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부터 일본 방문길에 히로시마를 꼭 한번 들러야 한다고 마음은 가졌지만, 시간 관계상 도쿄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지난 2023년 5월 21일 윤석열 대통령과 일본의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도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에 헌화하고, 영령들에게 머리 숙여 애도하였다. 공동으로 위령비에 참배한 역사는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처음 있는 일이며, 이 모습을 지켜본 한국인 피해자 10여 명에게도 고개를 숙였기에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며칠 시간을 내서 1월 24일 히로시마를 방문하였다.히로시마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원자폭탄이 세계 최초로 떨어진 장소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당시 히로시마에는 군인, 군속, 징용공, 동원학도 그리고 일반시민 등을 포함하여 14만여 명의 한국(조선)인이 거주하고 있었다.히로시마 원폭으로 사망자는 총 20만여 명에 달한다. 1972년에 한국의 원폭피해자 협회는 히로시마 원폭으로 총 5만 명의 피해자가 발생했고 그중에 3만여 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사망자 수만 헤아려 봐도 전체 원폭 희생자의 10%를 훨씬 웃도는 숫자이다. 1967년 한국에서 ‘원폭피해자협회’가 결성된 후 지속적으로 일본정부에 대해 치료와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1970년 4월에 민단 히로시마 본부의 주도 아래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가 평화공원 밖에 건립되었다.그 후, 재일 한인과 일본인에 의한 시민단체가 나서서 평화공원 안으로 이관 설치할 것을 요청했고, 1998년 12월 히로시마시 당국으로부터 이전 승인을 얻어냈다. 이에 1999년 5월 21일 기공식을 거쳐 7월 21일에 평화공원 안으로 이전 설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비석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5천년 기나긴 민족사를 통해서 여기 모신 이만여위의 생령이 겪으신 것 같은 슬프고 원통한 일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원통하게 생명을 잃으신 분들은 한마디 말도 못 하고 비참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희생자들은 모두 “물을 달라”는 외마디 비명을 외쳤다고 한다. 참으로 원통하고 통곡할 일이다. 위령비는 귀부와 이수를 갖춘 한국의 전통 방식대로 의연하게 세워져 있었다. 앞에 헌화한 꽃들과 음료수 등이 놓여있어 꾸준히 관리되고 있고, 많은 교포와 한국인이 다녀감을 알 수가 있었다. 참으로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이다. 위령비 앞에서 숙연하게 묵념을 하였다.묵념을 한 후 고개를 들어보니 바로 앞 10m 지점에 벽돌 건물이 보였다. 건물의 용도는 공중화장실이었다. 슬프고 원통하게 돌아가신 분들을 기리는 위령비 앞에 공중화장실이 가까이 있다는 것은 절대 안 될 일이다. 공중화장실과 위령비 건립의 선후 관계를 필자로서는 알 수 없으나, 한일 양국간에 그것도 원폭의 희생자를 기리는 위령비 근처 화장실은 다른 곳으로 옮겨져야 마땅하다고 본다. 이 점은 중앙정부 차원보다는 지방자치단체에서 해결하는 편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우리나라 대구광역시와 일본의 히로시마시는 1997년 5월 2일 자매결연을 맺은 뒤 교류를 지속하고 있다. 필자가 위령비를 참배하러 갔던 날도 대구광역시 청소년 평화단의 헌화가 놓여 있음을 볼 때 꾸준한 교류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따라서 대구광역시에서 히로시마시와 긴밀한 협조를 통해 화장실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바란다. 또한 히로시마시도 원폭도시를 평화, 국제협력도시로 승화하기 위해 ‘국제평화문화도시’로 이미지 변화에 노력하는 도시이다. 따라서 위령비 앞의 화장실 문제를 조속하게 해결하여 원폭으로 희생되신 영령들의 넋을 위로하고, 방문객들에게 편안하게 참배할 수 있도록 하여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영규(명지대 국제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정치학박사) 김광재 기자 kjk@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