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상주 북장사

발행일 2020-12-22 20:00:0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넓은 계곡과 평평한 산세의 노악산 뒤 천주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북장사는 대한 불교 조계종 제8교구 직지사의 말사다. 신라 시대 진감 혜소국사가 833년에 창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임진란 때 소실되어 중건한 이후, 화재로 인해 몇 차례 더 중건됐다가 터가 좋지 않아 1658년(효종 9)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사진은 북장사 극락보전. solmin@idaegu.com 김진홍 기자


경북 상주 시내에서 보은으로 가는 길. 북장사는 속리산 끝자락인 천주산 어귀에 자리하고 있다.

상주시 내서면 북장리를 지나 북장사 표지판을 따라 좁은 길을 거슬러 올라가기를 10여 분 남짓.

시야가 탁 트인 공터에 들어서면 압도적인 크기의 일주문(사찰에 들어서는 산문 가운데 첫 번째 문)이 우리를 반겨준다.

차를 이용해 곧장 올라갈 수도 있으나 다른 곳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일주문의 자태에 차를 한편에 세워놓고 걸어 올라가기로 했다.

북장사 일주문. 웅장함이 압도적이다.


북장사의 창건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상주 천주산 북장사사적기’ 필사본에는 833년(흥덕왕3년) 진감 국사에 의해 창건됐다고 전하고 있다.

이 사적기에는 천주산 이름에 대한 기록도 있다.

이 산에는 수미굴이 있고 굴 가운데에 아래는 좁고 위는 넓은 모양인 돌기둥이 있다.

그 모습이 마치 하늘을 받친 기둥처럼 보일 뿐 아니라 고태스럽고 괴이한 모습으로 입을 벌리고 서서 구름과 안개를 마시기도 하고 토하기도 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 천주산이라 불려 왔다고 한다.

천주산이라는 이름이 언제 붙여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옛 절터에서 창건 당시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천주산’ 기와가 출토돼 비로소 그 이름을 알게 됐다.

창건 이후 이 사찰은 수미암, 상련암, 온선암 등의 부속 암자를 지닌 국찰이었으나 임진왜란에 모두 불타 폐허가 됐다.

그 후 1624년(인조2년)에 이곳에 온 중국 승려 10여 명에 의해 중건됐으나 1650년(효종1년)에 화재로 당우가 모두 소실되고 다시 서묵, 충운, 진일화상 등이 신도와 함께 중건했다.

북장사에 들어서는 3문 중 일주문 다음에 위치한 대문인 사천왕문.


불과 8년 만인 1657년(효종8년) 다시 화재로 당우가 모두 소실됐다.

이 절이 이렇게 짧은 기간에도 많은 화재가 발생하는 것은 사찰이 있는 자리 남쪽에 화산이 비치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그래서 염수를 그 첨두에 묻어 재앙을 면했다고 한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 나무꾼이 이를 훼손하자 다시 화재를 입었다.

이에 절의 스님들이 의논해 1년 후인 1658년 복지로 이전해 용순이 궁형당을, 취건이 원통전을, 일휘가 은현당을 각각 세워 신북장사라 했다.

그렇게 옮겨 간 북장사는 그 이후로 번성해 불전은 넓고 화려해 극락보전, 화장전, 원통전 등 20여 동의 건물이 있는 대사찰이 됐다.

이후 쇠락해 지금은 직지사의 말사로 속해 있다.

보물 1278호인 영산회괘불탱. 높이 13.37m, 폭 8.07m의 거대한 이 괘불은 기우제를 지낼 때 사용된다.


◆비를 부르는 ‘북장사 괘불’

괘불은 야외에서 벌어지는 불교의식에서 예배의 대상으로 사용하는 대형 걸개그림이다.

보물 제1278호인 ‘북장사 괘불’은 가로 811.6㎝, 높이 1천330㎝다.

이 그림은 석가모니불이 영취산에서 제자들과 중생들에게 설법하는 모습을 묘사한 ‘영산회상도’다.

녹색과 붉은색, 금색이 도드라진 그림에는 광배를 뒤에 두고 중심에 서 있는 부처가 압도적이다.

부처 주변으로는 여러 보살과 제자, 사천왕, 제석천 등이 보인다.

일반적으로 영산회상도에는 법회를 주관하는 석가모니불이 대좌 위에 앉은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비해, 이 불화는 서 있는 입상의 부처로 표현됐다.

야외 법회를 위한 괘불의 기능에 맞게 예배의 주존을 화면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서 있는 부처로 그린 것이다.

일어서있는 부처의 도상은 ‘북장사 괘불’에 처음 나타났으며, 이후 경북지역 사찰의 영산회상도 도상으로 확산됐다.

북장사 괘불의 화기에는 1688년 불교 신도들과 승려 165명의 시주와 후원으로 제작됐다고 적혀있다.

이 괘불은 미완성 작품이다.

자세히 관찰하면 부처의 오른손이 밑그림만 돼 있다.

이와 관련해 연기설화가 전해진다.

신라시대 때 당나라 스님이 사흘 동안 문을 닫은 채 먹지도 않고 괘불을 그리는데, 열세 살의 어린 스님이 이를 몰래 엿보니 스님은 온데간데없고 푸른 새 한 마리가 화면 앞을 왔다 갔다 하는 모습만 있더란다.

