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106>혜통이 용을 항복시키다

발행일 2021-03-22 10:09:37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중국에서 유명한 혜통, 신라 왕녀까지 주문으로 치료한 만통법사로 유명



혜통법사의 고향 경주 서남산 기슭 남간마을 들 한가운데에 보물 제909호로 등록된 남간사지 당간지주가 우뚝 서있다.


혜통은 신라 신문왕 시대에 널리 이름을 떨치기 시작해 효소왕 시대에 국사까지 지낸 고승으로 대단한 신통력을 가진 것으로 삼국유사는 소개한다.

혜통은 신라에 밀교를 뿌리 내리게 한 명랑법사와 같이 서남산 남간마을이 고향인 것으로 전해지지만 가족에 대한 내력은 자세하지 않다.

그는 당나라에 유학하며 무외삼장법사의 제자로 많은 공부를 하고 신라로 돌아와 금광사에서 기거한 것으로 나타나지만 지금까지 남은 그의 흔적이 담긴 유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경주 서남산 자락의 남간마을은 남간사라는 절이 있었다 해 마을이름을 그렇게 부른다. 남간마을에는 보물로 지정된 남간사지 당간지주가 논 가운데 우뚝 서있고, 마을안길에 신라시대의 돌우물이 깨끗한 상태로 보존되고 있다.

남간마을에는 지금도 집집마다 석탑이나 석등, 주춧돌 등의 신라시대 절이나 건축물에 사용됐을 석재들을 곳곳에 쌓아두고, 집의 주춧돌이나 부뚜막의 기초석 등으로 활용하고 있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경주 남간사지로 짐작되는 남간마을 안길에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13호 남간사지 석정이 옛날 신라시대 돌을 다듬어진 옛날 모습 그대로 드러나 있다.


◆삼국유사: 혜통이 용을 항복시키다

승려 혜통은 그의 가족 내력을 자세히 알 수 없다.

속인으로 있을 때 집은 남산의 서쪽 기슭 은천동 어귀(지금의 남간사 동쪽 마을이다)에 있었다.

하루는 집의 동쪽 시냇가에서 놀다가 수달 한 마리를 잡아 죽이고 뼈를 동산 안에 버렸다. 이튿날 새벽에 그 뼈가 없어져 핏자국을 따라 가보니 뼈는 옛날에 살던 굴속으로 돌아가 다섯 마리의 새끼를 끌어안은 채 웅크리고 있었다.

그는 이것을 바라보고 놀라 한참이나 이상히 여기며 감탄하고 망설이다가 느낀바가 커 속세를 버리고 승려가 돼 이름을 혜통으로 바꿨다.

혜통은 당나라에 가서 무외삼장을 찾아 뵙고 배우기를 청하니 삼장이 말하기를 “신라 사람이 어찌 감히 불법을 닦을 그릇이 되겠느냐”고 하고는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삼국유사 기록으로 전하는 추정 도림사지가 황룡사에서 동남쪽으로 7번 국도를 넘어서면 석탑부재와 모전석탑 기단의 금강역사 조각 등의 석재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이에 혜통이 알고 싶어 애가 타서 뜰에 서서 머리에 화로를 이고 있으니 조금 후에 이마가 터지면서 우레와 같은 소리가 났다.

무외삼장이 이 소리를 듣고 와서 보고는 화로를 치우고 터진 곳을 손으로 어루만지면서 신비스런 주문을 외우자 상처가 아물어 전과 같이 됐으나 왕 자 무늬의 흉터가 생겼다. 이로 인해 왕화상으로 불렀다. 혜통의 재질이 뛰어나므로 삼장이 심법의 비결을 전해 줬다.

이때 당나라 황실의 공주가 병이 나서 고종이 무외삼장에게 치료를 청하니 삼장은 자기 대신 혜통을 천거했다.

