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왕의 아들 형제 오대산에 숨어 불법에 귀의, 동생 효명태자가 왕위를 잇다



▲ 오대산 월정사에서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가져온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다는 적멸보궁으로 가는 길에 상원사가 있고, 상원사에서 적멸보궁으로 가는 산길 중턱에 사자암이 있다. 문수보살이 머물렀던 곳이어서 사자암을 건설했다. 사자암의 모습.
▲ 오대산 월정사에서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가져온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다는 적멸보궁으로 가는 길에 상원사가 있고, 상원사에서 적멸보궁으로 가는 산길 중턱에 사자암이 있다. 문수보살이 머물렀던 곳이어서 사자암을 건설했다. 사자암의 모습.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도 죽음을 앞두고 왕권 이양 이후 반란에 대한 불안감으로 고민이 컸다.

이 때문에 왕은 눈을 감으면서도 왕위를 이을 아들에게 관 앞에서 바로 즉위할 것을 유지로 남겼다.

문무왕이 걱정했던 것처럼 신문왕은 즉위하면서부터 김흠돌을 비롯한 반란세력의 수상한 움직임을 감지했다.



왕은 왕비의 아버지이자 장인인 반란수괴 김흠돌의 목을 치고, 왕비는 반역자의 자식이라는 명분으로 궁궐 밖으로 내쫓았다.

쫓겨난 왕비에게서는 두 아들이 있었다.

보천태자와 효명태자가 그들이다.



신문왕은 새로 맞은 왕비가 낳은 아들을 태자로 임명해야 했다.

왕비 세력의 강압 때문에 전 왕비의 아들에게 명했던 태자를 파했다.

충격에 빠진 보천과 효명태자는 화랑들과 어울려 군사훈련에 몰입하다 오대산으로 잠적해버렸다.



신문왕이 죽고 7세에 불과한 효소왕이 왕위를 이었다.

어머니 신목왕후가 섭정으로 나라를 다스렸으나 폐비된 김흠돌의 여식을 둘러싼 세력들이 왕권에 도전해 왕실은 늘 불안했다.

결국 효소왕은 11년 만에 김흠돌의 세력들에 의해 왕권에서 물러나야 했다.





▲ 신문왕의 아들 보천태자가 세상의 덧없음을 느껴 오대산으로 숨어 부처에 귀의했다. 오대산에 머물며 그가 마시며 오만이나 되는 진신에 공양했던 물을 우통수라 한다. 이를 상징적으로 여겨 상원사에 우통수라는 이름으로 수원지를 개발한 모습.
▲ 신문왕의 아들 보천태자가 세상의 덧없음을 느껴 오대산으로 숨어 부처에 귀의했다. 오대산에 머물며 그가 마시며 오만이나 되는 진신에 공양했던 물을 우통수라 한다. 이를 상징적으로 여겨 상원사에 우통수라는 이름으로 수원지를 개발한 모습.


◆삼국유사: 명주 오대산 보질도 태자 전기

신라 정신왕의 태자 보질도가 그의 아우 효명태자와 함께 하서부에 있는 각간 세헌의 집에 가서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큰 재를 넘었다.

그들은 각기 1천 명을 거느리고 성오평으로 가서 며칠을 유람하다가 태화 원년(648) 8월5일에 형제가 함께 오대산에 들어가 숨어 버렸다.

무리들 가운데 시중을 들고 호위하던 자들이 샅샅이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고 모두 서울로 돌아왔다.



형인 태자는 오대산 중대의 남쪽 아래에 있는 진여원 터 아래 산 가장자리에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그곳에 풀을 엮어 암자를 짓고 거처했다.



아우인 효명도 오대산 북대의 남쪽 산 가장자리에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역시 풀을 엮어 암자를 짓고 살았다고 한다.



두 형제는 예불과 염불로 수행하며 오대에 나아가 삼가 예배를 드리니 푸른색 방위인 동쪽 대의 보름달 모양의 산에는 관음보살의 진신 1만 명이 항상 머무르고, 붉은색 방위인 남쪽 대의 기린산에는 8대 보살을 우두머리로 1만 명의 지장보살이 항상 머물렀다.





▲ 오대산 사자암은 가파른 경사를 따라 동서남북과 중대 등의 오대를 상징해 오층누각을 지었다. 오대산 중턱 사자암에서 동남쪽으로 바라보는 전경.
▲ 오대산 사자암은 가파른 경사를 따라 동서남북과 중대 등의 오대를 상징해 오층누각을 지었다. 오대산 중턱 사자암에서 동남쪽으로 바라보는 전경.


