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101>의상이 화엄종을 전하다

발행일 2021-02-15 10:02:51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의상대사 당나라 50만 대군 신라 침공 정보 알려 신라 구한 호법승

의상대사가 중국에서 돌아와 관음보살 진신이 머무는 곳이라는 소리를 듣고 기도를 올렸을 때 관음보살이 연꽃을 타고 바다에서 솟아오른 곳으로 전해지는 홍련암의 모습.


의상(625~702)은 원효(617~686)와 함께 신라의 불교를 꽃피운 양대산맥이라 할 수 있다.

의상과 원효는 같은 시대에 활약했던 종교인이면서 사상가이자 철학자, 정치인이며 성인으로 손꼽힌다.

의상과 원효는 신라는 물론 중국과 일본에서도 고승으로 전해지며 기록이 남아있는 국제적인 인물로 평가 받고 있다.

의상은 중국에서 지엄으로부터 화엄종을 배워 신라에 그 뿌리를 내렸다.

원효와 함께 불교의 대중화를 꽃피우는 일에 앞장섰다.

이 때문에 전국의 오래된 사찰치고 의상과 원효의 이름이 없는 사찰이 없을 정도다.

원효와 의상 두 성인 모두 낮은 자리에서 백성들과 함께 호흡하며 부처의 길을 안내했다.

원효가 스스로 실천적으로 민중과 함께 살다간 수행자라면 의상은 실천적 불교에 힘쓰면서 제자들을 길러 제자들이 전국 십대사찰에서 불교를 전파하게 한 교사적 성인이었다.

의상은 스승 지엄의 입적과 시기를 같이해 중국이 대대적으로 신라를 공격하려 한다는 정보를 가지고 신라로 돌아와 왕실에 이러한 사실을 알려 나라를 지키는 데 기여한 호국승려이기도 하다.

의상은 양양의 낙산사와 영주 부석사를 창건하고 탁월한 십대제자를 길러내 신라의 불교문화를 화려하게 꽃피워 국사, 법사, 대사 등으로 불린다.

의상대사가 기도를 올리던 곳에 지은 정자를 의상대라고 부른다. 홍련암 쪽에서 바라본 의상대 원경.


◆삼국유사: 의상이 화엄종을 전하다

의상법사의 아버지는 한신이며, 성은 김씨이다.

나이 스물아홉에 서울의 황복사에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됐다.

얼마 안 되어 중국으로 가 부처의 교화를 보고자 해, 마침내 원효와 함께 길을 나서 요동으로 가다가 국경의 수비군이 간첩으로 오인해 수십 일 동안 갇혀 있다가 간신히 풀려나 돌아왔다.

영휘 초년(650)에 때마침 당나라 사신의 배가 본국으로 돌아가자 그 배에 편승해 중국으로 들어갔다.

처음에 양주에 있었는데 양주의 장군 유지인이 청해 의상을 관청 안에 머무르게 하며 융숭하게 대접했다.

의상은 종남산 지상사를 찾아가 지엄을 만났다.

지엄이 전날 밤 꿈에, 큰 나무 한 그루가 신라 지역에 나서 가지와 잎이 널리 퍼져와 중국까지 덮었는데 나무 위에는 봉황의 둥지가 있어 올라가 보니 한 개의 마니보주에서 나온 빛이 멀리까지 비치는 것이었다.

낙산의 정상에 세워진 동양 최대의 해수관음상.


꿈에서 깨자 놀랍고 이상해 청소를 하고 기다리니 의상이 바로 도착하는 것이었다.

극진한 예절로 그를 맞이하면서 조용히 말하기를 “내가 어제 꾼 꿈은 그대가 내게 올 징조였구려” 하면서 방으로 들어오게 했다.

의상이 화엄경의 오묘한 뜻을 그윽하고 미묘한 데까지 해석하니, 지엄은 학문을 서로 이야기할 동반자를 만나 기뻐하며 새로운 이치를 터득했다.