혜통이 고종의 명을 받고 별실에 거처하면서 흰콩 한 말을 은그릇에 담고 주문을 외우자 흰 갑옷을 입은 신병으로 변하여 병마를 쫓으려 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또다시 검은콩 한 말을 금으로 된 그릇에 담고 주문을 외우자 검은 갑옷을 입은 신병으로 변했다.

흰색과 검은색의 병사들이 힘을 합쳐 병마를 쫓으니 갑자기 교룡이 뛰쳐나오고 병이 나았다.

용은 혜통이 자기를 쫓아낸 것을 원망하여 신라의 문잉림으로 가서 매우 심하게 사람을 헤쳤다.

이때에 정공이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다가 혜통을 보고 말하기를 “스님이 쫓아낸 독룡이 우리나라로 와서 심한 해를 끼치니 속히 가셔서 없애 주십시오”라고 했다.

경주 서남산자락의 남간마을은 곳곳에 신라시대 석재들이 남아있어 방문객들이 즐겨 찾고 있다. 마을안길 벽면에 삼릉가는길 안내표지판이 그림으로 길게 그려져 있다.


이에 혜통은 정공과 함께 인덕 2년 을축(665)에 본국으로 돌아와 용을 내쫓았다.

용이 또 정공을 원망해 이번에는 정씨의 문밖에 있는 버드나무에 의탁해 살고 있었으나 정공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다만 그 나무가 무성한 것만 좋아해 매우 소중히 여겼다.

신문왕이 세상을 뜨니 효소왕이 즉위해 신문왕의 무덤을 만들고자 장사지낼 길을 내는데 정씨의 버드나무가 길을 막고 있으므로 관원이 그 나무를 베어버리려고 했다.

정공이 성을 내어 “차라리 내 목을 벨지언정 이 나무는 못벤다”고 하자 관원이 이를 왕에게 보고했다.

왕이 크게 노해 법을 집행하는 관원에게 “정공이 왕화상의 신비스런 술법을 믿고 장차 불손한 일을 꾸미려고 왕명를 업신여겨 거역하며 제 목을 베라 하니 좋아하는 대로 해주어라”고 명령했다.

이리해 그를 목 베어 죽이고 그의 집을 흙으로 묻어버렸다.

도림사지와 경주 낭산 사이에 넓게 펼쳐지는 농경지가 신라시대 문잉림이 있었던 곳. 멀리 보이는 산이 낭산이다.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왕화상이 정공과 매우 친하므로 필시 꺼리고 싫어함이 있을 것이니 마당히 그를 먼저 없애야 한다고 한 후 즉시 병사를 소집해 그를 찾아 잡게 했다.

혜통은 왕망사에 있다가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오는 것을 보고 지붕으로 올라가 사기병과 붉은색 먹을 묻힌 붓을 들고 병사들에게 “내가 하는 것을 보라”고 하며 병의 목에 한 획을 긋고 “너희들은 각자의 목을 보거라”라고 했다.

그들이 목을 보니 모두 붉은 획이 그어져 있으므로 서로 보고 깜짝 놀랐다.

혜통이 또 “만약 병목을 자르면 응당 너희들의 목도 잘릴 것이다. 어떻게 하겠느냐?”고 호통쳤다.

장안사 대웅전은 보물 제1771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는 신라 원효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사찰.


병사들이 황망히 달아나 붉은 줄이 그어진 목을 한 채 왕 앞으로 달려 나아가자 왕이 “화상의 신통력을 어찌 사람의 힘으로 도모하 할 수 있겠느냐”하고 말 한 후 그대로 내버려뒀다.

왕녀가 갑자기 병이 나자 혜통을 불러 치료하게 했더니 병이 나았으므로 왕이 크게 기뻐했다. 그러자 혜통이 말하기를 “정공이 독룡의 해를 입어 나라의 형벌에 억울하게 당했습니다”고 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후회해 즉시 정공의 처자에게는 죄를 면하게 하고 혜통을 국사로 삼았다.

