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신라 최초로 폐위된 진지왕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용수 또는 용춘으로 기록되고 있어 정확하게 아버지가 누구인지 확인되지 않는 신비한 인물이다. 삼국유사나 삼국사기가 김춘추에 대한 기록의 분량을 엄청나게 많이 할애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에 대한 직접적인 이야기보다 김유신과의 관계, 당나라와의 문제, 문희부인과의 혼인과정 등 간접적인 이야기를 소개하는 부분이 많다. 김춘추는 삼국을 통일한 3대 주역의 맨 앞자리에 이름을 올리고 있지만 지금도 역사학자들은 ‘무열왕은 칼을 들고 전쟁에 앞장선 장수가 아닌 사람관계를 잘하는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김춘추는 평생 두 가지의 한을 가슴에 간직해왔다. 첫 번째는 할아버지 진지왕이 화백회의에서 폐위된 수치, 그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백제군에 의해 가장 아끼던 딸과 사위를 잃은 데 대한 복수를 하는 일이었다. 결국 김춘추는 김유신과 단짝이 돼 화백회의를 거쳐 당당하게 왕위에 올라 가문의 명예를 회복하고, 남자의 복수는 10년이라도 길지 않다는 말을 곱씹으며 당의 힘을 빌어 백제를 멸망시키고 딸의 원수를 갚고, 삼국통일의 토대를 마련했다. ◆김춘추의 출생신라 29대 태종 무열왕의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춘추다. 무열왕의 아버지는 화백회의에서 신라 최초로 폐위된 진지왕의 아들인 용수 혹은 용춘 각간이며, 어머니는 진평왕의 맏딸 천명공주이다. 왕의 부인은 김유신의 동생 문희다. 무열왕은 풍채가 늠름하고 인물이 여성스럽지만 잘 생겼으며 영특하고, 어렸을 때부터 정치에 뜻을 두고 인물교류를 폭넓게 추진해 많은 인물들과 사귀면서 자신의 지지층을 두텁게 했다. 특히 춘추는 자신의 모자라는 부분을 채워줄 무력과 덕을 가진 김유신과의 교분을 특별하게 두텁게 가지려 했다. 이때 김유신 또한 아버지가 가야 출신이라는 이유로 진골들의 푸대접을 받고 있던 터라 신라 진골과의 교분을 쌓아야 할 입장에 있어 김춘추와 뜻이 맞았다. 김유신은 김춘추와의 관계를 깊게 가져가기 위해 여동생들을 춘추의 배필로 삼으려 했다. 이러한 김유신의 마음은 춘추의 뜻과도 상통해 유신이 도모한 꾀가 이뤄져 춘추와 유신의 여동생 문희가 정략적으로 결혼하게 됐다. 김춘추의 목적은 오로지 당당하게 왕위에 올라 화백회의에서 폐위된 할아버지 진지왕의 명예를 회복하는 일이었다. 그의 집념은 무섭도록 집요하고 강해 끝내 화백회의를 통해 당당하게 왕위에 오르면서 명예를 회복했다. ◆김춘추의 외교김춘추는 외모가 여성스럽게 넉넉하면서도 남성미가 넘쳤다. 부드럽게 생겼지만 무예가 출중해 전쟁에서는 은연중 상대방 장수들이 그를 무시하다 낭패를 당했다. 특히 김춘추의 장점은 문장이 뛰어나고 언변이 훌륭하다는 것이다. 거기에 남다른 집념이 강해 한번 마음먹은 것은 반드시 이뤄야 했다. 춘추공의 딸과 사위가 백제군에 죽임을 당했다. 춘추는 기둥을 잡고 사흘 밤낮을 피눈물을 흘리면서 백제에 복수하리라 다짐했다. 이를 계기로 춘추공은 신라의 대신을 자처해 고구려와 왜나라에까지 직접 백제를 공격할 군사를 얻으러 갔다. 그러나 오히려 책망만 듣고 실패하고 돌아왔다. 고구려에서는 그를 잡아 가두고 억류했다. 이때 김유신이 목숨을 걸고 달려와 그를 구해내면서 둘의 관계는 한층 더 끈끈하게 발전했다. 춘추공의 집념은 그를 당나라로 향하게 했다. 당 태종 때였다. 태종이 고구려와의 안시성 전투에서 양만춘의 화살을 눈에 맞고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때 후궁 측천무후가 정치에 깊숙하게 관여하고 있었다. 당시 측천무후는 20대 초반이었지만 정치적인 야욕으로 남성들을 요리조리 마음껏 휘둘렀다. 김춘추는 당나라의 황실 내부 사정을 간파하고 당에 머무는 짧은 시간에 태종에게 정치적인 계약을 하는 한편 황금을 들고 측천무후를 직접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측천무후는 신라의 훤칠한 아름다운 장수의 외모와 현란한 말솜씨에 한눈에 반해버렸다. 그다음부터 춘추공의 협약은 순풍에 돛을 달았다. 망설이던 태종이 병력지원을 약속하며 백제는 물론 고구려까지 물리치고 신라의 삼국통일을 함께 돕겠다고 언약했다. 춘추는 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등에 업고, 당나라와의 관계 강화를 위해 진덕여왕 2년(648년)에 직접 그곳을 찾아 친당정책을 추진했다. 탄력을 받은 춘추는 귀국 후에 왕권강화를 위한 일련의 내정개혁을 주도했다. 당나라의 예복을 입는 중조의관제의 채택(649년), 왕에 대한 정조하례제의 실시(651년), 집사부 개편 등이 그것이다. 중국화 정책이라 할 수 있겠지만 김춘추로서는 후진적인 정치문화를 극복하고, 당나라의 지원을 받기 위한 눈물겨운 자구책이었다. 춘추공은 성년이 된 둘째 아들 김인문을 당나라 사신으로 파견했다. 인문은 춘추공과 문희의 장점을 그대로 빼닮아 훤칠한 외모에 무술 실력을 갖춘 뛰어난 지략가로 성장했다. 누구보다 눈치가 빠르고 아버지 춘추공의 생각을 잘 알았다. 당 고종이 즉위하고 측천무후의 정치적 욕심을 간파하고 있던 춘추는 인문에게 측천무후를 공략할 방법을 미리 귀뜸해 보냈다. 