이때 이미 본국의 승상 김흠순(인문이라고도 한다)과 양도 등이 당나라에 갔다가 갇혀 있었는데 당 고종이 군사를 크게 일으켜 신라를 정벌하려 하자 흠순 등이 남몰래 의상에게 권유하여 먼저 돌아가게 했다.

의상이 함형 원년 경오(670)에 귀국해 이 일을 조정에 알리자 신인종의 고승 명랑을 시켜 임시로 밀교의식을 행할 단을 세우고 비법으로 기도하니, 국란을 벗어날 수 있었다.

낙산사 칠층석탑의 모습. 보물 제499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상륜부 노반에도 괴임돌을 끼우고 있으며 복발, 앙화, 보륜 등을 청동으로 만들어 꽂이쇠에 고정해 일반 상륜과 매우 다른 형식이다.


의봉 원년(676)에 의상이 태백산으로 가서 조정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창건하고 대승을 널리 펴자 영험스런 감응이 뚜렷이 나타났다.

종남산 지엄의 제자였던 현수가 수현소를 지어 그 부본을 의상에게 보내면서 은근한 뜻이 담긴 편지도 함께 보냈는데 글은 이러하다.

‘서경의 숭복사 중 법장이 해동 신라의 화엄법사님의 시종을 드는 분에게 글을 올립니다. 한번 작별한 지 20년이 됐으나 사모하는 정이 어찌 마음과 머리에서 떠나겠습니까? (중략)’

‘우러러 받들건대 스님께서는 고향으로 돌아가신 후 화엄경을 강연해서 법계의 끝없는 연기를 드날리시고 겹겹의 제망으로 불국을 새롭게 해 중생을 널리 이롭게 한다고 하니 기쁨이 뛸 듯이 깊어집니다. (중략)’

의상대사가 창건한 부석사에는 국보급 문화재가 수두룩 하다. 국보 제17호와 18호로 지정된 석등과 무량수전.


‘분수에 따라 전수받아 가진 것을 버려둘 수도 없어서 이 공부에 의지해 내세의 인연을 맺게 되기를 원할 뿐입니다.

다만 스님의 주해가 뜻은 풍부하나 글이 간결해 후세 사람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스님의 은미한 말씀과 미묘한 뜻을 기록하여 의기를 만들었습니다. 근래에 승전법사가 옮겨 써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 그곳 사람들에게 전할 것이오니 스님께서는 좋고 나쁜 점을 상세히 검토하시어 경계해야 할 바와 깨우쳐야 할 바를 가르쳐 주시면 다행으로 여기겠습니다. (중략)’

‘인편과 서신이 있을 때마다 안부를 물어주시기 바랍니다. 제대로 쓰지 못하였습니다.’

의상은 이에 10여 곳의 사찰로 불법을 전하게 하니 태백산의 부석사, 원주의 비마라사, 가야산의 해인사, 비슬산의 옥천사, 금정산의 범어사, 남악의 화엄사 등이 이것이다.

또 법계도서인과 약소를 지으니 일승의 중추가 되는 요점을 모두 실어 천년의 귀감이 되게 했으므로 여러 사람이 다투어 보배로 여겨 지니었다.

이 밖에는 저술이 없지만 솥 안의 고기 맛을 보는데 한 점의 고기로도 충분할 것이다.

법계도서인은 총장 원년 무진(668)에 완성됐으며 이 해에 지엄도 입적했으니 이는 공자가 기린을 잡았다는 구절에서 붓을 놓은 것과 같다.

부석사 조사당에 안치하고 있는 의상대사 진영의 모습.


세간에 전해지기로 의상은 바로 부처의 화신이라 한다. 그의 제자인 오진, 지통, 표훈, 진정, 진장, 도융, 양원, 상원, 능인, 의적 등 열 명의 높은 경지에 도달한 승려들이 우두머리가 됐다.

그들 모두가 성인과 버금가며 각자 전기가 남아있다.

오진은 일찍이 하가산의 골암사에 거처하면서 매일 밤 팔을 뻗쳐 부석사의 석등에 불을 켰다.

지통이 추동기를 지었는데 직접 의상의 가르침을 받았으므로 그의 글에는 오묘한 경지에 이른 말이 많다.