어린 스님이 엿보는 것을 눈치챈 새는 갑자기 입에 문 붓을 놓고 날아가 버렸고 그림을 확인하니 한쪽 귀퉁이가 완성되지 않았다.

어느 해 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 이 그림을 싣고 읍에서 기우제를 지내니 효력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 괘불은 주로 불교의식을 거행할 때 야외에 걸렸지만 극심한 가뭄이 닥친 상주 지역에 비를 청하는 기우제에서도 사용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 내용은 상주지역 읍지 ‘상산지’에 나온다.

1950년대에도 가뭄이 심해 이 괘불의 사본을 북천강에 가서 걸어놓고 기우제를 지낸 적이 있다.

이후 2001년에도 다시 한번 괘불을 대동해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괘불을 걸고 난 이후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단비가 내렸다.



◆극락보전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은 극락보전에 모셔져 있다.

극락보전은 팔작지붕에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2001년에 지어졌다.

3구의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은 ‘북장사사적기’를 통해 1676년(숙종2년)에 조성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

중앙에 아미타여래좌상, 왼쪽에 관세음보살좌상, 오른쪽에 대세지보살좌상이 협시하고 있다.

아미타여래좌상은 좌우 보살상 보다 조금 크게 조성됐다.

3구의 아미타여래좌상은 결가부좌 자세로 구품인을 결하고 있으며 좌우 협시 보살상은 연꽃 가지를 들고 앉아있다.

크기는 180~190㎝에 달하는 중형의 불상으로서 모두 나무로 조성해 도금한 상태다.

별도로 제작돼 몸체에 삽입된 두 팔을 포함해 전체가 완전하게 보존돼 있다.

작품의 완성도가 높고 2m에 달하는 크기의 불상이 손상된 곳이 거의 없이 온전하게 남아 있어 17세기 불교조각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들이 모셔진 명부전.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이 불상들은 북장사 명부전에 모셔진 24구의 목조상이다.

불교의 지옥관이 다른 지옥 사상과 다른 점은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이들을 구제하고자 하는 자비심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지옥에서 중생들을 구제하고자 하는 지장보살을 주존으로 모시고 죽은 이의 넋을 천도해 극락 왕생하도록 기원하는 종교적 기능을 하는 곳이 바로 명부전이다.

불가에 따르면 사람이 죽으면 저승 시왕 중 7왕에게 7일 동안씩 생전의 업에 대하여 조사를 받는다.

이어 100일, 1주년, 3주년이 되는 시기에 나머지 3왕에게 심판을 받아 육도 가운데 한곳에 다시 태어나게 된다.

이 시기에 맞춰 행하는 천도의식이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49재로 죽은 이가 다음 생에 극락에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명부전은 지장보살과 저승 10왕을 모시므로 지장전·시왕전이라고도 하며, 이곳에 봉안된 지장시왕도는 불교의 지옥세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대체로 지장전의 중앙에 본존인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도명존자·무독귀왕을 봉안해 삼존을 이룬다.

북장사의 명부전도 중앙의 지장삼존을 비롯해 좌우에는 10구의 시왕상, 귀왕, 판관, 사자의 순서로 배치돼 있다.

조성발원문에 의하면 1689년에 조각승 지현을 비롯한 8명의 조각승이 참여했다.

24구에 달하는 상이 손상된 곳이 거의 없이 온전하게 남아있다.

북장사 삼층 석탑(경상북도 문화재자료 238호). 탑의 높이는 5.45m, 기단의 한 변은 3.27m로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유일한 지정문화재였던 북장사 삼층석탑

문화재자료 제238호인 북장사 삼층석탑은 괘불을 제외하고는 북장사의 유일한 지정문화재였다.

이 탑은 이곳이 본래 자리도 아니고 새 부재가 많이 들어가 복원된 탑이지만 1991년 문화재로 지정됐다.

원래는 상주시 인평동에 있던 탑으로 우암산 정상 부근에 흩어져 있었던 것을 용흥사로 옮겨 관리했다가 1998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북장사 경내로 옮기면서 북장사 삼층석탑으로 이름을 바꿔 복원했다.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린 형태로 원래는 기단 일부와 탑신의 3층 몸돌 1개, 지붕돌 3개만 남아 있었다.

지붕돌은 낙수 면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네 귀퉁이가 살짝 치켜 올라갔으며 밑면에 5단의 받침을 뒀다.

남아있던 기단과 지붕돌 등 부재들의 양식상 특징으로 보면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북장사 삼성각. 삼성각 벽면에 그려진 호랑이 눈은 보는 사람이 어느 곳으로 움직여도 따라다닌다.


북장사는 사람이 거의 통행하지 않아 휑한 모습이지만 전성기 때 사찰의 규모가 대단했음을 한눈에 봐도 느낄 수 있다.

사찰 감상을 마치고 차로 돌아오는 길.

마당을 지키는 삼층석탑이 발걸음을 돌리는 나를 다시 맞아준다.

깨끗이 정돈된 마당 가운데 자리한 석탑 앞에서 앞뒤로 우뚝 솟아 있는 큰 산들을 바라본다.

매서운 겨울바람으로 얼어있던 몸을 산들이 포근하게 안아 주는 느낌이 든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꼬여있던 마음이 간결해짐을 느낀다.

코로나19로 무겁고 복잡한 마음을 이곳에서 잠시나마 훌훌 털어버리는 것은 어떨까.

권종민 기자 jmkwon@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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