또 흰색 방위인 서쪽대의 장령산에는 무량수여래를 우두머리로 1만 명의 대세지보살이 항상 머무르고, 검은색 방위인 북쪽대의 상왕산에는 석가여래를 우두머리로 500명의 대아라한이 항상 머물렀다.



황색 방위가 차지하고 있는 중앙대의 풍로산은 지로산이라고도 한다.

이곳에는 비로자나를 우두머리로 1만 명의 문수보살이 항상 있었다.

진여원 터에는 문수보살이 매일 이른 아침이면 서른여섯 가지 형상으로 변화해 현신하니 두 태자가 함께 예배했다.

매일 아침 일찍 골짜기의 물을 길러 차를 달여 1만 명의 문수보살 진신에 공양했다.



정신왕의 태자이며 아우인 부군이 신라에서 왕위를 다투다가 죽임을 당하자 나라 사람들이 장군 네 명을 보냈다.

그들이 오대산으로 가서 효명태자 앞에서 만세를 부르니 즉시 오색구름이 오대산으로부터 신라의 서울까지 뻗쳐 7일 밤낮 동안 광명이 떠돌았다.



나라 사람들이 빛을 찾아 오대산으로 가서 두 태자를 모시고 서울로 돌아가려 했으나 보질도태자가 울면서 돌아가지 않으므로 효명태자를 모시고 서울로 돌아와 왕위에 오르게 했다.



왕위에 있은 지 10여 년인 신룡 원년(705) 3월8일에 진여원을 처음 세웠다.



보질도태자는 골짜기의 영험한 물을 항상 마시더니 육신이 허공으로 올라가 유사강에 도착하여 울진대국에 있는 장천굴에 들어가 도를 닦다가, 다시 오대산 신성굴에 돌아와 50년 동안이나 도를 닦았다.

오대산은 백두산의 큰 줄기로서 각 대에는 진신이 항상 머무르고 있다.







▲ 월정사 일대는 전나무 숲길이 유명하다. 곳곳에 뚫려있는 숲길의 모습.
▲ 월정사 일대는 전나무 숲길이 유명하다. 곳곳에 뚫려있는 숲길의 모습.


◆우통수와 장천굴



신문왕의 본처에게서 태어났던 보천태자는 외할아버지가 역적이 돼 죽음을 당하고, 어머니는 왕궁에서 쫓겨난 이후 태자에서도 폐위되고 험한 길을 걸어야 했다.

권력에 대한 허망함을 느끼고 밖으로 나돌다 오대산에 들어가 불법에 귀의해 버렸다.

보천태자가 수련하면서 마시고 부처에게 공양했던 물을 우통수라 부른다.

김시습의 시가 전한다.



▲생육신 김시습의 우통수

‘서산의 높은 봉우리 외롭게도 끊겼는데/ 우통의 물은 기운이 맑고 차네/ 상인은 병가지고 손수 차를 달이고/ 서방의 극락세계 부처님께 예배하네.’

‘우통의 정화수는 깨끗함이 옥 같은데/ 상서로운 향화는 바퀴같이 큼이라/ 희미한 여러 봉이 구름 속에 보이니/ 천녀가 옷깃 여미고 천신에게 공양하네.’



보천태자는 권력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완전히 불법에 귀의해 깨달음을 얻었다.

오대산에서 울진 장천굴까지 날아다니며 수양했다.



그 장천굴은 울진군 근남면 구산리에 있는 석회동굴이다.

지금은 총 연장 870m에 이르는 굴로 부처가 머물렀던 굴이어서 성류굴로 불리며 천연기념물 155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 월정사에서 상원사를 거쳐 사자암으로 가는 길은 두 갈레다. 계단길을 피해 흙길로 조성된 오솔길.
▲ 월정사에서 상원사를 거쳐 사자암으로 가는 길은 두 갈레다. 계단길을 피해 흙길로 조성된 오솔길.


◆새로 쓰는 삼국유사: 문무왕의 예언



일은 걱정하는 대로 흘러가는 경향이 있다.

문무왕의 걱정이 그랬다.

문무왕은 삼국통일을 완수하고도 백성들의 평화가 완벽하지 못하다는 것을 절절이 느꼈다.

적은 외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백성들의 평화를 위해 전쟁을 없애기로 마음먹고 전쟁터에서 죽을판 살판 칼을 휘둘렀던 문무왕이다.

나라의 안녕과 백성들의 평화를 위협하는 것은 왜구들뿐 아니라 권력을 향해 부질없이 욕심을 키우는 무리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감지한 때부터 문무왕의 걱정은 속으로 커져갔다.