표훈은 일찍이 불국사에 머물면서 항상 천궁을 오갔다.

의상이 황복사에 있을 때 여러 사람들이 함께 탑을 돌면서 항상 허공을 밟고 올라갔으며 층계를 밟지 않았기 때문에 그 탑에는 사다리와 돌계단을 설치하지 않았다. 그 무리들도 계단에서 3자나 떨어져서 허공을 밟고 돌았다. 의상이 그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이것을 본다면 필시 괴이하다고 여길 터이니 세상에 가르칠 것은 못 된다”고 했다.

중국에서 의상대사를 연모해 그를 쫓아 온 선묘낭자가 큰 바위가 돼 도적의 무리를 위협하는 장면을 그린 벽화. 부석사 선묘각 벽에 그려져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의상과 선묘

의상이 당나라 유학길에서 선묘 낭자를 만났다.

선묘는 의상의 인물됨에 한눈에 푹 빠져버렸다.

그러나 이미 불가에 몸을 의탁하고 있는 의상과의 세속적 인연을 맺을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한 선묘는 그냥 의상의 옆에서 머물기로 작심하고 그를 돌보며 어디든 따라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의상이 고국 신라의 위험을 알아차리고, 중요한 정보를 들고 선묘에게 작별인사도 없이 신라로 떠나는 배에 올라버렸다.

의상이 신라로 떠났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선묘는 용이 돼 뒤따르며 풍랑을 잠재워가며 의상의 뱃길을 인도했다.

의상이 신라에서 국왕을 만나 당나라의 침략에 대비할 것을 낱낱이 보고했다.

이어 낙산으로 올라가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부처의 뜻에 따라 낙산사를 건립했다.

또 신라 국왕의 명을 받아 영주 부석사를 건립했다.

부석사에서 불법에 매달리는 의상을 보살피기 위해 선묘는 용이 돼 밤이면 암자에 운무를 드리우고 지붕에 똬리를 틀어 도적이든 짐승이든 아무도 범접하지 못하게 하며 의상을 지켰다.

의상대사가 당나라로 공부하러 갔을 때 대사를 연모한 선묘라는 여인이 의상대사를 보호하기 위해 용이 돼 따라왔다. 이후 큰 바위가 돼 부석사를 창건하는 대사의 일을 방해하는 도적의 무리를 무릎 꿇게 했다. 부석사 부석.


그러던 어느 날 선묘는 밤이 늦도록 낭랑한 목소리로 불경을 외우는 당당한 자세의 의상을 보다가 그만 넋을 잃어버렸다.

선묘의 눈에는 의상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운 낭군이었다.

그날따라 의상의 모습이 너무나 예쁘게 보여 그만 참지 못하고 그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의상도 그날따라 선묘를 내치지 않고 포근하게 안아줬다.

선묘는 그만 황홀경에 빠져 극에 이르는 기쁨을 맛보고 말았다.

저도 모르게 신음하며 몸을 뒤척이다가 벽에 머리를 꽝 부딪치고 퍼뜩 정신이 들었다.

꿈이었지만 생생한 느낌이 전신에 남아 있었다.

선묘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다시 가다듬었다. 선묘의 품에는 의상의 목침이 안겨있고, 어깨 위에는 그의 도포가 덮여있었다.

의상은 꼿꼿한 자세로 아미타불 앞에서 여전히 염불을 암송하고 있었다.

선묘는 정신을 가다듬고 조용히 일어나 자신을 덮고 있던 의상의 도포를 곱게 개켜 두고는 지붕으로 훌쩍 날아올랐다.

선묘는 몇 날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낭군님은 이미 불가의 제자다. 임의 공부에 방해가 돼서는 아니 된다. 나를 다스려야겠다’고 재차 다짐한 선묘는 자신의 몸을 거대한 바위로 바꿔 버렸다. 스스로 욕심을 억제하고, 임의 옆에 머물며 돌볼 수 있는 부석이 돼 천 년 만 년 대사의 옆자리를 지키기로 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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