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영천 삼휴정

발행일 2020-12-08 20:00:0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조선시대 선비들의 삶의 정수, 언택트 관광 각광

문중 묘역으로는 우리나라 으뜸, 오천정씨 묘역

‘선비정신’을 국어사전으로 찾아보면 ‘인격적 완성을 위해 끊임없이 학문과 덕성을 키우며, 세속적 이익보다 대의와 의리를 위해 목숨까지도 버리는 정신’이다.

조선 시대 이러한 선비정신을 꼿꼿이 지켜낸 삼휴(三休) 정호신 선생이 머물었던 정자가 영천에 있다.

사라져 가는 선비 정신의 근원을 찾아 영천댐으로 향했다. 드넓게 펼쳐진 들판을 지났다고 느끼는 순간 깊게 가라앉은 영천호수는 들이치듯 불쑥 나타났다.

영천호수를 어느새 발밑에 두고 길은 점점 높아져만 갔다. 굴곡진 채로 비스듬히 울창한 소나무 숲이 펼쳐진다. 겨울철 칼바람이 불어 왔지만, 창문을 내리고 영천호수의 정기와 소나무 숲의 향기를 마시고 싶어졌다.

괜스레 차창 너머로 헛기침을 내뱉는다. 어느새 어깨를 짓누르는 선비들의 기운에 맞서려는 스스로의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길을 굽이굽이 돌다 보면 어느새 노송들이 멋지게 늘어선 곳을 맞닥뜨린다. 고즈넉한 한옥들도 눈에 띈다. 등 뒤로 기륭산을 두고 양옆으로는 보현산 줄기가 이어진다. 그리고 눈앞에는 말 없는 영천호수가 자비로운 미소를 짓고 있다. 풍수지리를 모르는 사람이 봐도 이곳이 ‘명당’ 자리라는 것을 눈치 챌 만하다.

노송의 숲 좌측에는 물 마른 계곡을 사이에 두고 오래된 집들이 모여 있다. 영천댐 수몰지에 있었던 오천정씨(烏川鄭氏) 가문의 문화재 가옥들이다.

영천지역의 영일정씨(迎日鄭氏)를 오천정씨라 하는데, 호수(湖수) 정세아(鄭世雅)의 조부인 선무랑(宣撫郞) 정차근(鄭次謹)의 후손들을 말한다.

계곡을 따라 오르는 길 입구 둔덕에 ‘오천정씨하천세적지비’(烏川鄭氏夏泉世蹟之地)가 서 있다. 비에는 가문의 역사가 새겨져 있다. 비문에 따르면 정차근이 이곳에 들어온 이후 주자(朱子)의 서재인 자양서실(紫陽書室)의 이름을 따 학당을 자양이라 불렀고 그것이 현재 자양면의 유래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강호정을 시작으로 여섯 건물이 형제처럼 나란히 늘어섰다. 강호정은 정호신의 할아버지이며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큰 공을 세운 정세아 선생이 세운 정자이다. 강호정만 남향이고, 나머지 건물은 모두 동향이다. 길 곳곳에 심겨 있는 향나무들이 근사하다. 삼휴정은 여섯 채 중 가장 깊숙한 곳에 있다.

◆한밤의 절경을 바라보며 ‘삼휴’를 논하다

삼휴정은 1975년 8월18일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75호로 지정됐다. 1635년(인조 13년)에 조선 시대 선비였던 정호신이 학업을 위해 지었다고 한다.

정호신은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과거에 응시해 여러 번 낙방하자 할아버지의 고향인 영천으로 돌아와 평생 독서에만 매진했다.

정호신은 자양동에 정자를 지어 삼휴정이라 이름 짓고 시를 지으며 소요하고 자적했다.

벼슬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해 날이 갈수록 가난해졌다. 결국 45세에 사망했다. 저서로는 ‘삼휴일고’가 전해진다.

정호신은 달이 가득 찬 어느 날 정자에 올라 그 절경을 바라보며 ‘삼휴’라는 시를 지었다. 이에 ‘삼휴당’이라는 당호가 생겼다.

‘좋은 봄날 꽃을 즐기다가 꽃이 지면 쉬고

맑게 갠 밤 달을 마주 보다 달이 지면 쉬고

한가한 달에 술을 얻어 마시다가 술이 떨어지면 쉬노라.’

그는 글을 짓고 해석하기를 ‘꽃이 있으니 완상(즐겨 구경)하고 달이 있으니 즐긴다. 술이 있으니 마심은 한가한 가운데 움직임이요, 꽃이 지면 쉬고 달이 기울면 쉬고, 술이 떨어지면 쉼은 한가한 가운데 고요함이다. 움직임은 능히 언제나 움직이면서 고요하지 못하고, 고요함은 능히 고요하면서 움직이지 못함은, 그 움직임과 고요함이 서로를 길러 주는 공부를 마음속으로 깊이 납득하고 실체를 궁행(몸소 실행)하는 까닭이다’라 했다.

겉은 궁핍했어도 마음은 항상 풍요롭던 조선 시대 선비들의 풍류를 능히 짐작할 만하다.

삼휴정에는 가난했지만, 지조를 잃지 않았던 정호신의 마음가짐이 곳곳에 묻어 있다. 이 좁은 공간에서도 조선 시대 선비들의 삶의 정수를 느껴 볼 수 있다. 10평가량의 작은 마당은 아담하지만 초라하지 않다.

