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시대 창건한 백엄사 석등과 석불좌상만 남아||오층석탑과 진신사리의 흔적은 찾을 수 없어

▲ 신라시대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백엄사 또는 백암사, 대동사라고도 불렸던 절이 있었던 터로 짐작되는 곳에 석불좌상과 석등을 복원해 관리하고 있다.
▲ 신라시대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백엄사 또는 백암사, 대동사라고도 불렸던 절이 있었던 터로 짐작되는 곳에 석불좌상과 석등을 복원해 관리하고 있다.


백엄사의 창건연대는 삼국유사에서조차 신라시대 라는 정도만 추정하며 자세히 알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은 창건연대는 물론 폐사된 시기와 정확한 절터조차 짐작하기 어려운 전설 같은 절이다.



단지 석불좌상과 석등만 빈터에 뒹구는 것을 복원해 세워두고 있을 뿐이다.

백엄사는 백암사, 대동사 등으로도 불린다. 지금은 폐사된 절터에 보물 제381호 백암리석등과 경남 유형문화재 제42호 대동사지석조여래좌상이 남아있다.



석등의 갓등 아래 팔각형의 조각된 화사층이 네 곳의 창을 내고, 창과 창 사이에 사천왕상을 방위별로 각각 양각으로 조각해 특별한 양식을 볼 수 있다.



또 석불좌상의 형식도 특이한 면이 있다.

상중하대 3층으로 나누어 조성한 불상 대좌의 중대를 팔각기둥으로 세우고, 면마다 팔부신중상을 양각으로 도드라지게 새겼다.

석등과 석불의 대좌에 새겨진 조각의 예술성이 섬세하고 아주 뛰어나 눈길을 끈다.



다만 삼국유사 기록에 있는 진신사리를 보관한 오층석탑의 흔적은 발굴 과정에서도 발견되지 않아 아쉬움이 남는다.





▲ 경남 유형문화재 제42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는 백엄사 석불좌상. 결가부좌하고 있는 형식의 부처로 얼굴이 크게 마모됐지만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고 대좌는 상중하 3대로 나눠 조성했다.
▲ 경남 유형문화재 제42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는 백엄사 석불좌상. 결가부좌하고 있는 형식의 부처로 얼굴이 크게 마모됐지만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고 대좌는 상중하 3대로 나눠 조성했다.




◆삼국유사: 백엄사 석탑사리



개운 3년 병오(946년) 10월29일에 강주지역의 임도대감이라는 문서에 기록돼 있다. 선종의 백엄사는 초팔현에 있으며 절의 승려 간유상좌는 나이 39세라 했으나 절을 처음 세운 때는 알 수 없다고 했다.



다만 고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전 시대인 신라 때에 북택청 터를 희사해서 이 절을 세웠으나 중간에 오랫동안 폐사로 있었다.

지난 병인년(1026년) 중에 사목곡의 양부화상이 고쳐 지어 그곳의 주지가 됐다가 정축(1037년)에 세상을 떠났다.



을유년(1045)에 희양산의 긍양화상이 와서 10년간 머물다가 을미년(1055)에 다시 희양산으로 돌아가자 때마침 신탁화상이 남원 백암수에서 이 절로 와서 규정대로 주지를 했다.



또 함옹 원년(1065) 11월에 이 절의 주지인 득오미정대사와 승려 수립이 절에서 항상 지켜야할 10조를 정하고 새로이 5층 석탑을 세워서 진신 불사리 42과를 맞아 봉안했다.





▲ 석불좌상의 대좌를 상중하 3대로 나누어 조성한 모습. 중대는 팔각기둥으로 길게 깎아 세웠는데 면마다 팔부신중상을 섬세한 예술성이 뛰어나게 양각으로 조각했다.
▲ 석불좌상의 대좌를 상중하 3대로 나누어 조성한 모습. 중대는 팔각기둥으로 길게 깎아 세웠는데 면마다 팔부신중상을 섬세한 예술성이 뛰어나게 양각으로 조각했다.


사재를 털어 밑천으로 적립해 해마다 여기에 공양할 일과, 특히 이 절에서 불법을 수호하던 존경받는 승려 엄흔, 백흔 두 분의 명신과 근악 등 세 분 앞에 제사를 지낼 밑천을 모아 공양할 조항과, 금당의 약사여래 앞 나무 주발에 매달 초하루마다 공양미를 갈아 놓는 조항을 정했다. 이하 조항은 기록하지 않는다.







