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끝> 한국영화의 왕별 신성일

▲ 신성일은 평생을 청춘으로 살았다. 머리에 하얗게 서리가 내린 80대에도 청바지를 즐겼다. 그의 불꽃같은 삶은 전설이 됐다. 신성일이 숨지기 한 달 전인 2018년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 레드카펫을 밟으며 팬들에게 인사하고 있는 모습.
▲ 신성일은 평생을 청춘으로 살았다. 머리에 하얗게 서리가 내린 80대에도 청바지를 즐겼다. 그의 불꽃같은 삶은 전설이 됐다. 신성일이 숨지기 한 달 전인 2018년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 레드카펫을 밟으며 팬들에게 인사하고 있는 모습.
영원한 ‘맨발의 청춘’. 지금도 청춘 대부분은 맨발이다. 1960·1970년대, 그때 청춘들은 더 춥고 배고팠다. 상처투성이 청춘들은 그런 속에서도 사랑을 했다.

그들을 대변했던 스타 신성일. 온 국민들이 그를 보며 영화 속 주인공이 되어 현실을 잊을 수 있었다.

◆야망의 탄생

신성일은 일제강점기 1937년 5월8일 대구시 중구 인교동 253 외할머니댁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강신영.

대구농협지점장이던 아버지 강병오는, 어머니 김연주와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고 신영은 차남이었다.

아버지 강병오는 이미 결혼, 3남을 두었으나 이혼 후 함께 근무하던 어머니와 다시 결혼한 처지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신영이 돌도 지나기 전 폐결핵으로 숨졌다.

경북여고를 나온 어머니는 외할머니와 함께 소년 신영을 억척스럽게 키웠다. 잘 생긴 소년은 공부는 물론 운동까지 뛰어났다.

신영은 대구 수창국민학교 2학년 때 광복을 맞았다. 4학년 때부터 아버지의 첫 부인이 사는 경북 영덕을 오가며 양 집안의 교류를 텄다.

경북중을 우수한 성적으로 들어간 신영은 1학년 때 6·25가 터졌다. 신영은 전쟁 중 기와공장 임시교사에서 공부, 경북고에 입학했다. 동기로는 문희갑 전 대구시장, 정해창 전 법무부장관, 김재익 전 청와대 경제수석 등이 있다.

당시 그는 친구들과 대구 송죽극장과 자유극장을 드나들며 학생 입장 불가 프랑스 예술영화에 빠져들었다.

고교 2학년 1학기 때 그의 운명을 바꾸는 사건이 터졌다. 경북도청 부녀계장이면서 약방과 서점사업을 겸업하던 어머니가 주도하던 계가 깨진 것이다.

어머니는 한밤에 달아나 버렸고 빚쟁이들이 몰려와 신영을 다그치며 마구 때렸다. 하룻밤 사이 거지가 된 왕자 같았다.

이모 집에서 얹혀살던 신영은 상경, 서울대에 지원했으나 2년 연속 떨어졌다.

신영은 청계천 판자촌에서 호떡 장사를 했으나 잘 팔리지 않았다.

◆스타의 길목

▲ 그는 단군 이래 제일 잘 생긴 한국인이란 말을 들었다. 20대의 신성일.
▲ 그는 단군 이래 제일 잘 생긴 한국인이란 말을 들었다. 20대의 신성일.
1950년대 후반 한국은 6·25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었다. 모두가 가난했고 불의가 횡횡했다.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눈에 불을 켰으나 살길이 막막했다.

우울한 강신영은 서울 충무로를 걷고 있었다. 우연히 고교 동창 손시향과 마주쳤다. 그는 ‘검은 장갑’이란 노래를 히트시킨 유명 가수여서 멋진 옷차림이었다.

신영은 너무 반가웠으나 친구는 어깨만 한번 쳐주고 지나갔다. 그는 남루한 자신을 돌아보며 치를 떨었다. 문득 성공을 향한 욕망이 불타올랐다.

넋을 놓고 걷던 그에게 ‘한국 배우전문학원’이란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배우 꿈을 가져본 적 없던 신영은 새 길을 가기로 결심한다. 당시 최고 강사진을 보유한 학원에서 신영은 6개월 간 연기를 배웠다.

