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수레 버리고 거친 베옷 걸친 후/ 수행하려 바다 건너 구화산에 이르렀네/ 이몸 원래 신라 왕의 아들이었지만/ 도를 닦다 오용지란 사람 만났다네/ 문 두드려 미처 다른 이야기도 못했는데/ 어제는 쌀을 보내주고 새벽밥까지 지어줬다네/ 오늘은 황금 같은 저녁밥까지 먹었으나/ 배부른 것 잊고서 지난 주린 날들 생각하리라.’ 성덕왕의 아들 중경태자가 구화산에서 수도하면서 지은 시다. 신라 성덕왕의 큰 아들 중경태자는 정치적 세력의 압력에 밀려 태자의 신분을 버리고 도망자가 돼 우여곡절을 겪으며 중국 구화산에 이르렀다. 중경태자가 암굴에서 먹는 것조차 끊고 밤낮으로 수련에 매진하는 모습에 감탄한 아랫마을 오용지라는 농부가 태자의 수발을 들었다. 이러한 소식을 접한 사람들이 태자의 가르침을 받고자 몰려들어 화성사라는 절을 지었다. 중경태자가 깨달음을 얻어 중생들을 위한 고행을 하면서 99세의 일기로 구화산 화성사에서 입적해 등신불이 됐다. 구화산 화성사는 자존심 높기로 이름난 중국 4대 불교성지로 손꼽히고 있다. 중경태자는 신라인의 자긍심을 무한으로 높였다. ◆중경태자성덕왕이 귀족들의 추천으로 즉위해 귀족들의 움직임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그들의 세력에 휘둘려 자신의 의지대로 정치를 펼치지 못했다. 결국 성덕왕은 귀족들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해 왕비를 맞는 일조차 귀족들의 핵심에 있었던 김원태의 딸을 성정왕후로 맞아들여야 했다. 성덕왕은 성정왕후와의 사이에 태자 중경과 수충 형제를 낳았다. 겉으로는 통일신라 이후 가장 평화로운 시기를 맞아 중경태자는 세상의 복이란 복은 모두 타고난 행운아로 보였다. 그러나 그러한 복도 오래가지 않았다. 귀족들의 세력다툼에 성덕왕의 힘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성정왕후가 밀려나고, 성덕왕은 김순원의 딸을 두 번째 왕비로 맞아들여야 했다. 두 번째 왕비 소덕왕후가 승경을 낳자 그를 태자로 삼았다. 당시 신라는 삼국통일을 이루고 당나라와의 전쟁도 잠잠해 백성이 전쟁의 고통에서 벗어나 농업과 상업 등의 생업에 몰두할 수 있는 평화의 시대가 이어지고 있었다. 반면 궁궐에서는 왕권을 둘러싸고 권력 다툼이 내적으로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효소왕을 17세에 몰아내고 성덕왕을 왕위에 올린 세력들은 다시 주도권 싸움을 시작했다. 이찬 김순원은 일찍이 자신의 딸 소덕을 후궁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성덕왕 15년에 중경과 수충을 낳은 성정왕후를 외척세력의 정치적 영향력을 잠재운다는 등의 이유로 궁에서 내보냈다. 다음해인 717년 중경태자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성덕왕은 집권 7년을 넘어서면서 왕으로서의 권위보다 백성의 안위를 걱정하는 성군으로 소임을 다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지역을 직접 돌아보는 행보를 자주 가졌다. 그리해 자연스럽게 궁내의 일에는 소홀하게 됐다. 결국 왕비를 내쳐야 하는 입장에 처하게 되면서 태자의 안위까지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성덕왕은 김순원 세력의 정치적 압력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면서 태자인 아들 중경의 생명이 위험함을 직감하고, 중경을 내실로 불러 눈물의 이별을 고했다. “아들아, 아비가 못나 너를 편하게 돌보지 못하게 되었구나. 비밀호위 일곱을 각자 너로 분장해 중국으로 피신하게 할 터이니 그중 하나와 승려로 위장해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거라. 다시는 신라로 돌아올 생각도 말고.” 