▲ 백엄사 석등의 모습. 경남 합천군 대양면 백암리 절터에서 발견돼 복원해 세웠다. 지붕은 팔각이고 그 아래 불을 밝히는 화사석은 팔각으로 깎아 네 면에 창을 내고, 사이사이에 사천왕상을 양각으로 조각해 특이한 형식을 보인다. 보물 제381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 백엄사 석등의 모습. 경남 합천군 대양면 백암리 절터에서 발견돼 복원해 세웠다. 지붕은 팔각이고 그 아래 불을 밝히는 화사석은 팔각으로 깎아 네 면에 창을 내고, 사이사이에 사천왕상을 양각으로 조각해 특이한 형식을 보인다. 보물 제381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백엄사





백엄사는 백암사, 대동사로도 불린다. 태종대 88개의 자복사 가운데 하나로 합천군 대양면 백암리에 있었던 절로 지금은(고려시대) 절은 사라지고 석불좌상과 석등이 남아있다.



삼국유사에 창건과 고려시대 기록이 수록돼 있다.

신라 때 백흔(伯欣)과 엄흔(嚴欣)이 살던 집을 희사해 창건하고 백엄사라 했다고 한다.

또는 신라 때 북택청 터를 희사해 창건했다고도 한다.

창건 후 백엄사는 한때 폐허화됐지만, 906년(신라 효공왕 10)에 사목곡(沙木谷)의 양부가 중창하고 주지로 있으면서 선종의 중심 사찰이 됐다.



통일신라말 희양산문의 정진 대사 긍양(兢讓)이 스승 양부의 뜻을 이어 10년 동안 백암사에서 후학을 지도했다.

고려시대인 1026년(고려 현종 17)에 중건했고, 1065년(고려 문종 19) 11월 수립(秀立)이 주지로 부임해 절의 규율 원중상규 10조를 정했다.

또 5층 석탑을 세워 진신사리 42과를 봉안하고 사재로 보를 세워 개창조를 위해 공양하는 등의 내용을 기약했다.



태종실록에는 1407년(태종 7년) 12월, 초계(草溪) 백암사가 천태종의 자복사찰로 지정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조선시대의 불교 종파는 이전의 11개 혹은 12개에서 조계종, 천태종, 화엄종, 자은종, 중신종, 총남종, 시흥종 등 7개 종파로 정리되었는데, 초계 백암사는 천태종에 소속된 자복사찰이었다. 자복사찰은 나라의 안녕과 왕실의 복을 빌기 위해 지정하거나 건립한 사찰이었다.



통일신라말에 창건돼 고려시대를 거쳐 선종의 중심 사찰로 발전한 백엄사가 조선 초에도 지방의 명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천태종으로 바뀐 점도 주목된다.

이후 백엄사의 연혁은 전하지 않아 폐사된 시기도 알 수 없다.







▲ 백엄사 석등의 모습. 화려한 기법으로 조각했다. 팔각의 지붕돌 아래 네 개의 창을 뚫어 불을 밝히게 하고, 창과 창 사이 네 면에는 사천왕상을 돋을새김했다. 조각은 섬세하게 새겨 뛰어난 작품성을 자랑한다.
▲ 백엄사 석등의 모습. 화려한 기법으로 조각했다. 팔각의 지붕돌 아래 네 개의 창을 뚫어 불을 밝히게 하고, 창과 창 사이 네 면에는 사천왕상을 돋을새김했다. 조각은 섬세하게 새겨 뛰어난 작품성을 자랑한다.


현재는 절터만 남아있다.

2006년 경남문화재연구원은 백엄사의 정확한 위치를 찾기 위한 1차 발굴 조사를 시행했다.

조사를 통해 금동불입상과 청동제 사리구, 유리제 사리병편, 금박편, 막새 등 와류와 청자편 등이 발굴됐다.

또 건물의 구조와 시대를 추정할 수 있는 초석과 3동의 건물지, 기단석열, 배수로 등이 드러났다.



폐사된 백엄사의 절터인 백엄사지 혹은 대동사지에는 보물 제381호 백암리석등과 경남 유형문화재 제42호 대동사지석조여래좌상이 남아있다.



석조여래좌상은 150㎝ 높이로 8각 대좌 위에 결가부좌하고 있다.

얼굴 부분의 마멸이 심하지만 비교적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불상 일부는 시멘트로 보수한 상태이고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불상 대좌는 상중하대로 나눠 있는데 특이하게 중대를 팔각기둥으로 세우고 면마다 팔부신중상을 양각으로 새겼다.



백암리석등은 기본형인 8각 석등으로 상륜부는 없어졌고 나머지 다른 부재는 거의 완전하다.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8세기 후반의 석등으로 추정하고 있다.