1959년 8월 당시 최고 영화사 ‘신필름’이 전속 연기자를 뽑는다는 공고를 냈다. 22세 청년 강신영은 괜한 자존심 때문에 원서를 넣지 않았다.

면접 당일 부슬비가 오는데도 신영은 광화문 뒷골목 오디션 현장을 배회했다. 수천 명의 인파 속에서 신필름 소속 이형표 기술감독이 신영을 발견했다. 이 감독은 원서조차 내지 않은 신영을 신상옥 감독에게 들여보냈다.

오디션이 끝난 후 혼자 있던 신 감독은 신영을 보자마자 3년 전속계약을 제안했다. 운명은, 원서조차 내지 않은 그를 영화계로 이끈 것이다.

◆한국 영화의 왕별

신상옥 감독은 강신영에게 ‘뉴 스타 넘버 원’이란 뜻의 ‘신성일(申星一)’이란 예명을 지어 줬다. 22세 백수 청년이 하루아침에 최고 월급을 받는 배우로 탈바꿈했다.

그는 서울 종로구 가회동에 하숙집을 얻고 사람 사귀는 일에 정성을 쏟았다. 작가, 기자, 영화인 누구에게나 다가갔고 허드렛일도 도맡았다.

▲ 신성일은 1960년 1월 신상옥 감독의 ‘로맨스 빠빠’로 데뷔했다. 왼 쪽 두 번째가 고교생 역할의 신성일. 오른쪽부터 김승호, 주증녀, 엄앵란, 김진규, 도금봉, 남궁원 그리고 맨 왼 쪽에 최은희가 보인다.
▲ 신성일은 1960년 1월 신상옥 감독의 ‘로맨스 빠빠’로 데뷔했다. 왼 쪽 두 번째가 고교생 역할의 신성일. 오른쪽부터 김승호, 주증녀, 엄앵란, 김진규, 도금봉, 남궁원 그리고 맨 왼 쪽에 최은희가 보인다.
신 감독은 신성일을 1960년 1월 개봉한 영화 ‘로맨스 빠빠’에 첫 출연시켰다. 영화는 보험회사원 아버지가 실직하자 온 가족이 위로하는 내용의 희극이었다. 주인공 아버지역에 김승호, 조연으로 최은희, 남궁원, 엄앵란 등이 나오고 고교생 막내 아들 역을 신성일이 맡았다.

영화는 성공을 거뒀으나 신성일의 연기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이후 그저 그런 영화에만 출연하며 시간이 갔다.

1962년 여름 두 번째 기회가 왔다. 평소 친했던 동아일보 기자가 영화사 극동흥업에서 기획 중인 영화의 남자 주연으로 신성일을 추천한 것이다.

인기 라디오 드라마 ‘아낌없이 주련다’를 각색한 영화는 6·25 때 부산에서 레스토랑을 경영하는 전쟁미망인과 피난 온 대학생의 사랑을 그린 이야기여서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그러나 극동흥업 영화에 출연하려면 자신을 키워준 신필름을 배신해야 했다. 신성일은 결단을 내렸다. 신필름과 전속계약 기간이 끝난 것을 명분으로 극동흥업과 새로 계약을 체결하고 ‘아낌없이 주련다’의 남자 주연으로 발탁됐다.

사실주의 영화 ‘오발탄’으로 주가가 높았던 유현목 감독은 ‘아낌없이 주련다’를 통해 신성일의 연기를 한 단계 도약시켜 주었다.

바야흐로 한국 영화계가 전성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신성일의 시대도 펼쳐지고 있었다. 신성일 주연으로 1년에 수십 편의 영화가 제작됐다.

▲ 1964년 개봉한 김기덕 감독의 ‘맨발의 청춘’에서 신성일은 뒷골목 건달 ‘두수’역을 맡아 최고 스타에 올랐다. 상대역은 뒷날 아내가 된 엄앵란.
▲ 1964년 개봉한 김기덕 감독의 ‘맨발의 청춘’에서 신성일은 뒷골목 건달 ‘두수’역을 맡아 최고 스타에 올랐다. 상대역은 뒷날 아내가 된 엄앵란.
1964년 신성일의 대표작 ‘맨발의 청춘’이 개봉됐다. 김기덕 감독의 이 영화는 불과 18일 만에 제작됐지만 보기 드문 흥행작이 됐다.

