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빼언니/ 정명희



추위가 한풀 꺾였다. 따스해질 봄날을 기다린다. 홍역 환자가 치료받는 병원이라는 소식 때문인지 외래 진료실이 한산하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추운 날 보던 색깔은 오간 데 없고 온통 희뿌옇다. 먼 산은 회색빛 먼지로 가려져 있다. 우리 전통적 겨울 날씨를 뜻하는 ‘삼한사온’은 이제 멀리 사라져버렸는가. 사흘은 춥고 나흘은 온통 미세먼지뿐 아니라 초미세먼지로 희뿌연 공기를 들이켜며 콜록대고 있다. 올겨울 유난히 차가운 북풍이 부는 가운데서도 미세먼지는 기승을 부리며 우리의 건강을 위협하려 들었다.



뿌연 하늘로 마음까지 가라앉는 날. 봄의 전령이 벌써 달려왔던가. 기쁜 선물이 당도했다. 홍릉 숲의 복수초(福壽草)가 노란 꽃잎을 피웠다는 소식이다. 복수초라면 그냥 복수혈전이 떠오른다. 하지만 한자로는 福(복 복)壽(수명 수)草(풀 초)를 쓰니 복과 장수를 기원하는 봄꽃이 아니겠는가. 혹독한 추위를 뚫고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그, 먼지 자욱한 겨울 한복판에서 눈과 얼음을 뚫고 연약한 고개를 내밀었나 보다. 복수초는 향광성이라 아침에는 꽃잎을 닫았다가 볕이 날 때에 활짝 피어난다고 한다. 노란 꽃잎 표면에 햇빛이 반사되면 열이 약간 발생하면서 꽃 윗부분의 눈을 녹인다니 눈과 얼음조각이 남은 모자 쓴 복수초 모습,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맑아온다. 복수초는 꽃이 황금색 잔처럼 생겼다고 측금잔화(側金盞花)라고도 부른다. 눈 속에서 꽃이 핀다고 하여 설연화(雪蓮花), 얼음 사이에서 꽃이 핀다고 하여 빙리화(氷里花), 얼음꽃, 설날에 꽃이 핀다고 하여 원일초(元日草)라고도 부른다. 복과 장수라는 이름에 걸맞게 꽃말은 ‘영원한 행복’, ‘슬픈 추억’이다.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새해 복 많이 받고 장수하라’는 의미로 복수 초를 선물하기도 한다니. 마음까지 얼어붙는 겨울에 그리운 이의 선물로는 따스함을 가져다주는 복수초보다 더 귀한 선물이 어디 있으랴.



마음을 추스르며 진료를 하는데, 늘 호흡기가 약해 늘 골골대며 쌕쌕거리는 어린아이가 문 앞에서 빠끔히 눈을 들이민다. 외래 진료실에 올 때면 누구보다 먼저 큰소리로 인사하는 똑똑하게 행동하던 아이였기에 가만있는 그 아이가 신기하여 물었다. 그러자 그 아이가 되레 묻는다. “선생님은 왕언니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순간적으로 “왕! 빼!” 라고 답하였다. 그러자 아이는 “왕 빼 언니”라고 부르는 것이 아닌가. 순간 옆에 있던 아이의 엄마가 간호사와 함께 박장대소하는 게 아닌가. 그래 나는 ‘왕 빼 언니’ 맞아.



호칭을 떠올릴 때면 인터넷에 있던 우스개가 생각난다. 어느 할머니 셋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 며늘아기가 그러는데, 예수님이 돌아가셨다”고 하더라. 그러자 다른 친구 할머니가 “왜 어떻게 돌아가셨다고 해?”라고 물었다. “못 박혀서 돌아가셨다고 하는 것 같어.” 이때 아무 말이 없던 할머니가 “예수님이 누구야?”하고 되물었다. “우리 며느리가 아버지 아버지하면서 사는 것 보니 ‘사돈 양반인가 봐”했다던가. 우스갯소리지만 대가족에 대한 호칭은 복잡하기만 하다. 진짜 며느리의 아버지라면 사돈양반일까? 사돈어른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까? 사돈(査頓)이란 서로 혼인한 남자와 여자 측의 인척 관계를 일컫는다. 사돈은 같은 세대인 동성 간의 호칭이다. 그러기에 아버지끼리 어머니끼리는 그냥 ‘사돈’이다. 하지만 같은 세대라도 이성의 사돈이나, 동성이라도 자기보다 10년 이상 연상이면 조금 높여 ‘사돈어른’으로 예우해 부른다. 이성의 사돈은 나이와 무관하게 ‘사돈어른’으로 예우해 부른다. 특히 여성 사돈을 ‘사부인’이라고 한다.



사돈은 피와 살이 섞이지 않았기 때문에 분명 남이지만, 아들과 딸을 주고받은 특수한 관계로 항렬과 같이 세대의 위계가 정해진다. 그 위계를 ‘사행(査行)’이라 한다. 시집보낸 딸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딸의 시부모는 사행이다. 딸의 시조부모는 한 단계 윗 사행이고. 아랫 사행의 사돈이라면 사돈양반(사돈총각·기혼 남성), 사돈총각(사돈도령·미혼 남자) 또는 사돈처녀(사돈아가씨·미혼 여성)·사돈아기씨(사돈아기·어린 사돈에 대한 칭호) 로 부른다. 사돈양반은 윗세대가 아닌 사돈총각이 혼인하면 예우해 부를 때 쓴다. 사돈의 ‘사(査)’는 ‘살필 사’이며, ‘돈(頓)’은 ‘머리 꾸벅거릴 돈’이라고 한다. ‘삼가 조심스럽게 살피면서, 머리를 꾸벅거릴 사람’이 사돈 사이인가 보다. 왕언니라고 부르려다가 ‘왕’자를 빼라고 하니 ‘왕 빼 언니’라 부르는 아이처럼 호칭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은 사돈 관계처럼 조심스럽고 참 어려운 일일 것 같다. 그래도 서로를 부를 때는 정겹게 예의를 갖추어서 부르면 더 품위 있고 좋지 않으랴.



박준우 기자 pj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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