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국현논설실장

최근 경부고속도로 영천~언양 구간이 왕복 6차로로 확장됐다. 영천에서 경주 쪽으로 달리다 경주터널을 500m쯤 지나면 오른쪽에 여근곡(女根谷)이 있다. 이 구간을 지날 때면 동승자에게 여근곡을 설명하며 운전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러나 고속도로 확장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여근곡 쪽에 쳐진 방음벽 때문이다. 민가와 축사 등의 소음피해를 막기 위해 높이 3~4m의 방음벽이 도로를 따라 길게 쳐져 있다. 종전에는 고개를 15도 정도만 돌려도 여근곡이 눈에 확 들어왔다. 운전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볼 수 있는 위치였다.
하지만 지금은 방음벽 때문에 100여m쯤 지나 고개를 120도 정도 완전히 뒤로 돌려야 겨우 볼 수 있다. 그나마 방음벽이 끊어진 사이를 통해 1~2초 정도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여근곡을 찾다 고속 주행 중 사고라도 나지 않을까 두려운 상황이다.
정말 아쉽다. 별다른 홍보나 돈을 들이지 않고 경부고속도로를 지나는 많은 사람에게 여근곡을 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졌다.
알다시피 여근곡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나온다. 경주시 건천읍의 부산(富山)은 ‘선덕여왕이 미리 알아낸 3가지’ 이야기에 나오는 바로 그 여근곡이다. 지형이 여자의 성기처럼 생겨서 여근곡이라 불린다. 계곡의 중앙에는 옥문지(玉門池)라는 샘이 있다. 옥문지에는 사시사철 샘물이 솟아나고 있어 신비감을 더한다.
선덕여왕 5년(636) 어느 깊은 겨울. 옥문지에서 개구리 떼가 여러 날 울어대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여왕은 정병 2천 명을 뽑아 여근곡을 찾아가서 적병을 치도록 명령했다. 군사들이 그곳에 이르니 과연 백제군사 500명이 매복해 있어 그들을 포위하고 전멸시켰다.
이에 감탄한 신하들이 물으니 여왕은 “개구리가 노한 모습은 병사의 형상인데 때아닌 겨울에 운 것은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다. 옥문은 여자의 성기이고 이는 음이며, 백색이고, 서방이다. 따라서 서쪽의 옥문과 같은 지형에 적병이 있을 것으로 짐작했다. 또 남자의 성기는 여자의 성기 안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게 되므로 여근곡에서 적을 쉽게 처치할 줄 알았다”고 했다.
지구촌 지자체마다 관광산업 육성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별 관심을 끌지도 못하는 전설이나 이야깃거리, 바위, 무덤 등에다 스토리텔링을 입혀 관광자원화 하는 것이 작금의 추세다.
자기 동네 소소한 사물이나 역사에 이야기를 입히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벨기에의 대표적 관광자원의 하나인 ‘오줌 누는 소년상’은 실제 보면 대부분 실망한다. 골목 안에 서 있는 소년상은 진품이 아닌 데다 60㎝ 정도로 크기가 작다. 진품은 브뤼셀 시립박물관에 있다. 골목 입구에는 상점만 즐비하다.
‘레드존’으로도 불리는 암스테르담 홍등가는 네덜란드의 대표적 관광지 가운데 하나다. 관광객들은 운하를 따라 줄지어 서 있는 성매매 업소를 흘낏거리며 지나간다. 그것이 전부다. 암스테르담 시 당국이 지난해 말부터 관광객들이 너무 많이 찾아 관광 규제에 들어갈 정도다.
국내도 마찬가지다. 대구 달성군 화원읍 본리2리 마비정(馬飛亭) ‘벽화마을’과 경북 봉화군의 분천역 산타 마을이 대표적 사례다.
이런 사례에 비추어 보면 여근곡은 어마어마한 역사 관광자원이다. 다양한 극적 요소가 있어 관광자원화 하기에 충분하다. 선덕여왕의 지혜를 엿볼 수 있고, 신라사람들의 성에 대한 의식도 들여다볼 수 있다. 또 골짜기 아래 옥문지 이야기는 성적 판타지를 더해준다.
그러나 확장공사를 실시한 도로공사는 멀쩡하게 잘 보이던 관광자원을 방음벽으로 차단해버렸다. ‘피해’를 입은 경주시는 별다른 조처를 하지 않고 있다.
해결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방음벽이 차량 소음으로부터 인근 주민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라면 투명한 아크릴 소재로 바꾸기만 해도 된다. 그러면 지나는 운전자들이 여근곡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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