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곡군, ‘향덕 스님’ 에티오피아 보은 사업 홍보대사 위촉

“달마 스님은 대한민국을 위해 동쪽으로 갔듯이 저는 6·25 참전국 에티오피아를 위해 칠곡군으로 왔습니다.”승복 입은 외교관이라 불리며 아프리카 국가와 활발한 민간 외교활동을 펼쳐온 울산 천만사 주지 향덕 스님이 칠곡군이 추진 중인 에티오피아 보은 사업에 힘을 보탠다.칠곡군은 14일 향덕 스님을 ‘칠곡군 에티오피아 보은 사업 홍보대사’로 위촉, 임명장을 전달했다고 밝혔다.향덕 스님은 “전국의 모범이 되고 있는 칠곡군의 민간주도 해외 보은 사업에 힘을 보태게 된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군은 2014년부터 6·25 참전국 에티오피아 돕기에 나서고 있다.특히 에티오피아에 학교와 도서관 건립, 마을수도 설치 등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각종 시설을 지원하고 에티오피아 6·25 참전용사 초청행사와 더불어 현지에서 참전용사 동상을 건립하고 참전 주기 기념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이에 따라 에티오피아 정관계에 형성된 향덕 스님의 폭넓은 인맥을 통해 칠곡군이 에티오피아 보은 사업을 수행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백선기 칠곡군수는 “대한민국을 위한 호국과 보훈은 국경이 없다”며 “향덕 스님을 비롯한 많은 분들과 힘을 모아 칠곡형 에티오피아 보훈 사업을 차질 없이 추진해 나가겠다”고 밝혔다.이밖에 칠곡군과 ‘문화·관광·보훈 교류 협력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한 주한에티오피아 대사관도 향덕 스님의 홍보대사 임명 소식을 반겼다.쉬페로 쉬구테 주한에티오피아 대사는 “향덕 스님의 홍보대사 임명은 칠곡군과 에티오피아의 우호 증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한편 에티오피아는 6·25 전쟁 당시 황실근위대인 각뉴부대 6천37명을 파병했다. 전사자 121명을 포함 657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253차례 전투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며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는데 앞장섰다. 이임철 기자 im72@idaegu.com

청송 보광사 주지 무구스님, 장학금 300만 원 기탁

대한불교조계종 청송 보광사 주지 무구스님은 지난 11일 청송군인재육성장학회에 300만 원의 장학금을 기탁했다.보광사는 668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유서 깊은 사찰이며 무구스님은 지난 2015년부터 현재까지 총 900만 원의 장학금을 기탁했다.임경성 기자 ds5ykc@idaegu.com