춘추공을 빼다 박은 젊은 신라의 장수 김인문을 마주한 측천무후는 신라의 선물보다 인문의 외모에 더욱 빠져들었다. 인문의 외모가 측천무후의 눈에 들면서 인문은 당나라에서 뼈를 묻어야 할 운명으로 진작 낙점됐다. 측천무후의 꼭두각시가 된 당의 고종 이치는 김인문에게 태종 때처럼 30만 대군의 지원과 백제, 고구려 공격을 약속했다. 김인문이 백제와 고구려를 공격하는 당나라군사의 선봉장이 되었지만 측천무후의 부름으로 전쟁 중에 당으로 되돌아 가야했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에 이르게 하고 신라 삼국통일을 이룩한 배경에는 김춘추의 정치적 계략과 김유신 장군 등의 뛰어난 전술전략 외에도 측천무후의 지원이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춘추공을 지원하는 세력은 다방면에 있었다. 그를 직접 왕좌에 앉게 한 김유신 장군은 가장 큰 언덕이었다. 또 그의 장성한 아들들도 그를 지원하는 든든한 울타리가 됐다. 그와 결혼한 김유신의 동생 문희도 춘추의 전쟁과 정치적 행보에 크게 도움이 됐다. ◆김춘추의 복수백제 의자왕이 집권 초기 내부의 권력 기반을 다지고, 외부적으로 신라를 침략해 연이은 승전고를 울리며 자신의 역량을 과시했다. 그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해 미후성 등 40여 성을 함락시켰다. 이어 윤충을 보내 신라의 전략적 요충지인 대야성을 공격해 성을 빼앗았다. 이때 대야성의 성주로 있던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과 춘추의 딸이 죽음을 당했다. 선덕여왕 11년 642년, 김춘추가 서른아홉이었던 어느 날의 비보였다. 딸의 사망 소식을 들은 김춘추는 기둥에 기대서서 삼일간이나 눈도 깜빡이지 않고 슬퍼하며 복수를 다짐했다. “슬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멸하지 못하겠는가”라고 울부짖으며 백제를 멸망시키겠다고 결심했다. 전화위복, 새옹지마의 사자성어를 되새기게 하는 일이 됐다. 김춘추의 비운은 연속적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아픔과 고통이 춘추로 하여금 자신의 앞길에 대해 보다 깊은 성찰을 하게 했다. 특히 춘추는 성골이 아닌 진골로서 힘을 받기 위해서 제3의 세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전략을 선택해야 했다. 결국 김유신의 가야세력과 연합도 정략적인 결혼 등으로 두텁게 이뤄졌다. 춘추는 선덕왕 16년(647년)에 일어난 상대등 비담의 반란을 김유신과 협력해 진압하는데 성공했다. 춘추로서는 매우 뜻깊은 승리였다. 반란의 와중에 선덕여왕이 죽었다.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김춘추와 김유신으로서는 차제에 왕위까지 노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진덕여왕을 왕으로 추대하고 더욱 시기가 무르익기를 기다렸다. 든든한 배경을 마련한 김춘추는 고구려, 왜, 그리고 당나라를 직접 방문하며 목숨을 건 외교전을 벌인 끝에 결국 당나라와 군사연합을 맺는 데 성공했다. 김춘추는 654년 51세가 되는 해에 김유신을 등에 업고 왕위에 올랐다. 춘추로서는 서둘러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왕위계승의 합법성이나 정당성의 확보, 율령정치 강화 등의 제도적 정비를 서두르면서 즉위한 다음 해 바로 아들 법민을 태자에 책봉했다. 무열왕 춘추는 660년 일등공신 김유신을 최고의 관직인 상대등으로 임명했다. 이어 백제에 대한 복수의 전쟁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당 태종 때 다짐받았던 군사지원 약속을 고종 즉위에 따라 무열왕은 아들 인문을 보내 다시 촉구했다. 김인문은 아버지 무열왕의 계략을 받아 임무를 훌륭히 수행했다. 태종의 후궁이었던 측천무후가 고종의 황비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틈을 노려 군사지원 약속을 얻어냈다. 신라는 당나라의 소정방이 김인문을 앞장군으로 삼아 13만 명의 대군으로 백제를 공격하자, 무열왕은 복수의 칼을 들고 직접 김유신 장군과 태자 법민 등 장군들을 대동해 5만 명을 이끌고 백제를 압박했다. 7월에는 김유신이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이 이끄는 5천 명의 백제군을 격파하고 당군과 연합해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을 함락시켰다. 이어서 웅진성으로 피난했던 의자왕의 항복을 받아내고 마침내 전쟁의 마침표를 찍었다. 춘추의 비원이 18년만에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무열왕 김춘추는 꿇어앉은 백제의 의자왕과 딸을 베었던 윤충을 죽일 듯 쏘아보면서 가슴 속 깊이 응어리졌던 피를 토해내듯 울부짖었다. 무열왕은 소정방이 있는 곳이라 의자왕은 함부로 어쩌지 못하고, 큰 칼을 휘둘러 윤충의 머리를 뎅겅 베었다. 백제의 700년 역사가 폐막하고 무열왕 김춘추가 딸과 사위의 복수를 18년 만에 이룩하는 일이었다. *신라사람들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