건물은 팔작지붕으로 꾸며졌으며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규모이다. 다락집으로 건물의 전면에만 난간이 있으며, 기둥 가운데 다섯 개만 원주이고 나머지는 육축(기초가 되는 돌) 위에 초석을 놓고 평주(평 기둥)처럼 세워져 있다.

평면은 중앙에 2칸이 대청으로 꾸며져 있고 좌우 2칸에 반 칸의 전퇴(집채의 앞쪽에 다른 기둥을 세워 만든 조그마한 칸살)를 두고 각각 1칸 반 크기의 방을 배치했다.

삼휴정 정자에 올라서 정면을 바라보면 숲이 울창하고 계곡물이 흐르며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어서 마을의 고즈넉한 정취를 느껴 볼 수 있다. 삼휴정 앞으로 울창하게 우겨져 있는 소나무 숲 사이로 하얀 석물들과 봉분들이 보인다. 아마 오천정씨 문중의 묘소이리라. 문중 묘소 앞에서 책을 읽어보는 것도 기묘한 경험일 것이다.

4평 남짓한 누마루는 선비들이 삼삼오오 모여 마음 수양과 사교활동을 하던 공간이었을 것이다. 담소를 나누며 아름다운 바깥 풍광을 바라보면 절로 멋들어진 시 한 편이 완성되었으리라.

현재 삼휴정은 산등성이 끝자락에 있어 주변의 풍광이 그다지 볼 것이 없지만, 과거에는 자리를 깔고 밤에 누웠더니 8시간 동안 달구경을 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위치에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 옛 정취를 감상할 수 없어 아쉬울 따름이다.

자연 속에서 자연을 즐기며, 명상에 잠기고, 또 수양하는 요체로 삼은 선현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삼가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었다.

◆풍수지리 1번지, 잘되는 집안은 이유가 있다

삼휴정에서 벗어나 드리워진 베일을 걷듯 소나무 숲을 헤치고 들어가면 저편에서는 감히 가늠치 못했던 푸른 땅이 펼쳐진다. 이곳은 과거 설학대사라는 노승이 정차근의 아들인 효자 정윤량에게 점지해 주었다는 명당으로 오천정씨 문중에서 대대로 묘소를 쓰는 곳이다.

정차근과 정세아의 묘 등 80여 기의 묘소가 모여 있는 이곳을 하천묘역이라고 하며 후손들로 이루어진 하천종약회가 이 일대를 관리한다.

이곳 어딘가에 정호신 선생의 묘도 있으리라. 주인도 알지 못하는 무덤 앞에서 나는 홀로 정호신 선생의 선비 정신을 기리며 잠시 묵념을 했다.

이곳은 문중 묘역 자리로는 대한민국 1등 자리라는 소문이 장안에 자자하다. 풍수지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곳을 필수로 와야 한다는 말이 나돌 정도다. 지금도 오천정씨 후손들이 우리나라 정·재·학계에서 꽤 콧방귀를 뀔 수 있는 것은 묫자리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조선 시대 오천정씨는 굵직한 실적은 없지만 모두 벼슬길을 놓지는 않았다. 큰 욕심 없이 학문에 전념하는 선비들의 참모습일지도 모른다. 대신 학계에서의 오천정씨의 존재감은 남다르다. 오천정씨 일가는 현재 영천의 학계를 주름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00년대 초반 영천 학문의 르네상스를 만들었다는 정석달 선생과, 정마양 선생, 정규양 선생 등이 모두 오천정씨의 자랑거리이다. 국회의원을 지냈던 정동윤씨와 ‘해상왕’이라고 불렸던 천일해운 정연통 전 회장도 모두 잘나신 조상의 공덕을 입었을 것이다.

문중 묘역 외에도 이곳은 멋들어지게 펼쳐진 소나무 숲 덕분에 영천댐 인근 캠핑 명소로도 알려져 있다. 언택트 관광이 유행인 지금 겨울철을 제외한 봄·여름·가을에는 캠핑족들이 몰려든다고 한다.

현대의 가치관은 조선 시대의 가치 덕목들을 하나같이 평가 절하한다.

명분은 핑계로, 의리는 철없는 남자들의 아집으로, 선비의 기개를 뜻하는 사기(士氣)는 군대용어로 전락했다. 소비가 미덕이 되고 청빈(淸貧)은 낡아빠진 구시대의 덕목으로 조소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동기나 과정보다는 결과만 중요시하는 결과 만능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현대사회는 물질적인 풍요를 가져왔지만, 적잖은 부작용을 불러왔다. 자연과 전통이 파괴되고, 가족이 해체됐다. 그 결과 사람들은 만성적인 스트레스와 불안에 시달리고 있으며,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만, 정신적으로는 황폐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조선 시대의 선비처럼 자연과 학문을 벗하며 유유자적 살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 정신만큼은 되새길 만하다. 자연을 사랑하며, 정신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겼던 선비 정신 말이다.

코로나19는 대다수 시민에게 큰 아픔을 줬다. 하루하루를 감염병 공포에 불안해하며 우울증을 호소한다.

선비 정신의 현대적 부활은 시민들의 정신건강을 지킬 수 있는 또 다른 해결책이다. 코로나19를 극복하는 정신적 심리적인 치료제이자 백신이기도 하다.

자연을 찾아 떠나자. 그리고 조상들의 지혜를 온몸으로 느껴 보자. 삼휴정에서 선비 정신을 곱씹으며 마치 선비가 된 양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자. 코로나19로 인한 불안과 공포도 어느새 멀찍이 달아나 있을 것이다.

이승엽 기자 sylee@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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