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국이었다”

발행일 2020-07-16 15:37:2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작가 윤흥길이 1983년 출간한 소설 ‘완장’에는 시골 마을 양어장 관리인인 종술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적은 급료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하지만 그는 그 일에 남다른 자부심이 있다. 바로 그가 찬 완장 때문이다. 양어장을 찾은 사람들에게 생트집을 잡아 주먹을 휘둘러도 뒤탈이 없자 그는 그게 다 완장의 위력이라며 그 서푼어치 권력에 푹 빠진다. 아주 예전에 읽은 이 소설을 떠올리게 한 건 최근 일어난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팀 사건이다.

고 최숙현 선수의 동료였던 현역선수 2명이 지난 6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그동안 보복이 두려웠던 피해자로서 억울하고 외로웠던 숙현이의 진실을 밝히고자 이 자리에 섰다.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팀은 감독과 특정선수만의 왕국이었다. 폐쇄적이고 은밀하게 상습적인 폭력과 폭언이 당연시됐다.” 감독과 주장(특정선수)이라는 완장이 폭력을 당연시해 준 감투였다니, 말문이 막힐 노릇이다.

과거와 비교해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체육계는 여전히 다른 분야에 비해 폐쇄적인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듣고 있다. 시스템 특성상 선수들은 사실상 초·중·고에서 대학, 실업팀까지 한 울타리 안에서 성장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후배는 시간이 가면 선배가 되고 또 현역에서 은퇴하더라도 다시 지도자가 돼 한참 후배이기도 한 선수들과 다시 만나게 된다.

또 일부 종목의 경우 전체 등록선수를 다 합쳐도 수백 명에 불과할 정도로 적은 인원이고, 훈련도 합숙 위주로 이뤄지기에 ‘그들만의 리그’는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끈끈한 유대관계가 형성된다고 한다. 시쳇말로 한 다리만 건너면 족보를 훤히 알 수 있을 정도라는 것이다.

물론 이 같은 시스템은 선수들에게 이점이 될 수도 있다. 강한 팀워크가 다져지고 선배들에게 노하우를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운 나쁘게 못된 선배와 지도자를 만나게 된 선수들에게 이는 아예 운동을 그만두지 않는 이상 벗어날 수 없는 고통이 될 수밖에 없다. 최 선수의 아버지가 딸을 보낸 뒤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팀이 숙현이에게 지옥과 같은 세상이었다는 사실을 진작 알았더라면 절대 보내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 말이 현실이다.

체육계에서 폭력이나 집단괴롭힘 같은 일이 일어날 경우 선수든 지도자든 가릴 것 없이 더 강력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데는 그런 이유도 있다.

이번 사건에서 더 큰 문제는 고통을 당해도 선수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회시스템에 구멍이 뚫려있었다는 사실이다. 최 선수는 경찰, 검찰, 협회, 시청, 체육회 그리고 국가인권위원회에까지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중 어느 한 곳에서도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당시 그가 느꼈을 절망감에 대해 지금이라도 우리 사회는 답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이런 현실에서 내부고발 형태의 신고자에 대해 2차 피해 보호책을 마련해 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과연 현실성이 있는 말일까 싶은 생각마저 든다. 특히 체육계의 경우 가해자가 퇴출당해도 피해자는 그 울타리 안에서 계속 운동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최 선수 역시 제때 신고조차 못 한 채 팀을 옮긴 이후에야 그나마 신고하는 용기를 낼 수 있었고 그 결과는….

이참에 이런 부분에 대해서도 현장에서 선수들이 공감할 수 있는 대책이 강구돼야 할 것이다. 또 정부에서는 당연히 이번 사건에서 있었던 여러 기관, 단체 들의 잘못에 대해 철저히 조사해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체육계 내부에서 은밀하게 이뤄지는 온갖 부조리한 일들을 없앨 근본적인 방법은 사실 누구나 잘 알고 있다. 우리 사회는 부모 등골을 휘게 하는 사교육비를 줄이기 위해 그동안 수없이 공교육을 정상화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왔다. 그런데도 지금 현실은 어떤가, 예전과 비교해 별로 달라진 게 없다.

결국 학벌 따지고 학력 따라 연봉 차별하는 현실이 바뀌지 않는 한 공교육 정상화가 요원한 것처럼, 체육계 문제도 메달 따라 몸값 매기는 성적 지상주의가 사라지지 않는 한 바뀌지 않을 것이다. 대통령은 최근 국무회의에서 최 선수 사건을 언급하며 ‘성적이 선수의 행복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지만, 현실을 들여다보면 좀처럼 그게 바뀔 거 같진 않다.

논설위원 겸 특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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