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97>양지가 지팡이를 부리다

발행일 2021-01-18 09:50:53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양지 스님의 지팡이가 혼자 날아다니며 탁발

신라 문무왕이 당나라의 50만 명 대군을 물리치고자 명랑법사에게 지시해 지은 사찰이 사천왕사다. 사천왕사지에 목탑의 기단에 녹유신장상의 전돌 3개 쌍이 면마다 2묶음씩 돌아가며 배치된 것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발굴에서 확인했다. 사천왕사지 목탑지의 녹유신장상 발굴 장면.


양지 스님은 삼국유사를 통해 소개하기 이전부터 녹유신장상의 복원 등으로 잘 알려진 통일신라시대 스님이다.

삼국유사를 통해 양지 스님의 숨겨진 재주를 더 많이 알 수 있게 한다.

스님이자 조각가, 서예가 등을 총칭한 종합예술가라고 해야겠다.

삼국유사에서 가장 두드러진 양지 스님의 이야기는 아무래도 지팡이다.

석장이 혼자 자루를 걸머지고 도깨비처럼 마을을 날아다니며 탁발하는 장면은 신화 이상의 신비로움과 재미를 선사한다.

기와조각과 석재가 이곳저곳에 나뒹굴고 있는 양지 스님이 머물렀다던 석장사 터에서 영묘사 장륙존상, 사천왕상, 전각, 탑, 삼천불을 조각하고 영묘사와 법림사의 현판 글씨를 쓰는 양지 스님을 그려본다.

무엇보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와 국립경주박물관이 따로 보관하고 있던 사천왕사지에서 출토된 녹유신장의 조각을 퍼즐 맞추듯 완벽하게 재현해낸 역사적인 사건을 만나볼 수 있어 다행이다.

선덕여왕 당시 양지 스님이 거주했던 것으로 전해지는 석장사 터에 기와조각들이 무더기로 발견된 모습.


◆삼국유사: 양지가 지팡이를 부리다

승려 양지의 조상과 고향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신라 선덕여왕 대에 그의 행적이 나타났을 뿐이다.

지팡이 머리에 포대 하나를 걸어 놓으면 지팡이가 저절로 시주하는 집으로 날아가 흔들거리며 소리를 내었다.

그 집에서 이를 알고 재에 쓸 비용을 넣어주었고 포대가 차면 날아서 되돌아온다.

이 때문에 그가 머물고 있던 절을 석장사라고 이름지었다.

그의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신이한 행적이 모두 이와 같았다.

그는 여러 가지 기예에도 두루 능통하여 신묘함이 비할 데가 없었다.

또 글씨와 그림을 잘 그렸다.

영묘사의 장륙삼존 및 사천왕상과 아울러 전각과 탑의 기와, 사천왕사 탑 아래의 팔부신장과 법림사의 주불삼존 및 좌우 금강신 등이 모두 그가 만든 것이다.

영묘사와 법림사 두 절의 현판을 썼고, 또 일찍이 벽돌을 다듬어 작은 탑 하나를 만들고, 아울러 부처 3천 불을 조각해 그 탑 안에 안치하고 그 탑을 절 가운데 모시고 예를 올렸다.

그가 영묘사의 장륙삼존을 만들 때 스스로 선정에 들어가 삼매에서 뵌 부처를 모형으로 했다.

그래서 온 성안의 남녀들이 다퉈 진흙을 나르면서 그가 지은 풍요를 불렀다.

석장사지의 석물로 추정되는 석재들이 등산길 계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지금까지 이 지방 사람들이 방아를 찧을 때나 힘든 일을 할 때에 다들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은 대개 이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불상을 만들 때 든 비용은 곡식 2만3천700석이었다.

논평해서 말한다.

양지 스님은 재주를 다 갖췄고 덕행이 충만하다고 할 수 있지만 큰 인물로서 하찮은 재주만 드러내고 자기의 실력은 숨긴 것이라 하겠다.

다음과 같이 찬미한다.

’재 마친 법당 앞에 석장은 한가한데/ 정적 깃든 오리 모양 향로에 홀로 향불 피우네/ 남은 불경 읽고 나니 더 할 일 없어/ 부처님 모습 빚어 합장하고 뵈오리.’

경주 석장사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석재들이 인근 개인 무덤 상석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100년 잠에서 깨어난 녹유신장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국립경주박물관과 공동으로 사천왕사 녹유신장상의 3가지 유형을 사천왕사지 발굴이 시작된 지 100년 만에 완벽하게 재현해냈다.

문화재연구소와 경주박물관이 학술교류 협약을 체결하고 각각 보관하던 7점의 파편을 복원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로써 통일신라를 지켜온 녹유신장상이 백년의 잠에서 깨어났다.

사천왕사를 지켜온 녹유신장상이 깨어진 채 발견되고도 제자리를 못 찾고 기다리다 100년 만에 제 모습을 찾은 것.

사천왕사는 679년에 문무왕이 경주 낭산 신유림에 당나라 50만 대군의 침략을 막기 위해 승려 명랑의 밀교의식을 실행하며 건립한 호국사찰이다.

경주 석장동 석장사지에는 지금도 다양한 석물들이 흩어져 있다.


사천왕사 녹유신장상은 1915년 최초 발견 당시 세 종류의 벽전은 무엇인지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깨어진 조각만이 사천왕사 목탑 자리에 묻혀 있었다.