어머니의 죽음까지 묵묵히 지켜본 중경은 왕인 아버지의 늘어진 어깨를 힘없이 바라보다 엎드려 절을 올리고는 돌아섰다.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산소에 절을 올린 중경은 호위무사 김진과 함께 유람하듯 오히려 추적자의 뒤를 밟으며 중국으로 도망가는 유학의 길에 올랐다. 중경의 뒤를 추적하던 김순원의 살수들은 하나같이 중국 경계지역에서 초죽음이 되도록 얻어맞고 ‘더이상 추적하지 마시오. 나는 살아서는 신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오’이라며 목간을 받아들었다. 김순원도 일곱 갈래로 추적했던 대원들이 같은 소식을 들고 돌아오자 추적을 포기했다. 성덕왕은 거짓 신분을 위장한 시신을 화장하고 태자가 죽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김순원 세력도 태자에 대한 의혹을 추궁하지 않고 태자의 사망 소식을 공식화하는데 동의했다. 이어 자신의 딸을 소덕왕후로 삼게 했다. 김순원의 권력에 대한 집착은 갈수록 심해져 성덕왕이 죽자 소덕왕후의 아들을 34대 효성왕에 오르게 했다. 또 그는 다른 딸을 효성왕에게 시집보내 왕후로 삼게 했다. 효성왕은 결국 이모와 결혼해 왕비로 삼아야 했다. 중경은 이름을 김교각으로 바꿔 도망할 때 입었던 승복을 그대로 걸치고 수도에 정진했다. 그는 구화산에서 화성사를 지어 불법을 전파하는데 열중했다. 김교각의 명성이 지장보살로 널리 퍼지면서 그의 설법을 듣기 위해 신도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김교각은 794년 99세 되는 어느 날 마지막 설법을 하고 참선하면서 조용히 입적했다. 그의 시신이 3년이 지나도록 썩지 않아 등신불이 됐다. 구화산 지장보전에는 아직도 그의 등신불이 봉안 돼 있다. 성덕왕이 첫 번째 왕비를 내치고 김순원의 딸을 두 번째 왕비로 맞이하고, 성덕왕의 아들 34대 효성왕도 김순원의 딸을 왕비로 맞아야 했다. 김순원의 권력이 조정의 중심에 있었던 신라 귀족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중국의 지장보살로 추앙받고 있는 김교각은 성덕왕의 큰아들이라는 기록이 여러 곳에 남아있다. 김교각 지장의 본래 이름이 중경이었다는 기록과 성덕왕의 첫 번째 세자 중경이라는 이름이 일치하는 것으로 미루어 김교각이 성덕왕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지장보살 김교각성덕왕은 형인 효소왕이 왕위에서 물러나고 정치적 세력들의 입김에 힘입어 33대 왕으로 즉위했다. 성덕왕도 정치적 실권을 잡은 김순원의 강압에 의해 성정왕후를 폐하고 김순원의 딸을 소덕왕후로 맞이했다. 이어 성덕왕은 폐위된 왕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큰 아들 김중경을 태자로 봉하고 있었지만 김순원의 노골적인 실력행사 때문에 태자를 폐하고, 아무도 모르게 중경을 중국으로 도망하게 했다. 승려로 위장한 태자 중경은 호위무사들의 눈먼 호위를 받아가며 김순원의 병사들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며 중국 구화산으로 무사히 도망하게 된 태자는 불도의 공부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중경은 신라의 구중궁궐에서 불편함을 모르고 공부하던 시간, 왕비 어머니의 자상하고 인자했던 모습, 늑대와 이리떼 같던 귀족들의 모습이 번갈아 나타나는 번뇌의 시간을 동굴 속에서 맞이하며 고뇌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중국으로 건너오기 전 기림사 혈사에서 경험했던 무념무상의 세계가 한순간에 날아가버리고, 천리만리를 떠나온 구화산에는 사시사철 눈이 내렸다. 중경은 설산에서 또 새로운 경험을 하며 수련에 매달렸다. 