뒷골목 건달 두수(신성일)와 대사 딸 요안나(엄앵란)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인 이 영화는 “눈물도 한숨도 나 혼자 씹어 삼키며….”로 시작되는 가수 최희준의 주제가를 배경으로 스포츠머리, 가죽점퍼, 트위스트 춤 등 당시 젊은이들의 유행과 무모함을 잘 담아내 청춘을 열광시켰다.

1970년대 전후 그는 문희, 윤정희, 남정임 등 소위 1세대 트로이카들의 상대역을 독점했다. 1970년대 후반에는 장미희, 정윤희, 유지인 등 2세대 트로이카들과 손발을 맞췄다.

신성일은 자신의 이름대로 스타 중 스타, 왕별이 된 것이다.

1970년대 들어 흑백 TV가 크게 늘고 박정희 정권의 검열정책이 강화되면서 한국영화는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래도 신성일은 1970년대 전반까지 해마다 20~40여 편의 주연을 맡았다. 1975년 이후에는 10편 이내로 줄었다. 이는 동시녹음이 일반화되면서 성우 목소리를 이용하는 속성촬영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평생 50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했다. 대부분 주연이었으며 100여 명의 여주인공과 공연했다.

◆아내이자 동지 엄앵란

▲ 신성일은 1966년 개봉된 이만희 감독의 ‘만추’를 자신의 대표작으로 여겼다. 신성일은 문정숙과 쓸쓸한 사랑을 나눈다. 신성일은 만추 원본이 사라져 다시 볼 수 없음을 안타까워했다.
▲ 신성일은 1966년 개봉된 이만희 감독의 ‘만추’를 자신의 대표작으로 여겼다. 신성일은 문정숙과 쓸쓸한 사랑을 나눈다. 신성일은 만추 원본이 사라져 다시 볼 수 없음을 안타까워했다.
1964년 11월14일 서울 워커힐 호텔에선 왕국에서나 있을 법한 결혼식이 열렸다. 당시 최고 인기 남녀 배우 신성일과 엄앵란이 부부가 되는 날이었다.

전 국민의 이목을 끈 결혼식에는 구경꾼까지 수천 명이 몰려 북새통을 이뤘다. 인파에 밀려 하객들은 식장에 접근도 못 했다. 화환은 넘어지고 축의금이 털리는 등 엉망이 되자 진행요원들은 몽둥이까지 휘둘렀다.

신성일보다 한 살 연상인 엄앵란은 학사 출신 배우로 신성일보다 먼저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엄앵란은 결혼 후 영화 일선에서 물러나 신성일의 뒷바라지에만 힘을 쏟았다. 1979년부터 10여 년간 대구에서 ‘나드리예’라는 식당을 경영하며 남편의 정치 활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영원한 자유인

▲ 1960년대는 한국영화 전성기였다. 신성일은 해마다 수십 편에서 주역을 맡았다. 사진은 1966년작 이만희 감독의 ‘군번 없는 용사’. 오른 쪽 세 번째가 주인공 신성일이고, 왼 쪽 두 사람은 차례로 신영균과 허장강
▲ 1960년대는 한국영화 전성기였다. 신성일은 해마다 수십 편에서 주역을 맡았다. 사진은 1966년작 이만희 감독의 ‘군번 없는 용사’. 오른 쪽 세 번째가 주인공 신성일이고, 왼 쪽 두 사람은 차례로 신영균과 허장강
신성일은 언제나 거침없이 말하고 행동했다. 마음에 안 드는 것은 그냥 넘어가지를 못했다. 특히 거짓말은 비겁한 짓이라고 생각, 지나치게 솔직해서 문제 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1969년 부산의 국도극장 개관 쇼에서 역시 자유분방한 가수 조영남이 불손하게 굴자 흠씬 두들겨 준 일도 있다.

2011년 발간된 자서전에서는 1970년대 미국행 여객기 일등석에서 애인과 사랑을 나눈 사실을 밝혀 세상을 뒤집어 놓았다.

그는 1987년부터 사귄 슬롯머신 사업가 정덕일에게 영화사업을 위해 40억 원을 받았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정덕일은 후일 김영삼 정부 출범 후 6공 실력자 박철언에게 뇌물을 줬다는 이유로 구속된다.

그는 연애했던 상대가 누구인지도 숨김없이 밝혀 오히려 주변이나 언론이 명예훼손 가능성 때문에 얼버무리곤 했다.