용은 정공에게 원한을 갚고 기장산으로 가서 곰신이 되어 해독을 심하게 끼치니 백성들이 매우 괴로워했다.

혜통이 그 산속으로 들어가 용을 타이르고 살생하지 말라는 계율을 줬더니 곰신이 된 용의 해가 그제야 없어졌다.

장안사 대웅전에는 보물 제1771호로 지정된 석조석가여래삼불좌상 삼세불이 금색으로 도금돼 중생들을 만나고 있다.


신문왕이 등에 종기가 생겨 혜통에게 치료해 주기를 청했다.

혜통이 와서 주문을 외니 그 자리에서 나았다.

그러자 혜통이 “폐하께서는 전생에 재상의 지위에 있으면서 양민인 신충을 잘못 판결해 종으로 했으므로 신충이 원한을 품어 윤회환생할 때마다 보복을 하는 것이옵니다. 지금의 몹쓸 종기도 신충 탓입니다. 신충을 위해 절을 짓고 명복을 빌어 그의 원한을 풀어야 합니다”라고 하니 왕이 옳게 여겨 절을 세우고 이름을 신충봉성사라 했다.

절이 완성되자 공중에서 “임금께서 절을 세워 주셨기 때문에 괴로움에서 벗어나 하늘에 태어나게 됐으므로 원한은 이미 풀렸습니다”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또 외치는 소리가 났던 곳에는 절원당을 세웠다.

이보다 앞서 밀본법사의 뒤에 고승 명랑이 용궁에 들어가서 신인을 얻어 처음으로 신유림에 절(지금의 천왕사)을 세우고 여러 번 이웃나라의 침입을 기도로 막았다. 이후 명랑스님이 무외삼장법사의 핵심사상을 전하고 속세를 두루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구원하고 만물을 감화시켰다.

장안사에서 마당을 내달아 앞산을 바라보면 구름이 낮게 내려와 한폭의 산수화를 그린 듯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연출한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혜통의 신통력

혜통은 경주 서남산 기슭의 남간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수달 한 마리를 죽여 개울 옆에 버렸다.

다음날 그 수달이 없어져 핏자국을 따라 가보았더니 뼈만 남은 수달이 새끼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 이후 충격을 받아 삶에 대한 궁극적인 고뇌에 빠져 고민을 하다가 머리를 깎고 불도의 길로 접어들었다.

혜통은 가까운 곳에서부터 스승을 찾아 공부를 하다가 당나라 무외삼장법사의 신통력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무작정 배를 타고 당나라로 갔다. 혜통은 문전박대하는 무외삼장에게 화로를 머리에 이고 버티면서 자질을 인정받아 제자가 됐다.

혜통은 당 고종의 여식을 단지 주문으로만 치료하면서 중국에서도 유명한 스님으로 이름을 떨쳤다.

신문왕 때 다시 신라로 돌아온 혜통은 우연인 듯 필연인 듯 문제 있는 곳에 나타나 해결해주는 만통법사로 통했다. 특히 혜통은 살아 있는 것은 철저하게 그 목숨을 보호해 주기로 유명했다. 혜통과 마주 앉아 몇 마디만 주고받으면 스스로 용서하는 마음이 생겨 갈등은 저절로 풀렸다.

혜통이 기장 장안사에서 머무는 동안 소문을 듣고 민원을 해결하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줄을 이었다.

혜통이 늦은 시간 장안사로 돌아오는 길에 불광산의 호랑이가 토끼를 잡아먹으려는 것을 보고 나무토막을 던져 줬다.

토끼는 도망가고 나무토막을 냉큼 받아 문 호랑이는 나무토막을 질겅질겅 씹어 삼켰다. 그 다음부터 호랑이는 장안사를 맴돌며 혜통이 던져주는 나무토막으로 연명하며 살생을 잊고, 장안사를 지키는 수호신이 됐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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