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날처럼 학교에 갔다. 선생님께서 빨리 집으로 돌아가란다. 영문도 모른 채 집에 오니, 어머니가 짐 보따리를 사셨고, ‘빨리 안동으로 가자, 전쟁이 났다’며 동생을 업고 내 손목을 잡고 기차역으로 갔다. 기차는 만원이었고, 우리들은 포개어 앉듯 겹겹이 앉고 서서 안동으로 왔다. 안동 할머니 댁에 아버지가 계셨다. 산하는 짙푸른 6월 마지막쯤이었다.

모깃불을 피우고 멍석에 홑이불을 덮고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았고, 어른들은 밤새도록 전쟁 이야기를 하셨다. 이북에서 공산군이 쳐들어 왔다는 것이다. 전쟁이 무엇인지 확실히 모르면서도 막연한 두려움과 공포가 엄습하였다. 앞산의 소나무 사이로 공산군이 기어올라오는 꿈을 꾸다가 소리를 지르며 깨기도 하였다.

10여일 후 소달구지에 가재도구를 싣고, 할머니와 삼촌 등 대식구가 남쪽으로 남쪽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이 때부터 상상도 못한 고생길이 시작되었다. 산언덕에서 자다가 소나기를 만나면 어른들은 머리에 돗자리를 이고 아이들을 보호했다. 굶기는 다반사요, 잠자리는 처마 밑이나 방앗간에서, 그것도 못 구하면 노숙하는 등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식량이 바닥나자 소를 잡았고, 짐 보따리를 지고 갔던 삼촌 두 분이 먼저 군으로 뽑혀가고 나중에는 아버지 마저 군대에 가시자 어머니가 가장이 되셨다. 할머니는 오로지 장손인 내 동생(6세) 손목만 꼭 잡고 가셨다. 피난행렬에서 장손을 잃지 않으려는 할머니의 노력은 실로 필사적이었다. 까만 제트기가 귀청을 때리며 다가오나 싶으면 금새 빨간 불덩이를 터트려 불바다를 이루었고, 어느 골짜기에서는 시체 더미를 만나 혼비백산하기도 했다. 9.28 수복이 되었으나 학교가 불타버려 도립병원 한쪽 귀퉁이에서 공부하였는데, 하루 수십명의 전사자가 도착하여 병원 복도에 안치되어 있었다. 군용 담요가 작았는지 두발이 드러나기도 하여 우리들은 더욱 무서웠다.

전쟁은 3년이나 계속되었다. 초등학생이던 내가 중학교에 가서야 모래흙을 져 날라 교실을 지었고, 학생들은 가마니를 깔고 공부했다.

우리는 구호물품으로 살았다. 나는 그 구호물품 옷이 죽도록 입기 싫었으나, 다른 옷이 없어서 입고 다녔다. 밀가루, 옥수수가루, 우유가루로 연명한 우리는 미국을 비롯한 우방국을 잘 사는 나라, 인정 많은 나라로 여겼으니 우리 눈에 비친 USA 제품은 무조건 최고였다.

6.25 54돌을 맞아 신문에 실린 참전 용사들의 증언을 읽으며, 내가 겪은 6.25를 잠시 회상해 보았다. 초등학생이었기에 직접 전투에 투입된 것은 아니나 피난길의 그 고생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생생한 기억으로 아직까지 각인되어 있다.

내 왼쪽 볼에는 도장이 하나 꾹 찍혀 있다. 피난길에서 앓은 종기를 치료할 수 없어 저절로 아물기를 기다려 얻은 상처이다.

50년하고도 수년이 더 지난 세월, 지금 세대들이야 어찌 그 때의 그 참상을 알 수 있으랴. 경험하지 못한 사실을 이해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일전에 당한 김선일씨의 끔찍한 피살 소식에 온 국민이 분노와 비통함에 젖어 있다. 그는 이 나라의 선량한 국민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로든 김선일씨의 죽음은 정당할 수 없다. 그러기에 전 국민이 분노하는 것이다. 그가 피살 될 수밖에 없었는지 구할 수는 없었는지 국가 차원의 진실된 규명이 있어야 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 생명을 담보로 하는 그 어떤 것도 인류의 적이다.

54년 전 6.25에는 김선일씨 같은 젊은이가 수도 없이 희생되었다. 100만이 넘는 젊은이와 그 가족까지, 수백만이 전쟁의 참담한 희생자였다. 전사하고, 부상당하고, 포로가 된 그들은 모두 이 나라의 선량한 국민이었다. 사랑스런 아들이었고, 믿음직한 가장이었으며, 꽃다운 청춘들이었던 죄 없는 이들이 전쟁이라는 악마의 말발굽에 무참히 인생을 접은 것이다. 단 한사람의 생명도 귀하고, 소중한데 수백만의 목숨이 광풍 앞의 촛불처럼 스러져간 6.25! 우리는 6.25를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한다.

<경상북도교육연구원장 박 미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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