슬하에 1남 2녀를 둔 신성일 부부는, 1980년대 이후 서로 떨어져 살며 상대의 삶에 대해 간섭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로 어려울 때면 돕는 모습을 보였다.

그들 부부의 사는 모습은 프랑스 소설가 사르트르와 보바르의 계약 결혼에 비견되고 2010년대부터 등장한 ‘결혼을 졸업한다’는 의미의 졸혼 원형으로 불리기도 했다.

◆‘맞지 않는 옷’

▲ 1974년 40만 관객이란 초대박을 친 이장호 감독의 ‘별들의 고향’ 포스터. 신성일과 아역 배우 출신 안인숙이 주연을 맡았다.
▲ 1974년 40만 관객이란 초대박을 친 이장호 감독의 ‘별들의 고향’ 포스터. 신성일과 아역 배우 출신 안인숙이 주연을 맡았다.
그는 청소년기 집안의 몰락으로 예상치 않던 배우의 길로 들어섰지만 정상에 올라선 이후 정치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치는 그에게 ‘맞지 않는 옷’처럼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복잡 미묘한 정치계에서 직선적인 성격의 그는 영화계와 달리 실패를 거듭했다.

신성일은 40세 때인 1978년 10월 결국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는다.

본인이 출마한 것이 아니라 그해 12월 10대 총선에서 서울 지역구에 출마한 공화당 후보를 도운 것이다. 그는 여기서 부패 금권선거의 실상을 보게 된다.

그는 이후 1981년 11대 총선과 1996년 15대 총선에서 각각 서울 용산·마포와 고향인 대구 동구 갑에서 출마했으나 낙선한다.

그는 삼수 끝에 2000년 4월 16대 총선에서 대구 동구에 출마, 금배지를 단다. 63세 때다.

그는 국회의원 시절 고향 대구를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임기가 끝난 후인 2005년 2월 그는 대구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 때 뇌물을 받았다는 이유로 구속됐다. 광고업자에게 정치후원금 1억여 원을 받고 영수증을 써 줬으나 검찰은 대가성이 있다고 본 것이다.

그는 실형 5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2년만인 2007년 2월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불꽃처럼 살다 가다

▲ 그는 자유인이었다. 언제나 거침없이 말하고 행동했다. 2017년 6월 그가 집을 짓고 살던 경북 영천의 ‘성일가’ 뒷산을 오르다가 쉬고 있는 모습.
▲ 그는 자유인이었다. 언제나 거침없이 말하고 행동했다. 2017년 6월 그가 집을 짓고 살던 경북 영천의 ‘성일가’ 뒷산을 오르다가 쉬고 있는 모습.
그는 2008년 경북 영천시 괴연동에 ‘성일가’라는 한옥을 짓고 서울을 오가며 생활했다. 그는 보통 사람이 되어 마을 사람들과 어울렸다.

그는, 2017년 폐암 3기 진단을 받았다. 그는 투병 생활 중 갑자기 병이 악화돼 전남 화순 전남대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다 2018년 11월4일 눈을 감았다. 81세였다.

그는 평생을 청춘처럼 살았다. 머리에 하얗게 서리가 내린 80대에도 청바지를 즐기고 모든 일을 직접 했다. 이제 그의 불꽃같은 삶은 전설이 됐다. 이송하 전 연합뉴스 기자



연보

·1937년 5월8일 대구 인교동 출생

·1950년 대구 수창국민학교 졸업

·1953년 경북중 졸업

·1956년 경북고 졸업

·1957년 서울 배우전문학원에서 연기 실습

·1959년 8월 신필름 입사

·1960년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

·1962년 건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학사

·1964년 2월 영화 ‘맨발의 청춘’ 개봉

·1964년 11월14일 엄앵란과 결혼

·1971년 영화 ‘연애교실’로 감독 데뷔

·1974년 영화 ‘별들의 고향’ 개봉

·1979년 한국영화배우협회장

·2000~2004년 제16대 국회의원

·2002년 한국영화배우협회 이사장

·2008년 경북 영천 성일가 건립

·2009년 계명대 연극예술과 특임교수

·2008~2013년 대구 국제뮤지컬페스티벌 이사장

·2018년 11월4일 별세



홍석봉 기자 dghong@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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