삼국유사 기행<114>선율환생

선율스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돌아온 이야기 선율환생편은 삼국유사 감통 10가지 이야기 중 여섯 번째 소개된다. 감통편에서는 선도성모가 박혁거세를 낳은 이야기, 계집종이 부처가 되는 이야기, 친구들이 열심히 기도해 부처가 되는 이야기, 경흥국노가 부처로부터 깨달음을 얻는 이야기, 왕이 부처의 가르침을 깨닫는 이야기, 호랑이와의 인연으로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이야기, 스님이 옷을 벗어 추위에 떠는 여인을 구하는 이야기 등으로 전개된다. 이미 저승으로 잡혀갔던 선율스님이 일으키던 불사를 마치고 오라는 명을 받고 다시 이승으로 돌아오면서 또 다른 세상사를 소개하며 선행을 강조하는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세상의 선행을 은근히 불교와 연을 지어 소개하는 삼국유사의 내막을 들여다보게 하는 편이다. 숙명여대 정병삼 명예교수는 감통에 대해 “한 사람의 행동이 상대방에게 감동을 일으키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며 “생각이 없고, 함이 없고, 고요하게 움직이지 않다가 느껴 마침내 천하의 연고에 통한다는 주역에서 연유를 찾는다”고 설명했다. ◆삼국유사: 선율이 다시 살아오다망덕사의 승려 선율은 시주받은 돈으로 600반야경을 이루고자 했다. 일이 다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저승으로 잡혀갔다. 저승의 관리가 “너는 인간세상에서 어떤 일을 했느냐?”라고 물었다. 선율이 “소승은 만년에 태품경을 만들려고 했으나 일을 다 마치지도 못하고 왔습니다”라고 답했다. 관리가 “너의 수명을 적은 장부에 의하면 네 수명은 비록 다 됐지만 좋은 발원을 마치지 못했으니 마땅히 다시 인간세상으로 돌아가 귀중한 불전의 일을 마칠지어다”라 하고는 다시 돌려보냈다. 돌아오는 도중에 어떤 여자가 울면서 그의 앞에서 절을 하고 “저 역시 남염주의 신라 사람입니다. 부모가 금강사의 논 1묘를 몰래 빼앗은 죄에 연좌돼 저승에 잡혀와 조사를 받아 오랫동안 몹시 괴로움을 받고 있습니다. 이제 법사께서 고향으로 돌아가시거든 저의 부모에게 빨리 그 논을 돌려 드리라고 말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이어 “제가 인간세상에 있을 때 참기름을 침상 밑에 묻어뒀고, 또 이부자리 속에 곱게 짠 베도 감춰뒀습니다. 부디 법사께서는 저의 기름으로 불등에 불을 켜고 그 베는 팔아 불경 베끼는 비용으로 써 주신다면 황천에서도 또한 은혜를 입어 거의 제 고뇌를 벗을 수 있을 것이옵니다”라고 간청했다. 선율이 “너의 집이 어디냐”고 물으니 “사량부에 있는 구원사의 서남쪽 동네입니다”고 대답했다. 선율이 이 말을 듣고 가다가 죽음에서 깨어났을 때에는 선율이 죽은 지 이미 열흘이나 되어 남산 동쪽 기슭에 장사를 지낸 후였다. 환생한 선율이 무덤 속에서 사흘 동안 소리를 치니 목동이 이 소리를 듣고 달려가 절에 알리자 절의 승려가 가서 무덤을 파고 그를 꺼냈다. 선율이 지난 일을 자세히 말하고는 다시 그 여자의 집을 찾아갔다. 여자가 죽은 지 15년이 지났는데도 기름과 베는 예전 그대로 있었다. 선율이 그 여자의 부탁대로 명복을 빌었더니 여자의 영혼이 와서 보답의 말을 하기를 “법사의 은혜를 입어 저는 이미 고뇌를 벗어났습니다”고 말했다. 당시 사람들이 이 소문을 듣고 놀라워하며 감동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니 불경 만드는 일을 서로 도와 완성했다.그 경은 지금 경주의 승려업무를 담당하는 관청의 창고 안에 있다. 해마다 봄, 가을에 그 경을 펴서 돌려 읽어 재앙이 물러가기를 빈다고 한다.다음과 같이 찬미한다. ‘부럽구려 우리 스님 인연 좋아서/ 떠난 영혼 옛 산천에 돌아오네/ 우리 부모 저의 안부 물으시면/ 날 위해 그 논 한 묘 돌려주라 하소서.’ ◆망덕사망덕사는 문무왕이 679년 사천왕사를 창건한 내력을 당나라 사신에게 숨기기 위해 679년에 창건했다.문무왕이 당시 급하게 지었던 사찰을 효소왕 원년인 692년에 다시 지어 완공한 것으로 전해진다. 지금도 사천왕사지 맞은편 경주시 배반동 956번지 일대 2만4300㎡ 부지에 당간지주, 금당터와 동서목탑지, 강당과 중문지, 회랑지 등의 유적이 남아있어 사적지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망덕사는 삼국유사 곳곳에 등장한다. 감통편에서는 효소왕이 망덕사 낙성식에서 허름한 차림을 하고 나타난 남산의 부처를 홀대하다 뒤늦게 알아차리고 남산을 향해 큰절을 올리고는 불무사와 석가사를 짓게한 이야기가 있다. 또 망덕사에 거주하던 선율 스님이 불사를 이어가던 중 저승으로 잡혀갔다가 다시 환생하는 이야기를 싣고 있어 주목되기도 한다. 망덕사는 1969년부터 1971년 사이 세 차례에 걸쳐 발굴해 현재의 금당터와 강당, 회랑지, 동서 목탑지 등의 유적을 확인했다. 탑이 있던 자리에는 받침돌 아래의 바닥돌과 계단의 바닥돌이 남아 있다. 동탑지에는 심초석과 대부분의 주춧돌이 원래의 위치에 그대로 남아 있다. 중문터와 동서 회랑은 받침 부분의 범위가 확인된 정도지만, 회랑은 일부 자연석 또는 벽돌로 된 받침돌만 확인됐다. 특히 금당과 회랑 사이에는 익랑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해 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강당터는 훼손이 심하여 받침 부분의 흔적조차 확인할 수 없으나, 주변에서 발견된 유구로 보아 조선시대까지 향불이 이어져왔을 것으로 추정된다.중문 앞 경사진 곳에는 비교적 상태가 양호한 거대한 돌계단이 불국사의 경우와 같이 중문 앞에 계단을 설치하는 양식을 보여준다. 사천왕사를 마주 바라보며 우뚝 서있는 당간지주는 보물 제69호, 망덕사지 일대는 사적 제7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돌아온 선율 스님죽어 장례를 치른 지 열흘이나 지난 선율 스님의 무덤에서 사람 살려달라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망덕사 금당을 울렸다. 염불을 외고, 탑돌이를 하던 스님과 신도들이 깜짝 놀라 선율 스님의 무덤으로 달려갔다. 무덤 안에서 여전히 “나를 꺼내주시오”라는 쉰 목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진 스님과 마을 사람들이 더러는 손으로, 더러는 나무막대기로 무덤을 파헤쳤다. 관 뚜껑을 열어제치자 아무런 일 없었던 듯이 죽었던 선율이 흙을 툭툭 털며 일어나 잠시 앉아있다가 예사롭게 걸어서 망덕사로 돌아왔다. 환생한 선율 스님은 죽기 전에 하던 경전 만드는 일을 잠을 설쳐가며 계속했다. 틈틈이 아무도 모르게 마을로 나가 사람들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전해주며 잘못을 뉘우치게 했다. 모두 저승에서 만난 사람들에게서 들은 부탁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었다. 선율이 저승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마가 반듯하고 이목구비가 선명한 처녀가 앞을 가로막으며 간절하게 부탁했다. “스님 저도 망덕사 맞은편 남염주에 살던 사람입니다. 죄지은 제 아버지를 대신해 결혼을 앞두고 죽은 몸이 됐습니다”라며 처녀가 처했던 일을 고해 바치며 아비의 잘못을 되돌리고, 자신이 받은 예물을 청년에게 돌려주고 다른 처녀를 맞아 혼인하라는 뜻을 전해달라고 했다. 선율 스님은 남염주의 처녀가 살던 집을 몰래 찾아가 그 아비에게 금강사에서 훔쳐온 금향로를 되돌려주라며 딸의 안부를 전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구미시설공단, 신라불교초전지에서 행복 특강 진행