석등의 불을 밝히는 화사석층은 네 개의 창과 사이사이에 사천왕상을 섬세하게 새긴 것이 특징이다.

화사석의 지붕은 팔각으로 조각했다.



석등이 세워져 있는 곳은 백엄사지라고 전해오나 분명하지 않다.

석등이 무너져 흩어져 있던 것을 복원한 것으로서 원래의 위치는 알 수 없다 한다.







▲ 신라시대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백엄사지 뒤편으로 가파르게 산능선 사이로 계곡이 형성된 모습. 지금은 물을 가두는 소류지가 축조돼 있다.
▲ 신라시대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백엄사지 뒤편으로 가파르게 산능선 사이로 계곡이 형성된 모습. 지금은 물을 가두는 소류지가 축조돼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백엄사 기적

백엄사는 처음 신라시대 선승이 불도를 닦으려 깊은 계곡으로 들어와 10년이나 암자를 지어 혼자 공부를 했던 절이다.

암자 북쪽 벽에는 계곡의 돌로 깎은 스님 체구와 비슷한 크기의 석불좌상이 앉아 있었다.



선승이 계곡의 물을 공양수로 불상 앞에 올리고 기도를 끝낼 즈음이면 공양수에 쌀밥이 가득 채워지곤 했다.

누구도 찾지 않았지만 선승은 혼자서 기도하고, 혼자서 공양수를 올리며 석불이 주는 쌀밥으로 끼니를 이어갔다.



신라시대 헌덕왕 때에 애장왕의 동생이 삼촌인 헌덕왕의 칼을 피해 숨어들어 혼자 불법을 공부하며 암자를 세우고, 부처를 손수 깎아 모시고 불공을 드렸던 것이다.

선승은 삼촌 언승의 손에 죽은 애장왕 청명의 친동생으로 이름은 청계라고 불렸다.





▲ 백엄사 입구에 상촌마을을 안내하는 입간판과 정자를 세워 방문객들의 궁금증을 덜어주고 있다.
▲ 백엄사 입구에 상촌마을을 안내하는 입간판과 정자를 세워 방문객들의 궁금증을 덜어주고 있다.


청계는 형이 왕이 됐지만 숙부인 언승이 실권을 잡고 휘두르는 모습을 보며 일찍부터 정치에 뜻을 접고, 몰래 불법을 공부해왔다.

어느 날 숙부 언승이 나중에 흥덕왕이 된 동생 수종 등과 애장왕을 죽이려 내실로 몰려오는 모습을 보고, 청계는 혼자 몰래 도망 나왔다.



청계가 평민의 옷을 입고 산과 계곡으로만 피해 다니다가 찾아온 곳이 백양이다.

청계는 형의 복수 같은 것은 처음부터 마음에 없었다.

인간의 권력과 명예 등의 욕심에 대해 아예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깨달음을 얻는데 쉬웠을 것도 같다.



청계가 머무는 암자는 계곡의 중심에서 멀지 않아 홍수가 지면 암자 일대는 물바다가 된다.

백양 일대에는 크게 홍수가 일어나는 일이 많지 않았다.

청계가 백암에 자리를 잡은 후 11년 되던 해부터 3년 연속으로 7일간이나 소나기가 내려 계곡이 크게 범람했지만 절에는 물이 침입한 흔적도 없었다.

청계 주지스님은 홍수가 퍼부을 때도 여전히 염불을 외고 있었다.

염불소리는 마을사람들이 홍수를 피해 뒷산으로 올라가 있을 때에도 그치지 않고 마을 전체로 울려 퍼졌다.





▲ 우리나라 어디를 가든 쉽게 눈에 들어오는 개발 현장.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해 개발사업이 무산되기도 하지만 훼손이 안되는 범위에서 다양한 개발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백엄사지 앞에도 고속도로 건설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 우리나라 어디를 가든 쉽게 눈에 들어오는 개발 현장.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해 개발사업이 무산되기도 하지만 훼손이 안되는 범위에서 다양한 개발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백엄사지 앞에도 고속도로 건설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그 이후로 마을 사람들이 암자로 달려와 시주해 절을 크게 지어 대동사라 불렀다.

그리고 20여 년이 지난 어느 날부터 청계 스님의 모습은 대동사에서 사라지고, 마을 전체로 울려 퍼지던 염불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후 100여 년이 지나 절은 폐사가 됐지만 석불만 여전히 혼자 앉아 있는 터에 백흔과 엄흔이 절을 중창해 백엄사라 부르며 불사를 이어갔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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