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 (89) 천룡사

발행일 2020-11-23 10:44:03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당나라 사신 악붕구 “천룡사가 무너지면 나라가 멸망할 것” 예언

천룡사 삼층석탑의 모습. 보물 제1188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천룡사는 남산의 남쪽 가장 높은 봉우리 고위산 아래 위치해 있고, 삼층석탑은 1990년 경주 동국대학교에서 발굴 조사하고, 정비 복원했다.


경주 남산 중턱에 위치한 천룡사는 창설에서부터 부처의 공덕까지 다양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 신라 유명사찰이다.

최근 사찰터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천룡사라는 글이 적힌 기와조각이 발견돼 천룡사의 존재는 분명하게 확인됐다.

또 천룡사 터에 보물로 지정된 삼층석탑을 복원하고, 주변에 흩어져 있는 석탑과 건축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당시 석재들을 많이 모아두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석재들이 절터 주변에 많이 흩어져 있다.

특히 대형 석조는 발굴되었지만 절터 마당 한구석 땅속에 묻혀있어 아는 사람의 설명이 없으면 찾아볼 수도 없다.

신라시대 당나라의 장수 악붕구가 사신으로 왔다가 천룡사가 무너지면 신라는 며칠 내로 멸망에 이를 것이라고 예언할 정도로 천룡사는 대내외적으로 무게감이 컸던 중요 사찰로 전해진다.

그렇지만 아직 석탑 복원 이외에는 이렇다 할 정비복원사업이 진행되지 않을 뿐 아니라 계획조차 수립되지 않고 있어 사학자들의 안타까워하는 목소리만 메아리로 울리고 있다.

천룡사 터는 발굴했지만 사역이 넓어 아직 발굴하지 못한 부분이 많다. 천룡사 삼층석탑 서북쪽으로 개발을 위해 문화재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1990년 발굴조사 이후 30년 만에 일부 추가 발굴조사가 진행되는 것이다.


◆삼국유사: 천룡사

경주의 남산 남쪽에 봉우리 하나가 우뚝 솟아 있는데 세상에서는 고위산이라 한다. 산의 남쪽에 절이 있는데 세속에서는 고사 또는 천룡사라고 한다.

토론삼한집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계림 땅 안에는 딴 곳에서 발원해 흘러들어온 강물이 두 줄기가 있고 거슬러 오르는 강물 한 줄기가 있다. 그 역수와 객수의 두 근원이 하늘의 재앙을 진압하지 못하면 천룡사가 뒤집혀 무너져 앉는 재앙이 있게 되리라.’

또 세속에는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역수란 것은 고을의 남쪽 마등오촌의 남쪽을 흐르는 시내가 바로 이것이다. 또 이 물의 근원이 천룡사로 돼 있다.’

중국의 사신 악붕구가 와서 보고 말하기를 “이 절이 파괴되면 며칠 못 가서 나라가 망할 것이다”라 했다.

1990년 동국대학교가 발굴조사를 벌이면서 일대에서 발견된 다양한 석재를 삼층석탑 옆에 모아두고 있다.


또 다음과 같이 서로 전하는 말이 있다.

옛날에 한 신자의 집에 천녀와 용녀라는 두 딸이 있었다.

부모가 두 딸을 위해서 절을 지으니 절의 이름은 여기서 연유한다.

천룡사는 경내가 신이해 불도의 성취를 돕는 곳인데 신라 말에 피폐해 허물어진 지 오래됐다.

중생사의 관음보살이 젖을 먹여 기른 최은함의 아들이 승로인데 승로가 숙을 낳고, 숙이 시중 제안을 낳았다.

제안이 바로 허물어진 절을 중수하여 일으켰다.

그리고 석가만일 도량을 설치해 조정의 뜻을 받아들였다. 겸해 그의 기록과 발원문을 절에 남겨 두었다.

그는 죽어서 절을 지키는 신이 되어 자못 신령스럽고 신이한 일들을 많이 나타내었다.

절에 남긴 기록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천룡사지 주변에는 지금도 수시로 발견되는 석재들이 많다. 천룡사지 삼층석탑 주변에 석재들이 흩어진 모습.


단월 내사시랑 동 내사문화평장사 주국 최제안이 글을 쓴다.

경주 고위산 천룡사가 피폐하여 허물어진 지 여러 해가 되었다.

제자가 특별히 임금님의 만수무강과 백성과 나라가 평안하고 태평하기를 발원해서 불전, 불당, 회랑, 전각, 방, 숙소, 주방, 창고 등의 공사를 일으켜 다 마쳤다.

돌과 흙으로 빚어 여러 구의 부처를 만들고 석가만일도량을 개설했다. 이미 나라를 위해 중수했으니 관청에서 주지를 임명하는 것도 좋으나 사람이 갈려 교대를 할 때에는 도량의 승려들이 안심할 수가 없다.

곁에서 보건대 시주받은 전답으로 절의 경비를 충족한 것을 보면, 팔공산의 지장사 같은 곳은 들어온 전답이 200결이고, 비슬산 도선사는 들어온 전답이 20결이며, 서경의 사면에 있는 산사들도 각각 20결씩이다.

이들 절에서는 모두 직책이 있고 없음을 막론하고 반드시 계율을 갖추고 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뽑아서 절에서 여러 사람이 원하는 것에 따라서 여러 차례 주지를 시켜 분향의 예를 올리고 수도하는 것을 변하지 않는 규칙으로 삼았다.

