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 (87) 낙산의 두 성인과 조신

발행일 2020-11-09 10:40:46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의상은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보주를 얻어 낙산사 창건



의상대사가 중국에서 돌아와 관음보살 진신을 친견하고 보주를 얻어 낙산사를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관음보살이 머물렀던 곳에 지어진 홍련암의 모습. 2005년 낙산사 전체가 불에 탔으나 홍련암만 무사했다.


삼국유사는 낙산사에서 의상법사와 원효법사가 관음보살 진신을 만나는 과정을 대비해 그리고 있다.

의상법사는 관음을 친견하고 낙산사를 창건하는 고승으로 그려진다. 원효는 시골 아낙으로 변신한 관음보살을 만났지만 여염집 여인으로 변신한 진신을 알아보지 못한 승려로 표현했다.

혜공과의 만남에서도 원효는 깨우침이 부족한 승려로 소개된다.

일연 스님은 원효의 길을 소개하면서 많은 업적을 기리기도 했지만 의상이나 혜공 등의 고승에 비해 법력과 깨우침의 정도가 낮은 수준으로 기록했다.

의상과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는 길도 두 번이나 시도했지만 중도에서 포기하는 것으로 소개된다.

의상은 유학의 길을 떠났지만 원효는 해골바가지의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어 돌아왔다고 기록해 지금까지 ‘일체유심조’라는 원효의 깨우침을 한마디로 줄여 전한다.

평범한 원효의 출신 배경 때문인지 아니면 사실에 근거한 위인의 소개인지 꼼꼼히 살펴보면 어딘지 모르게 원효에 대한 평가는 비교 절하돼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낙산사 창건과 성인들의 일화를 살펴본다.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와 관음굴 앞에서 7일간이나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관음굴이 있었던 곳에 지어진 홍련암이 바라보이는 정자 의상대.


◆삼국유사: 낙산 두 성인 관음과 정취 그리고 조신

옛날 의상법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와 관음보살의 진신이 해변의 굴속에 머무르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의상이 7일간 재계하고 앉았던 자리를 새벽에 물에 띄웠더니 용천팔부의 시종들이 굴 안으로 인도해 들어갔다.

굴속에서 하늘에 예를 올리자 수정염주 한 꾸러미를 내주므로 의상이 그것을 받아 나오니 동해의 용이 또한 여의보주 한 알을 바쳤다.

의상이 받들고 나와 다시 재계한 지 7일 만에 바로 진신의 모습을 친견하자, 관음보살이 말하기를 “내가 앉은 산꼭대기에 한 쌍의 대나무가 솟을 것인즉 마땅히 그곳에 불전을 지어야 할 것이다”라 했다.

의상이 이 말을 듣고 굴을 나오자 과연 대나무가 땅으로부터 솟아났다.

바로 금당을 짓고 관음상을 만들어 모시니 원만한 얼굴과 수려한 모습이 엄연하여 마치 하늘에서 만들어 낸 듯하였다.

이 때문에 절 이름을 낙산사라 했다. 의상법사는 받은 두 구슬을 성전에 모셔두고 떠났다.

낙산사로 들어가는 입구에 무지개 모양의 석축다리에 누각이 있는 홍예문.


그 후에 원효법사가 의상의 뒤를 이어 와서 예를 올리고자 했다.

처음 남쪽 교외에 왔을 때는 논 가운데에 흰옷을 입은 여인이 벼를 베고 있었다.

법사가 농담 삼아 벼를 달라고 하자 여인도 장난삼아 벼가 잘 영글지 않았다고 답했다.

다시 다리 밑에 왔더니 어떤 여인이 월경 수건을 세탁하고 있었다.

법사가 물을 달라고 하자 여인은 더러운 물을 떠서 그에게 바쳤다.

법사가 그 물을 엎질러버리고 다시 냇물을 떠서 마셨다. 이때 들 가운데 선 소나무 위에서 파랑새가 말하기를 “휴제호 화상” 하고는 모습을 감춰버렸다.

그 소나무 밑에는 신 한 짝이 벗겨져 있었다.

법사가 절에 도착했더니 관음보살 자리 밑에 또 앞에서 본 신 한 짝이 있었다.

그제야 전에 만났던 여인이 관음의 진신임을 알았다.

법사가 굴에 들어가 관음의 진신 모습을 보려했으나 풍랑이 크게 일어나 들어가지 못하고 떠났다.