먹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무념무상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을 때 눈 뭉치가 툭하고 중경의 어깨를 때리고 부서지는 순간 중경의 머리가 환하게 밝은 빛으로 빛나면서 암굴 전체를 불바다처럼 밝혔다. 이러한 순간이 반나절이나 지속됐는데 중경스님의 안위가 걱정 돼 밥을 지어 오던 착한 농부 오용지가 이를 보고 깜짝 놀라 그 자리에 멈춰선 체 한동안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이내 중경스님이 득도해 일어난 일이라는 사태를 알아차리고, 오용지는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108배를 올렸다. 중경은 이름을 김교각으로 바꾸고 구화산에서 중생구제에 나섰다. 중경의 득도한 사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자 전국에서 중경의 가르침을 얻고자 구름같이 인파가 몰려들었다. 신도들이 구화산에 화성사를 지어 중경스님의 말씀을 들으며 불교를 공부하고 전파하려는 신도들이 구화산 일대를 메웠다. 중국 각처에서 공부가 깊어진 김교각의 설법을 듣기 위해 군중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어 화성사는 성지가 됐다. ◆구화산의 차나무태자 중경은 급하게 짐을 꾸려 무사 김진과 궁궐을 벗어났다. 태자 중경으로 변장한 7팀이 각자 궁궐을 떠난 며칠 뒤여서 여유롭게 행보할 수 있었다. 진짜 중경은 허를 찔러 오히려 남쪽으로 도주의 방향을 잡았다. 진작부터 중경은 기림사의 원보대사에게 의탁하기로 아무도 모르게 약속이 돼 있었다. 원보대사는 이미 광유선승이 남긴 비기를 익혀 깊이를 모를 정도로 세속을 탈속한 듯한 도승으로 발전해 있었다. 도승 원보는 중경태자를 맞아 안전하게 마음을 수련할 수 있는 혈사를 마련해 두고 있었다. 세상의 아무도 모르는 광유선승이 수련하다 입적한 곳이자 원보대사가 죽음을 앞두고 탈속의 비기를 익힌 곳이기도 하다. 중경은 처음 원보를 만났을 때는 다소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으나 타고난 재질로 원보대사의 지도를 받아 금방 안정적인 자세를 가다듬었다. 중경은 원보대사의 가르침을 빠르게 받아들였다. 원보대사가 놀랄 정도로 중경의 배우는 속도는 뛰어났다. 중경이 궁궐에서 있을 때부터 이미 공부한 깊이가 있었지만 워낙 타고난 재질이 뛰어나 무엇이든 한 번 보고, 들으면 잊어버리지 않는 기억력까지 갖췄다. 무예를 익히는 신체적인 발육상태 또한 탁월해 중경은 기림사 혈사에서 수련을 시작한 지 3년에 이르는 때 이천통을 깨우치는 놀라운 기질을 보였다. 세상 누구도 중경을 무력으로 제압할 수 없는 정도에 이른 것이다. 원보대사는 중경을 불러 “태자의 배움은 이제 누구로부터도 얻어낼 것이 없습니다. 단지 스스로 한계를 뛰어넘어야 하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며 중국 오대산의 기오선승을 소개했다. 중경도 스스로의 배움에 대한 척도를 이해하고, 중국으로 유학을 마음먹고 있었다. 중경은 자신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데 많은 역할을 한 차나무의 씨앗을 보자기에 담아 중국으로 떠났다. 그 길이 구화산에서 등신불 신화를 만들어낸 첫 걸음이 됐다. 김교각은 신라에서 가져온 차씨를 구화산에 번식시키며 차문화를 발전시키기도 한 것으로 기록이 남아있다. 김교각 지장보살은 중국에서도 왕족으로 알려지고 있는, 신라가 낳은 유명 인물이 됐다. 지금도 중국에서는 김교각을 마치 살아있는 부처님 모시듯 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를 기념하거나 추념하는 등의 행사는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이다. *신라사람들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