삼장은 제자의 뜻을 굽히기 어렵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사사로이 불법의 힘을 남용해서는 안된다”며 주의를 주고, 많은 백성에게 불법을 전할 것을 당부하며 작별 인사를 나눴다.

최근까지 마을주민의 식수로 활용됐던 신라시대 석정이 남간마을에 남아 있다. 그 석정의 구조물로 보이는 반쪽이 인근 주택의 뜰에 방치되고 있다.


명랑은 서둘러 귀국하려는 마음에 승객들이 잠든 밤이면 배를 빠르게 나아가도록 바람을 일으켰다. 이 때문에 용왕이 명랑의 뛰어난 술법을 알아차리고 사자를 보내 용궁으로 초대했다. 명랑은 용궁으로 들어가 용왕에게 불법을 속성으로 전하고, 왕이 주는 황금을 받아 땅속으로 잠행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명랑은 나라를 구하고, 백성들의 평안한 삶을 위해 경주 남산기슭에 있던 자신의 고향집을 헐어 서둘러 절을 지었다. 명랑이 지은 절은 불상과 함께 모두가 금빛으로 빛나 사람들이 금광사라 불렀다.

명랑은 밖으로 다니기보다는 법당에서 하루 종일 눈을 감고 앉아 입을 달싹이며 염불을 외웠다.

신기하게도 명랑이 절을 지은 이후로 신라를 공격하던 왜구들의 발길이 뚝 끊어졌다.

또 마을에 도둑이 들지 않았다.

모두 명랑의 신비스런 술법 때문이라며 찾는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선덕여왕 10년 641년에 왜구들이 30여척의 선단을 조직해 신라 하서땅을 공략해왔다. 이때 명랑이 단신으로 나아가 언덕 위에서 가만히 앉아 주문을 외자 왜구들의 배가 모두 뒤집어져 바다에 수장됐다.

그중 두 척의 배를 조용히 항구로 이끌어 10명의 왜구에게 음식을 나눠주고 다시는 노략질을 하지 못하게 경고해 돌려보냈다.

남간마을 곳곳에는 신라시대 절에 사용되었던 탑재와 건축물 부재 등의 석물들이 흔하게 드러나 보인다. 조선시대 건축된 것으로 전해지는 남간마을의 한옥에 신라시대 석물들이 기둥의 기초석, 부뚜막, 텃밭의 경계석 등으로 쓰이고 있다.


살아남은 왜구들이 돌아가 명랑의 술법을 부풀려 전하며 신라에 노략질하다가는 살아 돌아오기 어렵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 이후 50여 년간 왜구들의 노략질은 뚝 끊어지고 신라 해안부락 백성들의 왜구들의 침략에 대한 걱정은 사라졌다.

명랑은 또 질병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을 기도로 병을 고쳐주면서 불교에 귀의하게 했다.

명랑의 신통력이 전국으로 전해지자 이를 배우려는 유가명승들과 환자들이 곳곳에서 몰려들어 금광사의 세력이 날로 커졌다.

명랑의 이름은 삽시간에 궁중에까지 전해졌다. 문무왕 8년 668년에 당나라의 50만 명 대군이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 출병했다는 소식을 듣고 왕이 명랑을 불러 이에 대비하게 했다.

명랑은 유가명승들과 함께 밀교의 진언을 외워 풍랑을 일으켜 당나라 수군들을 바다에 수장시켰다.

이후 명랑의 밀교를 전수받으려는 도승들이 몰려들어 신라에 그의 신인종이 크게 일어나 도처에 절을 세우고 불법을 전하기 시작했다. 또 그의 제자들이 김유신 장군 등과 호국사찰 원원사를 세워 바다를 통해 신라로 진입하려는 적군들을 막았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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