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명희 의사수필가협회 홍보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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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희

의사수필가협회 홍보이사

봄비가 촉촉이 내린다, 활짝 핀 벚꽃이 분홍의 꽃비가 돼 땅으로 흩어진다. 아쉬운 마음에 창밖을 보고 있으려니 그 나무 아래 낯익은 얼굴의 남자들이 우산까지 받쳐 들고 빗속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떨어지는 꽃이 안타까워 빗속의 촬영이라도 해서 이 봄을 기억해두려는 모양이다. 그 열띤 남성들의 감성에 혼자 웃음 짓다가 내 방으로 시선을 돌리니 여린 꽃잎의 하늘거리는 델피니움이 손짓한다. “나도 여기에 당신의 꽃으로 있어요!”라고.

봄 기온이 무척이나 올라가던 날 오후, 꽃꽂이 자원봉사를 다니는 이에게서 델피니움 한 송이를 받았다. 소녀 감성을 물씬 불러일으키는 푸른빛의 꽃, 종잇장처럼 여린 꽃잎을 책갈피에 끼워두며 생각을 집중해본다. 바로 그 꽃, 언제였던가. 친구가 보낸 편지의 아래쪽에 붙어있던 빛바랜 꽃, 그것이 너무나 신기해 찾아본 꽃 이름이 델피니움이었다. 하늘하늘한 꽃잎은 또 얼마나 매력 있었던지, 자그마한 글자로 적혀있던 꽃말까지 너무나 멋있었다.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게요.” 누군가의 가슴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한 봄이 이미 한창 무르익어 있다. 우선 이번 봄은 눈으로 즐기기만 하면 좋으리라.

작년 이맘때 격리병동에서 방호복을 입다가 문득 내려다본 병원 정원엔 분홍의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그 꽃들이 연출하는 멋진 장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마음속으로 빌었다. 다음에는 마스크 없이 저 꽃 아래서 마음껏 이야기하면서 커피 마시고 떠들어댈 수 있기를. 해가 바뀌고 다시 봄이 됐고 꽃들은 여느 때보다 더 일찍 찾아왔다. 봄은 봄이건만, 아직도 병실에는 격리된 채 하루하루 불안한 나날을 보내는 환자들이 들어차 입원한 상태이다. 게다가 지역에서 발생한 환자들의 접촉자들이 혹시 모를 감염의 근원이 될까 봐 잠복기 동안 입원해 있다 보니 일반 환자 입원은 하지 못한 채 코로나 전담 병원의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그러니 계절은 봄이로되 마음은 여유가 없다. 이렇게 봄바람을 느끼면서 계절을 즐기다 보면 몸이 아파 격리된 이들에게 괜스레 미안한 생각이 들곤 한다.

그래도 일 년 남짓이라는 시간 동안, 코로나19와 처절하게 싸우며 보내다 보니 이 무서운 감염병에 대한 두려움의 강도는 조금 덜해진 것 같다. 방역도 철저히 하면서 병원에서 병을 대처하는 체계도 잡아가고 마음으로도 단단히 준비하게 되니 그만큼 사람들 사이에서도 병을 이겨내고자 하는 단결심이 더 생기는 것 같아 다행이다. 가끔 주말에 선별 진료 당직을 서다 보면 아직도 노래방이나 피시방 등 친밀하게 모여서 사교를 하는 곳에서는 감염이 더 쉽게 일어나는 것 같아서 우려스럽다. 전 국민이 모두 백신 접종을 마쳐 집단 면역이 생기기 전까지는 철저하게 주의해야 할 것 같다.

오랫동안 나들이는 꿈도 못 꾼 이들이 희망 여행 예약을 하는 모양이다. 적은 예약 비용을 들여 자신이 원하는 여행지를 선택하고서 코로나가 끝났을 때 여행 스케줄을 미리 준비하는 기획, 희망이라도 가지면 그나마 덜 지루하지 않겠는가.

봄비가 내리자 화사하게 피어난 벚꽃들이 땅으로 떨어져 내린다, 분홍의 꽃들이 길가에 굵은 띠를 이루며 바람에 뭉쳐 다닌다. 떨어지는 꽃들이 아쉬워 사람들과 차들이 꽃 아래 모여든다. 꽃을 좋아하는 친구는 떨어지는 꽃이 아쉬워 아침부터 종일 차를 몰고 이 공원 저 공원 다니며 벚꽃을 실컷 눈에 담으려 노력했다면서 꽃 사진을 한가득 보내왔다. 꽃구경을 제때 하지 못하는 이들은 비 온 뒤에 남아 있는 꽃들을 시차를 두고서 조용한 시간을 택해 따로따로 구경이라도 하러 가야 할 것 같다.

비 내리는 날이면 자갈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씻어 낸다는 분이 계신다. 어릴 적 수도원 근처에서 자랐다는 그분은 비 내리는 날이면 검은 자갈이 깔려 있던 수도원의 그 기다란 길을 떠올리면 경건한 마음이 들어서 불안이 다 사라진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언젠가는 코로나도 끝이 있으리라. 이제 백신도 나와서 많은 사람이 맞기 시작했고, 치료제도 개발돼 효과가 증명되기 시작했으니 코로나와 싸우는 우리는 동굴 속에 갇힌 것이 아니라 묵묵히 걸어 나가기만 하면 끝이 보이는 터널에 서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지금 힘들고 지치더라도 봄이 찾아왔으니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긍정의 마음으로 견뎌야 하지 않겠는가.

가을 무서리가 내리면 풀잎들이 일시에 숨을 죽이듯 코로나가 어서 빨리 물러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언젠가 그날이 찾아오면 푸른 희망의 꽃다발을 안고 씩씩하게 걸어가 보리라. 델피니움 꽃말처럼. “나의 마음을 알아주세요. 영웅,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게요.”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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