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경덕왕 시대에 활약했던 표훈 대사는 흥륜사 금당십성 중의 일인이자 의상 대사의 10대 제자에 속하는 화엄종의 고승이다. 표훈은 오진, 지통, 진정, 진장, 도융, 양원, 상원, 능인, 의적 등과 함께 의상 대사의 10대 제자로 분류된다. 의상은 표훈을 수제자로 받아들여 그가 터득한 모든 것을 전수한 수발제자로 삼았다. 표훈 대사는 불국사에 주석하고 있었는데, 그는 천궁을 자유롭게 내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경덕왕의 청을 받고 천제에게 태자를 낳게 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표훈은 경덕왕의 뜻을 받들어 왕위를 이을 아들을 원했지만 천제의 뜻과 달라 나름대로 계책을 마련했다. 표훈은 아무도 모르게 왕비가 낳은 딸을 아들이라 속여 왕위를 잇게 했다. 세상에 알려진 것과 다르게 신라에는 선덕, 진덕 여왕에 이어 세 번째 여왕은 혜공 여왕이다. 그러나 혜공은 김양상과 김경신의 합작품으로 시해되고, 표훈의 뜻에 따라 왕릉에 묻히지 않고 화장하여 산야에 뿌려지며 끝까지 그가 여인의 몸이었다는 것은 하늘과 자신만이 아는 비밀이 되었다. ◆표훈 대사표훈은 출생 신분이 확실하지 않다. 어릴 때부터 황복사에서 불목하니로 일하며 밝게 자랐다. 워낙 재주가 비상하고, 총명하여 한 번 들은 말은 잊어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어깨너머로 불법을 공부하고, 스스로 깨우쳐 열 살이 되기도 전에 사서삼경은 물론 불경이란 경은 모조리 외웠다. 표훈은 스스로 뛰어남을 알았지만 누구 앞에도 먼저 나서지 않았다. 의상이 황복사에 주석하며 법회를 주관할 때도 말석에서 어슬렁거리며 잔심부름을 하면서도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모조리 듣고 암기했다. 의상이 하루는 제자들과 황복사에서 탑돌이를 하는데 계단도 없는 허공을 마치 평지를 걷듯 평온하게 걸으면서 경의 이치를 설하였다. 따르는 제자들은 아무런 생각없이 오로지 스승의 법문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제자들은 허공을 걷고 있다는 사실도 깨우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를 바라본 표훈이 신기해 했다. 이에 충격을 받은 표훈은 의상대사 앞에 엎드려 절하며 제자로 받아달라고 부탁했다. 의상이 빙그레 웃으며 “너는 이미 나의 속을 알고 있고, 내게서 모든 것을 다 배워 더 배울 것이 없는데 어이하여 사제의 연을 맺으려 하는고”라고 물었다. 표훈은 “무지랭이 같은 부엌데기가 무엇을 알겠습니까만 저 혼자 하는 일이야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견딜 수 있고, 헤쳐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지 구하고자 합니다”라며 제자로 받아주길 거듭 청원했다. 그날 이후 표훈은 의상의 수발제자가 되어 의상대사가 평생 공부한 모든 것을 전수받아 세상에 전하는 전도사가 되었다. 표훈은 잠을 자지 않고 공부에 매달렸다. 3년이 지나지 않아 모든 것을 깨우친 듯 스승에게 ‘오관석’이라는 시를 올렸다. “나는 여러 연(緣)으로 이루어진 존재/ 여러 연은 나로써 연을 이루었네// 연으로 이루어진 나이기에 체(體)가 없고/나를 이룬 연에도 성(性)이 없네.” 의상 대사는 오관석을 받아 읽고는 크게 웃으면서 “네게 법을 인가하노라”는 말을 남기고 부석사로 옮겨갔다. 의상이 부석사로 돌아가고, 황복사에 남은 표훈은 법당에서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더니 어느 날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삼국유사 속의 표훈 대사경덕왕은 아버지 성덕왕과 형 효성왕이 귀족들의 세력에 휘둘려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펼칠 계획을 골똘히 공부해왔다. 또 경덕왕은 주변에 신충, 충담, 월명, 표훈과 같은 뛰어난 재주를 가진 신하들을 가까이 두고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세우는데 많은 도움을 얻었다. 특히 집권 하반기 불교정책을 통해 통치이념을 정립하고, 백성들의 평안을 위한 불교의 확산에 대해서는 표훈에게 많이 의지했다. 삼국유사는 아들을 낳아 적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은 욕심으로 가득 찼던 경덕왕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경덕왕은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왕비를 폐위시키고 사량부인에 봉하였다. 후비는 만월부인인데 시호가 경수태후로, 각간 의충의 딸이었다. 왕이 하루는 표훈 대덕을 초대해 “짐이 복이 없어서 대를 이을 자식을 얻지 못하였소. 원하건대 대덕께서는 상제께 청해 아들을 가질 수 있게 해주시오”라고 말했다. 그래서 표훈은 천궁을 다녀와 왕에게 “천제께서 말씀하시기를 딸은 가능하지만 아들은 안된다고 하십니다”고 아뢰었다. 왕이 다시 “원하건대 딸을 남자로 바꿔달라고 해주시오”라고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다.