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언제나 그를 속였다 그가 다가가면 발로 차고/그가 도망가면 팔을 잡았다가 그가 웃으면 울고 그가 울면/웃었다 그가 망하면 웃고 그가 팔을 쳐들면 웃고 그가/걸어가면 웃고 너를 안을 때뿐이다 인생이 그를 속이지/않은 건 너를 안을 때 해가 질 때 너의 눈을 볼 때/너와 차를 마실 때 그러나 너와 헤어지면 인생은 그를/속였다 추운 골목을 돌아가면 골목의 상점에서 담배를/사면 가로등에 불이 켜지면 인생은 속였다 밤이 오면/아파트 계단을 오르면 작은 방에서 잠을 이룰 수 없으면/밖에 바람이 불면 바람속에 돌아누우면 잠이 안 와/문득 일어나면 새벽 두 시 캄캄한 무덤에 불을 켜면 무덤/속에 앉아 담배를 피우면 책상 위 전기 스탠드를 켜면/위통이 찾아오면 다시 불을 끄면 캄캄한 무덤속에 누워/있으면 책상위의 냉수를 마시면 책상위의 사과를 먹으면/아아 '나'를 먹으면 아무 소리도 나지 않으면 문득 머언/무적이 울면 「밝은 방」(1995, 고려원) 부분 이 시를 필사하면서 그동안 ‘그’를 ‘너’로 잘못 읽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인생은 언제나 너를 속였다 네가 다가가면 발로 차고/네가 도망가면 팔을 잡았다가 네가 웃으면 울고 네가 울면/웃었다”라고 읽고 있었던 거다. 고단한 삶에 지친 나의 무의식이 ‘그’를 ‘나’로 동일시하게 만들었을 터이다. 이 시를 거칠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되지 않을까? ‘인생은 엿 같은 거다’ 그러므로 이 시 앞에서는 존재 자체가 고통이라는 말조차 사치스럽다. 「이곳에서의 삶」에서 시인은 다시 이렇게 쓴다. “죽은 듯이 살았다/ 빛나는 것은 없었다/ 하염없이 살았다/ 땅에 침을 뱉었다” 삶에 침을 뱉는 게 이승훈 시의 힘이라면 힘이 아닐까 싶다.이 시는 ‘인생은 그를 속였다’를 반복한다. 그가 웃을 때도, 그가 울 때도, 그가 팔을 쳐들 때도, 그가 팔을 내릴 때도, 불을 켜도, 불을 꺼도, 해가 떠도, 해가 져도, 바람이 불어도, 담배를 살 때도, 담배를 피울 때도, 냉수를 마시면, 사과를 먹으면, 아무 소리가 나지 않으면, 무적이 울면……. 이처럼 ‘언제나’ 우리를 속이는 인생 앞에서 우리는 크게 두 가지 감정을 갖는다. 유독 나한테만 인생이 잔인하다고 느낄 때는 분노를, 절망을 느껴 본 적이 없는 삶이란 삶의 진실에 아직 근접도 하지 못했다고 생각할 때는 실존적 우울을 느끼는 것이다.그런데 정말 속지 말아야 한다고 시는 귀띔한다. ‘그’가 인생에 속지 않았을 때는 “너를 안을 때”, “너의 눈을 볼 때/너와 차를 마실 때”였다. 그런즉 너만 아니면 이 지긋지긋한 인생 때려치워도 진작 때려치웠다고 소리치게 만드는 너, 그런 ‘너’가 실상은 ‘나’로 하여금 인생에 속지 않게 하는 존재라고 시는 가르쳐준다. 인생이 자꾸 어긋난다고 느끼는 당신, 이 시에 한번 모른 척 속아보는 건 어떠실는지? 신상조(문학평론가) 김광재 기자 kjk@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