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5대 파사왕은 석탈해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3대 유리왕의 아들 또는 유리왕 동생의 아들로 전한다. 80년부터 112년까지 32년 간 신라를 다스리며 나라를 안정적으로 운영했다. 또 백제와 가야 등 연접한 나라들과의 잦은 전쟁으로 어려운 시기에 영토를 확보하며 신라를 진정한 고대국가의 형태로 자리잡게 한 왕으로 평가된다. 파사왕은 특히 신라 1천 년의 왕궁 월성을 지어 나라의 안정적인 기틀을 마련했다. 백성들을 사랑해 직접 전쟁터에 나서기도 하고, 나라 창고를 열어 백성들을 구휼했던 어진 왕이었다. 그러나 파사왕 23년인 102년에 연접한 나라들의 분쟁에 대한 심판을 가야 수로왕을 초빙해 판결하도록 한 기록을 보면 가야세력보다 당시 신라의 세력이 크게 앞서 있었다고는 보기 어렵다. 파사왕은 죽어서 오릉에 묻혔다. 파사왕의 아들이 6대 지마왕으로 왕위를 이었다. 박혁거세 이후 박씨 왕조는 김씨세력의 조력으로 왕권을 유지해 나가는 것으로 분석된다. 파사왕과 지마왕의 왕비는 모두 김씨였다. ◆파사왕신라 5대 파사왕은 80년에 왕위에 올라 112년까지 32년 간 신라를 다스렸다. 파사왕은 유리왕의 둘째 아들 또는 유리왕 동생 내로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어머니는 사요왕의 딸이고, 왕비는 허루갈문왕의 딸 사성부인으로 한기부 유력자인 김씨 계통이다. 파사왕의 군사적 치적에 근거해 이때를 고대국가의 최초로 보기도 한다. 재위 33년에 승하하자 사릉원에 장사를 지냈다. 파사왕은 검소한 생활태도로 백성들을 사랑하며 모든 일을 잘 보살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파사왕은 81년 2월에 왕이 시조묘에 제사를 지내고, 3월에 주와 군으로 돌아다니며 민심을 안정시키고 창고에 쌓아둔 곡식을 풀어 백성들을 구제하고, 사형수가 아닌 죄수들은 모두 놓아줬다. 이듬해가 되자 왕은 “지금 창고가 비고 군기가 둔하여 쓰지 못하게 됐는데 만약 큰물이 지거나 가물이 들고 변방으로 적들이 침입하면 어떻게 막를 수 있겠는가. 농사와 양잠을 권하고 군사를 단련하고 전구를 마련하여 군비를 정비해 불의에 대비하도록 하라”고 명령했다.85년에 백제가 침범해 들어왔으며 외부로부터 침략전쟁이 잦아 왕은 87년 “백성들의 편안한 삶을 위해 성루를 구축해 외적이 침범하는 것을 대비하도록 하라”며 가소성과 마두성을 축조하도록 했다.94년에 가야의 군사들이 마두성으로 쳐들어와서 포위하자 왕은 아찬 길원에게 이를 막도록 했다. 길원이 군사 1천 명을 거느리고 나가 적을 격파 퇴주시켰다. 96년에도 가야군사가 쳐들어와 백성들을 살상하자 왕이 친히 5천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나가 물리쳤다.파사왕은 외적의 침입이 잦아 이에 대비하기 위해 101년 2월에 궁성을 쌓아 월성이라 이름하고 7월에 월성으로 이주했다. 102년 음즙벌국(현 안강)과 실직곡국(현 삼척)이 서로 지경을 다투다가 왕에게로 와서 이를 판결해 달라고 청했으나 왕은 어려운 일이라 말하고 금관국 수로왕을 청해 판결하도록 했다. 이때 왕은 6부에 명하여 모이게 하고 수로왕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그런데 5부에서는 모두 이찬으로서 접빈주를 삼았으나 한지부에서만 벼슬이 낮은 자로 접빈주를 보내왔다. 수로왕은 크게 노해 돌아가면서 탐하리에게 명하여 한지부 부주인 보제를 죽이게 했다. 탐하리는 보제를 죽이고, 도망하여 음즙벌국주 타추간의 집에 피신해 있었는데 파사왕이 사자를 보내어 탐하리를 수색했다. 그러나 타추가 탐하리를 보내주지 않자 왕은 군사를 일으켜 음즙벌국을 정벌하니 타추는 무리를 거느리고 항복했다. 이에 실직과 압독(경산) 두 나라도 항복했다. 106년 정월에 왕은 압독에 순행해 빈궁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3월에 압독으로부터 서울로 돌아왔다. 8월에 왕은 마두 성주에게 명령하여 가야를 정벌했다. 108년 5월에 큰물이 지고 백성들이 기근이 심하므로 왕은 열 개의 도에 사자를 파견해 곡창을 열어 백성들을 구제했다. 한편 군사를 일으켜 비지국(현 창녕), 다벌국(현 대구), 초팔국(현 초계)을 정벌해 이를 병합했다. 111년 4월에 궁성 문이 스스로 무너지고 5월부터 7월에 이르기까지 비가 오지를 않았다. 113년 10월에 왕이 죽어 사릉구역에 장사했다. ◆천년왕궁 월성신라 천년의 서울은 서라벌이다. 서라벌이라는 말이 요즘의 서울이다. 신라의 서울 서라벌은 천년의 역사를 곳곳에서 당시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것을 마주할 수 있다. 월성은 신라 왕궁이 있었던 터이다. 