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싸움/ 황인동

발행일 2020-10-26 16:00:0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자 봐라!// 수놈이면 뭐니 뭐니 해도 힘인 기라/ 돈이니 명예니 해도 힘이 제일인 기라/ 허벅지에 불끈거리는 힘 좀 봐라/ 뿔따구에 확 치솟는 수놈의 힘 좀 봐라/ 소싸움은/ 잔머리 대결이 아니라/ 오래 되새김질한 질긴 힘인 기라/ 봐라, 저 싸움에 도취되어 출렁이는 파도들!/ 저 싸움 어디에 비겁함이 묻었느냐/ 저 싸움 어디에 학연지연이 있느냐/ 뿔따구가 확 치솟을 땐/ 나도 불의와 한 판 붙고 싶다

「대구문협대표작선집1」 (대구문인협회, 2013)

소싸움은 싸움소끼리 다투는 힘겨루기다. 관중이 보는 가운데 훈련된 싸움소끼리 싸움을 붙여 승부를 겨루는 전통 민속놀이다. 사람이 소와 싸우는 투우와는 결이 다르다. 싸움에서 이긴 소는 몸값이 오르고 소 주인은 상금을 받는다. 관중은 돈을 걸고 도박을 하는 경우가 많다. 소싸움을 민속놀이라 하지만 흰옷을 입고 가무를 즐기며 농경생활을 했던 우리 민족이 온순한 초식동물인 소를 서로 싸우게 하고 이를 즐겼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소는 농가의 재산목록 1호로 꼽힐 정도로 소중한 재산일 뿐만 아니라 농사일에 없어선 안 될 필수불가결한 가축이었다. 소가 출산을 하면 집안의 큰 경사였다. 소는 성질이 유순하여 힘없는 애를 공격하는 사고가 일어나지 않고 소를 풀밭에 함께 풀어놓아도 서로 싸우는 일이 거의 없다. 매미채를 만들기 위해 꼬리에서 털을 뽑아가도 눈만 끔벅일 뿐 아픔을 참아주는 착한 친구다. 소 돌보는 일은 애라고 해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그래선지 소 풀 먹이는 일은 시골 농가의 어린이에게 보편적인 일과로 통했다. 소싸움이 널리 행해지지 않은 것은 당연한 귀결일 수 있고 어쩌면 그 존재 자체만으로 의외의 민속일 수 있는 까닭이다.

싸움의 승패를 좌우하는 건 힘이다. 자연 상태에서 만물은 힘에 의해 서열과 질서가 정해진다. 권력이나 명예 또는 금전으로 힘을 얻는 것이 아니라 힘으로 권력이나 명예 또는 금전을 획득한다. 힘의 원천이 시대에 따라 변천하여 왔지만 힘은 약육강식의 세계를 정리하는 기준으로 변함이 없다. 신체의 완력에서 머리의 지식으로 끊임없이 그 원천이 진화하긴 했지만 힘은 남보다 더 많은 욕망을 얻는 정당한 근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소싸움은 인류의 원시적 풍경을 재현한다. 불끈거리는 허벅지 근육과 확 치받는 뿔따구는 단순하고 화끈한 힘의 속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발가벗고 산야를 누비며 사냥을 하던 까마득한 원시의 추억이 손짓한다. 싸움은 잔머리나 꼼수가 아니라 정당한 대결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일깨워준다. 꾸준히 단련된 근육에서 나오는 힘만이 싸움을 승리로 이끈다는 사실에 매료된다. 소싸움은 힘이 무엇이며 또 어떠해야 하는지를 웅변하고 있다. 출렁이는 파도처럼 열광하고 흥분할 따름이다.

소싸움엔 인간의 속임수나 비겁함 따윈 없다. 격렬한 승부에 출신이나 성분이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다. 주인의 지위에 흔들리지 않고 뇌물도 통하지 않는다. 상금을 두고 거래를 하거나 협상을 벌이지도 않는다. 몸과 몸, 뿔과 뿔을 부딪치며 정직하게 힘만으로 자웅을 겨룰 뿐이다. 솔직담백하고 정정당당한 힘의 경연이 소싸움의 매력 포인트다. 인간의 약삭빠른 삶 속에서 찾아보기 힘든 원초적 투쟁모습이 꽉 막힌 답답한 가슴을 확 뚫어주는 것이다. 스트레스를 말끔히 날려 보내고 카타르시스를 맛볼 기회를 제공한다. ‘뿔따구가 확 치솟을 땐 나도 불의와 한 판 붙고 싶다.’

오철환(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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