제자는 이 풍습을 듣고 기뻐해 우리 천룡사도 역시 절의 여러 스님 중에서 재주와 덕망이 함께 뛰어난 큰스님으로 기둥이 될 만한 사람을 뽑아 주지로 임명해 길이 분향 수도하려 한다.

문자로 자세히 기록해 행사 책임자에게 맡기니 이번 주지부터 시행할 것이며, 유수관이 문서를 받아 도량의 여러 스님에게 보일 것이니 각자 자세히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중희 9년(1040) 6월 관직을 갖추어 앞의 것과 같이 서명했다.

살펴보면 중희는 곧 거란 홍종의 연호이니, 고려 정종 6년 경진(1040)이다.

천룡사에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대형수조가 발견됐지만 절터 구석부분에 방치되고 있다. 문화재로 지정 관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천룡사의 붕괴

천룡사는 신라시대 남산 중허리 한적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누가 언제 무엇을 위해 창건했는지 인근 지역 주민들도 절의 내력을 모른다. 더욱 신비스런 것은 주지스님의 행적이다.

천룡사의 주지스님은 분위기부터 묘하다. 남산에서 자생하는 나무, 갈대 등의 초목 껍질을 벗겨 얼기설기 기워서 만든 옷으로 사시사철 장삼으로 걸치고 다닌다. 그가 쓰는 모자는 24시간 머리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마치 풀잎처럼 머리 위를 덮고 있어 산속을 거닐 때면 그를 찾기가 쉽지 않다. 그의 행동이 자연의 일부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의 얼굴은 눈과 코를 제외하고 수염이 뒤덮어 가슴까지 드리워져 있다. 염불을 외거나 밥을 먹을 때도 그의 입술은 수염에 가려 볼 수 없다. 그는 밥 먹을 때와 염불할 때 외에는 좀체 입을 열지 않는다.

천룡사지를 발굴하면서 기와에서 천룡사라는 글이 새겨진 조각이 발견됐다. 지금도 일대에서는 기와조각들이 많이 있다.


입이 무거워 묵언스님으로도 불리며, 고위산 아래 홀로 다닌다 해 고독스님으로 통한다. 절을 찾는 신도들은 편한대로 묵언, 고독스님 등 그때그때 부르는 사람마다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른다. 스님은 호칭에 대해서도 일절 토를 달지 않는다.

스님의 나이도 모른다.

언제부터 천룡사에 주석하고 있는지조차 인근 마을의 주민들도 모른다.

일설에는 스님의 나이는 백살이 훨씬 넘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고독스님은 가끔씩 엉뚱한 예지력을 발휘해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 때문에 현실이 답답하거나, 큰 사업을 하기 전에 충고를 얻기 위해 천룡사를 찾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나면서 법당은 신도들보다 찾아오는 손님들로 늘 북적거렸다.

천룡사에 신도와 방문객들이 늘어나기 전에는 아무도 찾지 않는 법당에 스님이 혼자 부처님 앞에서 염불만 하고 탁발을 하지 않았다.

찾아와 시주하는 이도 없고, 스님이 농사도 짓지 않았으나 쌀독에는 늘 쌀이 가득했다.

현재 천룡사지 삼층석탑 남쪽 50여m 지점에 석등대좌로 보이는 귀부의 모습.


또 마당 한가운데 놓인 큰 석조에는 샘을 파지 않아도 항상 깨끗한 물이 찰방찰방 넘치도록 가득했다.

아무리 많은 손님들이 퍼마셔도 석조의 물은 항상 넘쳐흘렀다. 어떤 이는 생명수라고 하며 매일 석조의 물을 퍼마시고 떠갔다.

나라에 변고가 생길 때면 천룡사에서 먼저 이상 징후가 나타났다.

문무왕이 죽기 전날 천룡사 불상이 소리 내어 울며 눈물을 흘려 법당이 흥건했다.

또 원성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천룡사 삼층석탑이 와글와글 소리 내며 흔들리다가 3층 이상의 모든 석재가 무너져내렸다.

이러한 변고는 주지스님 뿐 아니라 천룡사를 찾아왔던 신도들과 방문객들이 함께 경험하고, 지켜보았기 때문에 순식간에 고을마다 소문이 번져 복을 빌기 위해 찾는 발길이 물밀 듯 밀려들었다.

천룡사의 신비스런 사실들이 전해지면서 나라에서도 절을 경영하는데 필요한 쌀을 비롯한 모든 경비를 지원하면서 왕실의 복운과 나라의 평화를 기원하도록 했다.

또 왕은 고독스님을 국사로 초빙했지만 응하지 않고 오직 천룡사에서만 불법을 강의했다.

천룡사지 서남쪽 300m 지점 계곡에 신라시대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자연석으로 축성된 산성터.


신라 55대 경애왕이 즉위할 즈음을 전후해 천룡사는 수시로 천둥소리를 내며 울었다.

나라에 큰일이 벌어질 것을 걱정해 짐을 싸 피난 갈 준비를 하는 백성들이 생길 정도였다. 이러한 소문은 왕실에도 전해졌지만 경애왕은 귓등으로 듣고 별다른 대책을 강구하지 않았다.

후백제 견훤이 군사들을 이끌고 영천지역까지 내려와 주둔할 때, 신라왕경으로 공격을 개시하기 정확하게 3일 전, 천룡사는 천둥치는 소리로 크게 울다가 기둥이 하나도 남지 않고 폭삭 쓰러져 붕괴됐다.

신비스런 것은 마을사람들과 신도, 방문객들이 무너진 금당을 정비하는데 불상도 없고, 묵언스님도 흔적없이 사라지고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이후 어디에서도 묵언스님을 본 사람은 없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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