그 후에 굴산조사 범일이 태화연간(827~835)에 당나라로 들어가 명주 개국사에 갔더니 왼쪽 귀가 떨어진 나이 어린 승려가 여러 승려들의 끝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가 굴산조사에게 말하기를 “저 역시 신라 사람으로 집은 명주 지역인 익령현 덕기방에 있습니다. 조사께서 후일 본국으로 돌아가시거든 반드시 저의 집을 지어주소서”라 했다.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이 대나무 한쌍이 솟는 곳에 법당을 지으라는 말을 듣고 지은 절이 낙산사다. 당시 절을 지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에 원통보전과 칠층석탑이 있다.


이러고 나서 조사는 큰 설법하는 곳을 두루 유람하다가 염관에게 불법을 받고 회창 7년 정묘(847)에 본국으로 돌아오자 먼저 굴산사를 창건하고 불교를 전파했다.

대중 12년 무인(858) 2월15일 밤 꿈에 전에 보았던 어린 승려가 창 아래에 와서 “옛날 명주 개국사에서 스님과 약속하여 이미 승낙까지 받았는데 어찌 그리 지체하십니까?”라 말했다.

조사가 놀라 꿈에서 깨어나 수십 명을 데리고 익령 지역에 도착하여 그의 거처를 찾았다.

낙산 아랫마을에 덕기라는 여자에게는 여덟 살 된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항상 마을 남쪽의 돌다리 주변에 나가 놀았다.

그의 아들이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나하고 같이 노는 아이 가운데 금빛 나는 아이가 있습니다”라 했다.

그의 어머니가 이를 조사에게 알리자 조사가 놀라고 기뻐하며 그 아이와 함께 놀았다던 다리 밑에까지 가서 찾아보니 물속에 돌부처 하나가 있어서 그것을 꺼냈다.

왼쪽 귀가 떨어진 것이 전에 보았던 나이 어린 승려와 같았다.

이에 간자를 만들어 절 지을 곳을 점쳐보니 낙산 위가 좋다고 나왔다. 이에 불전 세 칸을 짓고 그 불상을 모셨다.

그 후 100여 년이 지나 들에 불이 나 이 산까지 번져왔으나 오직 두 성인을 모신 전각만이 화재를 면하고 나머지는 모두 타버렸다.

몽고의 침략 이후 계축(1253), 갑인(1254) 연간에 두 성인의 진용과 두 보주를 양주성으로 옮겼다.

보물 제479호로 지정되었던 낙산사 동종은 2005년 화재로 녹아내려 보물 지정이 해제됐다. 그 자리에 새로 동종을 주조해 달았다.


몽고 군사가 침공해와서 성이 함락되려 하자 주지인 선사 아행이 은으로 된 합에 두 보주를 담아서 몸에 지니고 도망치려하자 이름이 걸승인 절의 종이 이것을 빼앗아 땅속 깊이 묻고 발원하기를 “내가 만일 병란에서 죽음을 면치 못한다면 두 보주는 끝내 인간 세상에 나타나지 않아 이것을 아는 자가 없을 것이고 만약 내가 죽지 않는다면 마땅히 두 보주를 받들어 나라에 바칠 것이다”라 했다.

무오년(1258) 11월이 돼 불교의 장로인 기림사의 주지 대선사 각유가 임금께 말씀드리기를 “낙산사의 두 보주는 나라의 신성한 보물로 양주성이 함락될 때 절의 종 걸승이 성안에 묻었다가 적병이 물러간 뒤 파내어 감창사에게 바쳐서 명주 관아의 창고에 있습니다. 지금 명주성이 위태로워 지킬 수 없으니 마땅히 대궐로 옮겨두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 했다.

임금이 허락하여 야별초 10인을 보내어 걸승을 데리고 명주성에서 찾아 대궐 안에 안치했다.

그 당시 심부름하던 관원 열 명에게 각각 은 한 근과 쌀 다섯 섬을 줬다.

옛날 신라(서라벌)가 서울이었을 때 세규사(지금의 흥교사) 농장의 막사가 명주 날리군에 있었는데 본사에서 승려 조신을 보내어 농장을 관리하도록 했다.

조신이 장원에 올라왔는데 태수 김혼공의 딸을 좋아하게 되어 깊이 미혹됐다.

그는 여러 번 낙산사 관음보살 앞으로 나아가 그녀를 얻을 수 있도록 남몰래 빌었다.

이로부터 수년 사이에 그 여인에게 그만 배필이 생겼다.