큰 눈과 콧수염, 날개가 달린 투구와 화려한 갑옷, 신발 또는 맨발로 칼 혹은 화살을 든 무장 3명이 험악한 표정의 생령을 깔고 앉아 보는 이를 주시한다.

앞을 지나가면 각기 달라져 보이는 장수의 표정에서 이들이 범상치 않은 존재임을 직감할 수 있다.

조선총독부는 1918년에 사천왕사 발굴을 개시했고 1922년부터 고적발굴조사사업의 하나로 본격적인 발굴을 진행했다.

이는 조선총독부의 필요에 따라 이루어진 발굴로 사찰과 녹유신장상에 대한 정보를 축적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광복 이후 발굴 자료와 연구 결과를 토대로 벽전 파편을 조립한 결과 왼손에 칼을 든 신장과 활과 화살을 든 신장 등 두 종류의 신장을 확인할 수 있었다.

비탈진 경사면이 석장사지로 전해지고 있다. 석장사지 푯말.


그 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06년부터 2012년까지 체계적이고 정밀한 발굴을 거쳐 200여 점의 파편을 3차원 입체 3D로 스캔하고 이를 참고로 세 종류의 신장을 복원하는데 성공했다.

또 이들이 사천왕사지 동서목탑 기단 벽면을 장식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사천왕사 녹유신장벽전은 세 종류의 신장이 한 묶음으로 탑 한 면에 두 묶음씩, 동서 목탑 기단에 16개의 묶음으로 배치되어 녹유신장으로 이루어진 벽전은 모두 48점인 것으로 확인됐다.

일제강점기에 수습되어 국립경주박물관이 보관하던 왼손에 칼을 든 녹유신장상의 하단부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서탑지 북편에서 발굴 수습한 상단부 6점이 같은 상이었음을 확인했다.

2017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7점의 파편을 조립하고 빠진 부분은 같은 유형의 왼손에 칼을 든 녹유신장상의 파편을 참고하여 벽전을 복원했다.

국립경주박물관은 처음 사천왕사 발굴을 진행한 지 100년 만에 최초로 원래 짝을 찾아 복원된 왼손에 칼을 든 녹유신장상을 비롯해 3쌍의 녹유신장상을 전시하고 있다.

석장사지 북쪽 산 정상 방향으로 대나무숲속에 석축이 그대로 남아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양지스님의 지팡이

석장사는 양지 스님이 들고 다니던 지팡이 이름을 따서 그렇게 부른다.

스님의 지팡이는 100년 묵은 대나무로 만들어 가벼웠다.

오래되기도 했지만 스님이 다니다 절로 돌아와서는 굴뚝에 세워두기 때문에 연기를 먹어 그렇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스님의 지팡이는 현명하여 스님이 불공을 드리는 시간을 아끼도록 매월 1일과 15일이면 혼자 포대를 짊어지고 날아가 시주를 해 돌아와 스님이 공양을 거르지 않도록 했다.

서라벌의 왈패들이 지팡이와 양지 스님의 도력을 시험해보기로 했다.

힘깨나 쓴다는 왈패들이 3월 보름에 자루가 두둑하도록 탁발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목에서 지팡이를 잡았다.

그리고 탁발한 자루를 빼앗으려고 다섯 명의 장정이 달려들었으나 결국 석장에서 자루를 벗기지 못했다.

지팡이는 돌로 내리쳐도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사천왕사지 목탑 기단에서 발굴된 녹유신장상 3쌍이 발굴된 지 100년 만에 국립경주박물관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업무협약을 통해 복원한 후 경주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가장 늦게 복원된 왼손에 칼을 든 신장상.


오히려 석장이 자루를 움켜잡은 채 장정들을 떠밀어 모두 북천의 찬물에 빠뜨려버렸다. 그리고는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방울을 요란하게 흔들며 춤추듯 날아 가버렸다.

왈패들은 그날 이후로 지팡이가 나타나면 멀찌감치 떨어져 큰절을 하고 지나갈 때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리고 스님의 지팡이가 돌보다 더 단단하다고 하여 석장(石杖)이라고 불렀다.

또 석장이 가진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당시 서라벌에는 호랑이와 같은 맹수들이 자주 출몰해 사람을 해치기도 했다.

민가에서는 해가 지면 아예 문밖 출입을 하지 않았다.

사천왕사지 목탑 기단에서 발굴된 녹유신장상 3쌍이 발굴된 지 100년 만에 국립경주박물관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업무협약을 통해 복원한 후 경주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활과 화살을 든 신장상.


석장사는 깊은 산중에 있어 짐승들이 먹이를 찾아 수시로 나타났다.

이를 경계해 양지 스님은 석장에 주문을 걸었다.

굴뚝에 세워둔 지팡이가 어두워지면 석장의 크기로 길어져 괴물의 모습이 됐다.

간혹 날카로운 울음을 울기도 하며 가까이 오는 짐승들을 물리쳤다.

두세 차례 호랑이가 접근했지만 석장이 크게 울며 다가가자 호랑이는 그 이후로 석장사 가까이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양지 스님의 지팡이가 석장의 크기로 늘어난다 하여 석장이라 불렀다.

석장을 가지고 도를 닦는 양지 스님이 사는 곳이라 하여 절 이름을 석장사라고 불렀다.

사천왕사지 목탑 기단에서 발굴된 녹유신장상 3쌍이 발굴된 지 100년 만에 국립경주박물관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업무협약을 통해 복원한 후 경주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오른손에 칼을 든 신장상.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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