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상엔 ‘반레’란 한 사내가 살고 있다. 올해 쉰다섯 살로 베트남의 현역 시인이며 소설가이자 영화감독인 그는 1966년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17세의 나이로 자원 입대한 후 베트남이 통일을 이룬 1975년까지 민족해방을 위해 미국에 대항해 싸웠다. 총을 놓았을 때, 그와 함께 입대했던 3백 명의 부대원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오직 다섯 명뿐이었다.

300명 중의 5명, 그 잔혹한 생존의 확률을 잡고 간신히 살아남은 반레는 통일된 조국에서의 모든 창작활동을 먼저 간 295명의 동료들을 기억하는 데 바쳤다. 새해 벽두에 한국어로 ‘적’이었던 나라의 서점에 깔린 그의 장편소설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실천문학사 간) 역시 그런 작가적 신념이 낳은 대표작이다.

대구 지하철 대참사는 어느 순간엔가 문득 반레의 그 쓰라린 제목을 떠오르게 했다.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

마치 화형당한 괴물의 뼈다귀처럼 남은 처참한 몰골의 그 전동차를 타고 있었던 ‘그대’가 살아서 돌아온다면,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 과연 분노하고 슬퍼하는 우리는 그대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며 무슨 말을 해야 하겠는가?

지금 우리는 며칠째 한결같이 가슴을 치며 ‘인재(人災)’를 통탄하고 있다. 전형적인 인재, 되풀이된 인재, 어처구니없는 인재, 경악할 수밖에 없는 인재, 예고된 인재…… 온갖 인재가 넘쳐난다. 매스컴에도, 시민단체의 성명에도.

맞다.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인재다. 편리한 지하철을 불타는 지옥철로 둔갑시킨 것은 어느 하나 빠짐없이 몽땅 인재다. 1080호 기관사와 운전사령실의 구역질날 만큼 아둔한 대화가 마스컨키를 빼내 도망치는 최종결론에 이른 대목은 단연 천인공노할 인재의 압권이다.

어느 누구도 수갑 차고 얼굴 감춘 그들을 섣불리 옹호하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법정에 변호사는 따라붙겠지만, 여론은 좀처럼 그들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인지 모른다.

그렇다고 우리가 끝끝내 ‘인재’만 탓하고 있어도 되는 것인가? 정녕 구속된 사람들만이 생지옥의 재앙을 불러들인 모든 책임을 떠맡아야 하는가?

더 늦기 전에, 아니 영원히 파묻히기 전에, 나는 딱 하나의 정답이 나올 수밖에 없는 다섯 가지의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멀쩡히 살아남은 우리 모두를 향해, 사고 수습에 두 팔 벗고 나서겠다는 노무현 정부를 향해.

일본 지하철에선 전동차 6칸이면 기관실에 2명(기관사와 차장)이 탑승하게 되어 있다는데, 왜 우리 지하철은 기관사 혼자밖에 타지 않는가? 왜 부족한 인원이 운전사령실을 지켜야 했으며, 왜 경험이 풍부한 대신에 연봉을 많이 받는 기관사는 없었는가?

견학 왔다는 일본 전문가들이 일본 지하철에선 화재가 발생해도 전동차의 의자조차 타지 않는다고 자랑했는데, 왜 대구 지하철의 전동차는 유독연기를 내뿜는 불덩이로 변하고 말았는가? 우리보다 가난한 인도로 수출하는 ‘메이드 인 코리아’ 전동차는 불연재로 제작한다면서, 왜 대구 지하철 전동차는 삽시에 생지옥의 불구덩이로 변해야 했는가?

정답은 뻔하다. 한마디로 ‘돈’ 때문이다. 안전보다도 목숨보다도 훨씬 높은 자리에 독재자처럼 군림하고 있는 ‘돈’ 때문이다.

기관사 옆에 차장이 있었더라면? 차장이 있어서 1080호의 출입문을 열었더라면? 불에 타지 않는 전동차였다면? 운전사령실에 한 명이라도 더 있었고, 그 눈이 똑똑했더라면?

분노와 허탈과 비탄에 빠진 우리가 온갖 탄식을 해보지만, 우리 사회의 제일 높은 곳에 군림하는 ‘돈’은 우리에게 냉소를 보낼 따름이다.

여기서의 ‘돈’이란 당연히 이윤추구와 직결된 문제이니, 이는 곧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화 자본주의’의 심장으로 직통된다.

시장경제의 질서? 똑바로 잡아야지. 각 세력간의 균형? 반드시 잡아야지. 그러나 그 이전에 오늘 우리의 이 사회가 과연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는가’를 묻지 않는다면, 최고 지위에 군림하는 ‘돈’은 절대로 인간의 냄새를 풍기지 않으면서 가끔 ‘인재’를 부를 것이다. 이래도 우리는 ‘인재’의 멱살만 틀어쥐면 되는 것인가?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 부디 답하라.

이대환(민족문학작가회의 경북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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