문무왕은 왜구의 침략도 걱정이 되었지만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김흠돌 장군의 움직임에 불안을 떨치지 못했다.

병권의 3분의 1이나 거머쥐고 있는 김흠돌 장군이 모반의 뜻을 펼치기라도 하는 날이면 나라는 순식간에 피바다에 잠길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심증만으로 나라 일에 목숨을 바치는 척하는 장군을 감금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 사자암과 적멸보궁으로 오르는 계단길의 모습. 모두 1천700여 개 계단이다.
▲ 사자암과 적멸보궁으로 오르는 계단길의 모습. 모두 1천700여 개 계단이다.


이 때문에 문무왕은 죽음을 앞두고 “내가 죽으면 용이 되어 동해바다를 지킬 터이니 동해 앞바다에 장사지내라”고 유언하며 “왕좌는 한시라도 비워두면 나라가 어지러워질 수 있으니 내 관 앞에서 즉위식을 갖도록 하라”고 했다.



왕의 유지에 따라 정명은 아비의 주검 앞에서 왕관을 썼다.

그리고 화장해 동해 앞바다에 장례를 치렀다.

신문왕은 국상 중에 김흠돌이 난을 일으키는 정황을 포착하고 은밀하게 장군들에게 명하여 김흠돌 세력의 움직임을 샅샅이 파악해 조금이라도 이상한 징후가 보이면 바로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신문왕은 반란의 수괴 김흠돌 일당을 거사 하루 전에 모조리 잡아 들였다.

왕은 장인이지만 반란군의 우두머리인 김흠돌의 목을 가차없이 베었다.

반란군의 딸인 왕비도 폐비하고, 왕궁 밖으로 내쫓았다.

그러나 태자로 임명한 보천태자와 태자의 동생 효명왕자는 신문왕이 끔찍이 사랑해 곁에 뒀다.







▲ 신문왕의 아들 보천태자가 오대산에서 날아다니며 수련했던 장천굴. 지금은 부처, 성인이 머물렀던 곳이라 하여 성류굴로 부른다. 울진군이 석회동굴로 형성된 성류굴을 문화관광지로 조성했다.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 신문왕의 아들 보천태자가 오대산에서 날아다니며 수련했던 장천굴. 지금은 부처, 성인이 머물렀던 곳이라 하여 성류굴로 부른다. 울진군이 석회동굴로 형성된 성류굴을 문화관광지로 조성했다.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보천과 효명 형제는 어머니가 쫓겨나고 외할아버지가 처형당하는 모습을 보고 불안을 떨치지 못하고 나날이 맘을 졸였다.

그러던 중 신문왕이 김흠운의 여식을 왕비로 맞아들이고, 새 왕비가 아들을 낳자 형제의 불안은 더욱 커졌다.

새왕비의 친인척들이 왕실 중심세력으로 자리 잡으면서 태자 형제들에게 가하는 압박도 점차 수위가 높아지면서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드디어 신문왕은 왕비세력의 압력에 굴복해 보천태자를 폐하고, 세 살 난 왕비의 아들을 태자로 세웠다.

보천과 효명 형제는 스스로 외부군부에 나갈 것을 청했다.

왕은 못이기는 척 형제들을 가까운 성에서 근무할 수 있게 인사조서에 명을 내렸다.

두 형제는 군사훈련을 핑계로 강원도 지역을 순찰하던 중 군사들 모르게 오대산 깊은 곳으로 숨어버렸다.



형제는 왕권에 대한 욕심은 진작 버렸다.

아비인 신문왕이 수시로 형제를 불러 근황을 물으며 걱정하곤 했지만 왕비 측근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때문에 세상살이에 대한 미련도 진작부터 버리고 싶었다.

형제들은 권력에서 벗어나 마음이라도 편안한 삶을 살고 싶어 산으로 숨어들어 부처님에게 귀의하려 했던 것이다.







▲ 신라시대 보천태자가 수련했던 장천굴로 불렸던 울진 성류굴 내부 모습. 진흥왕이 다녀간 흔적이 종유석 벽에 글로 남아 있다.
▲ 신라시대 보천태자가 수련했던 장천굴로 불렸던 울진 성류굴 내부 모습. 진흥왕이 다녀간 흔적이 종유석 벽에 글로 남아 있다.


그러나 세상의 일은 자신의 마음대로 이뤄지는 것도 아니어서 어머니를 따르던 세력들이 암중에 힘을 키워 어린 효소왕의 세력이 내분을 일으켜 권력이 분산되는 기회를 틈타 왕권을 빼앗고, 효명태자를 왕으로 추대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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