반달 모습을 닮아 반월성, 월성으로 불렸다. 더러는 재성, 신월성, 만월성이라고 불리기도 했던 왕족이 거주했던 곳이라 전한다. 월성은 신라시대 왕궁이 있었던 곳으로 5대 파사왕이 101년에 축조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에서 나타난다. 월성 이전에 왕이 거주했던 곳은 금성이라고 전하지만 정확하게 금성의 위치는 어디인지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월성은 자비왕부터 소지왕까지 475년부터 487년까지 12년에 걸쳐 보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백제와 고구려의 침략전쟁이 잦아 월성의 수비기능 보강을 위해 해자 축조 등의 필요성이 제기됐던 것으로 보인다. 월성 보수 기간에는 명활성이 궁성으로 활용했다. 월성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15년부터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발굴조사에서 월성 내부에 관청으로 짐작되는 건물지와 기와, 인골, 목간, 동식물의 식상 흔적 등이 다양하게 출토됐다. 특히 서문지에서 제사용으로 받쳐진 것으로 보이는 남녀 성인 인골이 발견돼 학계에서도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전설처럼 전해오던 제사에 사람을 제물로 바친 이야기가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확인돼 이목이 집중되고 있으며 발굴작업에 더욱 신중을 기하게 한다. 월성은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왕궁으로 기능했다. 고려에 합병되면서 월성은 거의 폐기되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도시의 중심도 월성에서 경주읍성으로 옮겨갔다. 지금의 월성은 낮은 분지, 빈터로 황량한 벌판으로 남아있다. 사극 드라마나 영화 촬영을 위해 분장한 배우들이 복잡한 장비를 대동하고 드나들거나, 옛 영화를 느껴보려는 방문객들의 발걸음, 산책하는 시민들의 호흡이 흐를 뿐이다. ◆스토리텔링: 파사왕의 전쟁파사왕 당시 신라는 백제와 가야, 왜, 고구려 등 사방에서 공격을 당하는 사면초가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특히 수로왕이 다스리고 있는 가야의 세력은 막강해서 신라는 물론 백제에까지 위협적이었다. 신라 또한 고대국가 체제로 정비하지 못하고, 부족연맹 형태로 서라벌을 중심으로 경산, 영천, 영일, 합천, 밀양, 청도, 안강 등 주변부족들이 서로 다투면서 간헐적으로 신라를 공격하는 형국이었다. 파사왕은 나라를 좀 더 강하게 만들어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파사왕은 먼저 육부촌장들을 불러 대책회의를 열었다.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한 전략회의였다. 가장 먼저 백성들이 배부르게 먹고 살 수 있게 식량 증산을 위해 양잠과 농기구 제작, 어업전략 등의 대책을 마련해 공동으로 대응하게 했다. 이어 효율적인 국정 수행을 위해 각부에서 유능한 인력을 차출해 줄 것을 당부했다. 군사적 책략이 뛰어나면서 병법을 잘 구사하는 길원, 백성들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윤랑, 축성 등의 기술이 뛰어난 장세, 계기, 명선, 박물품 등의 인재들을 등용해 적절한 업무를 맡겼다. 이러한 인재 등용을 통한 조직 정비와 과감한 전쟁을 통해 인근지역의 부족들을 병합해 영토를 확장하며 신라의 국가적 형태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팽창하는 금관가야와도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며 수로왕의 간섭을 오히려 단호하게 배척하는 힘을 과시하기도 했다. 수로왕이 수족처럼 부리던 신하 탐하리가 육부촌 한지부의 부족장을 살해하고 도주하자 끝까지 추적해 죽이며, 그를 감추어주던 음즙벌국까지 토벌해 복속시켜버렸다. 파사왕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치력은 육부촌장들을 비롯한 연접한 부족들을 오히려 결집시키며 강한 나라로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파사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지마왕, 일성왕도 직접 전쟁에 나서는 등을 백성들을 보살피며 신라의 힘을 점점 키워나갔다. *신라사람들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