그는 또 불당에 가서 관음보살이 자기의 뜻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원망하며 날이 저물도록 슬피 울다가 그리운 정에 지쳐서 잠시 졸았다.

낙산사 원통보전에서 해수관음상으로 가는 꿈이 이루어지는 길이 시작되는 원통문.


갑자기 꿈에 김흔공의 딸이 기쁜 얼굴로 “저는 언젠가 스님을 잠깐 뵙고 마음속으로 사랑하며 잠시라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부모님의 명령을 어기지 못하고 억지로 다른 사람에게 시집갔습니다만, 이제 부부가 되고자 이렇게 왔습니다”라 말했다.

이에 조신이 기뻐 어쩔 줄 모르며 그녀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녀와 40여 년을 같이 살며 자식 다섯을 두었으나 집은 단지 네벽뿐이며 명이주 국이나 콩잎도 넉넉지 못했다.

마침내 완전히 망해 사방으로 다니며 입에 풀칠을 할 뿐이었다.

이렇게 10년 동안 초야를 두루 헤매니 갈가리 찢어진 옷은 몸뚱이조차 가리지 못했다.

부인이 눈물을 흘리며 “50년 동안에 맺어진 정은 끊을 수 없고 은혜와 사랑은 한없이 깊어 참으로 두터운 인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추우면 버리고 따뜻하면 따르는 것은 인정상 차마 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헤어지고 만나는 것도 정해져 있으니 청컨대 여기서 헤어집시다”라 했다.

조신이 이를 듣고 매우 기뻐하며 각각 아이 둘씩을 나누어 헤어지려 하는데 여자가 말하기를 “나는 고향으로 가겠으니 당신은 남쪽으로 가오”라고 했다.

바야흐로 작별하고 떠나려 하는데 꿈을 깼다.

타다 남은 등불은 가물거리고 밤도 새려고 했다.

아침이 되니 수염과 머리털은 모두 하얗게 세었다.

정신이 멍하니 인간 세상에 뜻이 없어지고 이미 괴롭게 살아가는 것도 싫어졌다.

마치 한평생의 괴로움을 다 겪고 난 것과 같아 재물을 탐하는 마음도 얼음이 녹듯이 깨끗이 없어졌다.

보물 제479호로 지정 관리되던 낙산사 동종. 2005년 화재로 녹아버린 모습 그대로 낙산사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의상이 못다한 불사를 이은 원효

의상이 중국 유학길에서 신라로 돌아와 문무왕에게 당나라 대군이 침략해 올 것이라는 정보를 전하며 대책을 강구해야 할 것이라 했다.

이어 나라의 힘을 든든하게 해줄 부처님의 진신이 강릉 해안의 굴에 있다는 말을 듣고 발길을 재촉했다.

의상이 강릉 관음굴 앞에서 7주야를 기도하며 관음보살 진신을 보기를 청했다.

7주야의 기도가 끝나는 날 아침 의상대사가 앉은 자리가 그대로 둥둥 떠올라 관음굴로 들어갔다.

의상은 관음보살 진신을 만나 보주를 얻었다.

다시 나오는 길에 용왕의 보주를 하나 더 얻었다. 관음진신이 가르쳐 준 곳에 절을 창건해 낙산사라 이름을 지었다.

의상은 다음해 바로 영주로 올라가 백성들의 뜻을 하나로 결집하기 위한 부석사를 창건했다.

이때 의상이 동문수학하던 사형 원효에게 부탁의 편지를 보냈다.

“제 기도가 부족해 관음진신과 용왕이 주신 보주를 함께 모시지 못해 절에 이변이 자꾸 일어난다”며 “두 보주를 제자리에 모실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내용이었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된 원통보전을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 세조가 낙산사를 중창하면서 쌓은 돌담.


분황사에 머물고 있던 원효는 한걸음에 낙산사로 날아왔다.

낙산사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의 일이 뒤죽박죽으로 꼬이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이었다.

원효가 법당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3일을 기도하고 난 다음 “법당 앞에 7층석탑 두 기를 동서로 마주보게 세우고 보주를 각각 탑에 따로 안치하라”고 주문했다.

그 이후 낙산사에서 진심을 담아 기도한 사람들의 소원은 틀림없이 이뤄졌다. 원효가 머무는 곳을 찾아 신도들의 발길도 따라 움직였다. 이 때문에 낙산사와 분황사는 소원을 비는 백성들로 늘 복잡하게 붐볐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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