표훈이 다시 천궁으로 올라가 청하자 천제가 “그렇게 하려면 할 수는 있다. 하지만 남자가 된다면 나라가 위태로울 것이다”고 말했다. 표훈이 땅으로 내려가려고 할 때, 천제가 다시 불러 “하늘과 사람 사이를 어지럽힐 수는 없다. 그런데 지금 대사는 하늘과 땅을 이웃 마을 오가는 것처럼 다니며 천기를 누설했으니, 지금부터는 다니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표훈이 돌아와서 천제의 말을 자세하게 설명했지만, 왕은 “나라가 비록 위태로워진다 해도 남자 아이를 얻어 대를 이을 수 있다면 만족할 것이오”라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만월부인은 태자를 낳게 되었고 왕은 매우 기뻐하였다. 태자 나이 8세에 왕이 타계하고 태자가 왕위에 올랐으니 이가 바로 혜공대왕이다.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태후가 조정에서 업무를 보았지만 정치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자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막아내기도 어려운 실정이었다. 표훈의 말대로 나라가 위태롭게 된 것이다. 어린 제왕은 원래 여자를 남자로 바꾼 것이었다. 그래서 첫돌부터 왕위에 오르기까지 늘 여자 아이들의 놀이를 하면서 놀았다. 비단 주머니 노리개 차기를 좋아했고 도사들과 어울려 놀곤 하였다. 그래서 나라는 크게 어지러워졌고, 마침내 김양상과 김경신에게 시해되었다. 표훈 이후로는 신라에 다시는 성인이 태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표훈 대사의 결심경덕왕이 아끼는 신하 신충이 밤이 이슥한 시간 퇴청하는 길목에서 희끗하나 남루한 승복을 걸친 도인을 만났다. 남천 월정교 아래로 흐르는 물에 한쪽 발을 담그고 있던 도인이 “무거운 짐을 혼자 지고가려니 어깨가 늘어지는 것 아니오”라며 핀잔하듯 농을 하듯 선문답하듯 어깨가 축 처진 신충에게 한 마디 던졌다. 신충이 얼핏 보아도 얼굴에서 넘치는 여유와 재기가 가득한 도인이라 반갑게 다가가 “남의 일이라도 내일처럼 거들어주실 것 같은데 저와 같이 가서 즐겁게 밥먹듯 일이나 해봅시다”며 일으켜 세웠다. 그날부터 표훈 대사는 신충의 식객이 되어 바둑을 두기도 하고, 경을 논하기도 하면서 국사에 대한 크고 작은 일을 서로 의논하기 시작했다. 표훈이 나이는 많았지만 겉으로는 신충과 비슷하게 보였다. 신충 또한 타고난 무인체질에다 많은 일을 하면서도 운동으로 신체를 단련해 환갑줄에 있었지만 불혹의 나이로 볼 정도였다. 표훈은 이미 여든을 훌쩍 넘었지만 수련의 깊이가 워낙 깊어 신체를 보아 나이를 가늠할 수는 없을 정도였다. 표훈은 혈사에서 혼자 수련하는 동안에도 전국을 수시로 떠돌아다니면서 어려움에 처한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일을 하곤 했다.그러다 신라의 국운이 걱정되어 경덕왕을 돕는 충신 신충을 통해 궁궐로까지 들어왔다. 표훈은 신충과 더불어 백성들의 평안을 위한 많은 정책을 기획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경덕왕을 도왔다. 나라가 어느 정도 안정적인 궤도에 오르자 신충은 병을 핑계로 벼슬을 내려놓고, 왕의 일은 표훈에게 넌지시 짐을 떠맡겨버리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단속사를 짓고 속세를 떠났다. 이때 경덕왕이 표훈을 불국사에 주석하도록 하고는 이런저런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의견을 물어오곤 했다. 표훈은 김대성에게 불국사를 건축하는 일에 대해 하나부터 열까지 일러주었다. 이때 표훈이 걱정하던 왕위를 이을 아들을 얻는 문제를 경덕왕이 은근히 부탁해 왔다. 표훈은 이미 천제의 뜻을 간파하고 있었던 터라 경덕왕을 속이기로 했다. 경덕왕은 왕위를 물려줄 후사가 필요한 것이므로 딸이라도 아들이라고 속이면 그만일 것이라 판단하고 표훈은 철저하게 준비를 했다. 표훈은 경덕왕의 부탁을 들어주는 척하며 천궁을 오가며 그가 기획한 각본대로 공주를 아들로 키워나가는 계획을 하나씩 풀어나갔다. 왕비가 해산할 날이 다가오면서 주변에는 침모조차 물리고 아이를 받을 여인, 표훈이 가르친 제자 하나만을 남겨두었다. 해산할 때에는 왕도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 표훈은 “왕의 아들은 하늘이 내린 천자이므로 누구도 그의 신체를 보아서는 아니됩니다”라고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그리고 왕자를 돌보는 제자에게도 주변 누구에게도 누설하지 않도록 철저하게 함구령을 내리고, 왕자 자신도 여자의 몸을 타고 태어난 하늘의 아들이므로 여자라고 생각조차 해서는 안된다고 주문을 걸었다. 이렇게 태어난 경덕왕의 딸은 이름을 건운이라 짓고, 철저한 베일에 가려져 아들처럼 키워졌다. 경덕왕이 765년 사망하고, 건운은 8세에 혜공왕으로 즉위해 15년간 남자처럼 왕위를 이어갔다. 혜공왕은 표훈 대사의 절대적인 힘을 입어 혼란 속에서도 15년간 왕위를 이어왔지만 결국 780년 신하의 칼에 죽음을 맞이했다. 표훈은 혜공왕이 죽음을 맞을 것이라는 것도 이미 예견하고, 반란이 일어나기 1년 전에 금강산으로 들어가 표훈사를 건립하고 다시 세상과 등졌다. *신라사람들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