구미시설공단은 지난 15일 구미 신라불교초전지에서 행복 특강을 진행했다.이날 강사로 나선 월담스님(문수사 주지)은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시민들에게 바쁘게 살아가는 일상에서 여유를 갖고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것을 강조하고 즉문즉답을 통해 소통했다. 신승남 기자 intel887@idaegu.com

(부처님오신 날 기획)한국불교대학 대관음사 회주 우학 스님, “자신을 온전히 수양할 수 있는 뜻깊은 ‘부처님 오신 날’ 될 것”

“지금은 오히려 홀로 정진하면서 나 자신의 내면에 있는 부처를 찾기에 더할 나위 없는 기회입니다. 이는 부처님의 진리를 좇는 길이며, 동시에 코로나19라는 고통을 벗어나는 길이 될 것입니다.”창건 28주년을 맞은 대한불교조계종 한국불교대학 대관음사(대구 남구 봉덕동 영대병원네거리 인근)의 큰 스님인 회주 우학 스님은 오는 19일 불기 2565년 석가탄신일이 뜻 깊은 날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회주 우학 스님은 “내가 만든 말 중에서 ‘작불가역 내일가역(昨不可易 來日可易)’이라는 말이 있다. ‘지난날은 바꿀 수 없지만, 내일은 바꿀 수 있다’는 말이다”며 “코로나19가 발병해서 온 세상을 집어삼킨 일은 이미 일어난, 즉 지난날의 일이다. 이것은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지만 내일은 우리가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하늘과 땅 차이만큼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올해 부처님 오신 날이 큰 행사를 개최하며 함께 기쁨을 누릴 수 없어 아쉬운 마음은 들지만, 보다 자신을 수양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라고 설명했다. 큰 스님은 “거리가 연등으로 물들고 잔칫집처럼 들썩거리던 석가탄신일이 언제였던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며 “하지만 부처님을 뵙는 것만으로도 사바세계의 중생에게는 큰 환희며 기쁨이다. 오히려 의미를 되새기고, 내 마음의 부처를 찾는다면 그 어느 때보다 뜻깊은 날이 될 것이다”고 했다.한국불교대학 대관음사에서는 중생을 위해 오신 부처님에 대한 감사와 환희를 표현하기 위해 연등을 밝힌다.이날만큼은 종단을 가리고 않고 함께 불을 밝히고 세상 사람들에게 부처님 오셨음을 알리며 기쁨을 나누는 것이다.아쉽지만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코로나19로 인해 연등행렬 행사는 취소됐다.하지만 한국불교에서는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부처님께 꽃 공양을 올리고, 아기 부처님에게 청정수를 뿌리는 관불(灌佛) 의식을 행한다.관욕(灌浴)이라고도 하는 이 의식은 부처님께서 룸비니 동산에서 탄생하자 9마리의 용(龍)이 향수로 아기 부처님을 목욕시켰다는 기록에 근거하고 있다.회주 우학 스님은 “비록 봉축 법요식이 거행되지는 못하지만, 가까운 사찰을 찾아 부처님을 참배하고 관불의식이라도 하기 바란다”며 “야외에서도 의식이 진행되기 때문에 마스크만 잘 쓰고 거리두기만 지켜준다면 문제가 없다. 아쉽지만 그렇게라도 모두가 부처님 오심을 기뻐하는 날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또 코로나19로 예전처럼 절을 찾아 법문을 들을 수 없지만, 대신해 온라인을 통해 법문을 듣고 수행할 수 있다.회주 우학 스님은 코로나 시대를 맞아 모든 것들이 변화했지만 스님으로서 제일 중요한 수행은 코로나 이전이나 이후 달라진 것이 없다고 했다.2012년 문을 완전히 걸어 잠그고 하는 3년간의 무문관 수행을 마친 뒤에도 계속해서 무문관에 머물며 수행 정진 중이다.스님의 하루 일과는 코로나19로 인한 온라인 교육인 유튜브불교대학을 위해 유튜브에 게시되는 법문 준비와 촬영이 대부분이다.스님은 “코로나19 이전에는 대구큰절에서의 불교 강의와 감포에 있는 무일선원 무문관에서의 수행이 가장 큰 일과였다”며 “하지만 코로나로 불교대학의 모든 과정이 잠정적으로 중단돼 주로 감포도량에 있는 무일선원 무문관에 머물면서 매일 법문을 준비해 일주일에 한 번씩 촬영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회주 우학 스님은 코로나19 블루, 지친 일과 등으로 복잡한 마음을 비워내는 방법을 소개했다.우학 스님은 “내 주위를 한번 돌아보면 좋을 것 같다”며 “만나면 좋고, 힘이 되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의 흉이나 불평불만을 쏟아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후자의 사람이 변화될 여지가 없다면 되도록 멀리하는 것이 좋다”고 설명했다.이어 “만약 주변에 사람이 없다면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면 된다. 외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외로움을 즐기면 된다”며 “많이 가졌다고 해서 많이 행복한 것이 아니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마음에 이것저것 많은 것이 쌓이면 때로는 갈 길을 잃기도 하고 본래의 참자아를 망각하게 된다”고 덧붙였다.우학 스님은 하루에 10분이라도 좋으니 가만히 앉아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지길 조언했다.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다 보면 얼마나 많은 쓸데없는 것들을 많이 속에 쌓아두었는지 스스로가 보고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특히 욕심과 이기심, 망상 등과의 거리두기를 위해서는 ‘멀리 내다보는 지혜’를 가져야 한단다.스님은 “그러한 감정들이 당장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겠지만 욕심과 이기심에는 나쁜 과보가 따른다. 그럴만한 원인이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며 “내 모든 언행은 인연과보, 인과응보로 자기가 지은 것은 자기가 반드시 받는다. 다른 사람에 비춰 언행을 하지 말고, 아변세역(我變世易)이라 내가 변화하면 세상이 바뀐다. 반대로 내가 변하지 않으면 세상도 바뀌지 않는다. 내가 먼저 욕심과 이기심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했다.큰 스님은 올해 유튜브불교대학 구독자 수를 10만 구독, 2027년에는 100만 구독, 2041년에는 330만 구독을 목표로 한다.우학 스님은 “코로나19 이전에는 ‘천 개 도량의 건립’이 가장 큰 목표였다. 전 세계에 천 개의 도량을 건립하겠다는 바람이었다”며 “하지만 코로나 시대를 맞고 유튜브불교대학을 개설한 지금은 ‘유튜브를 통한 온 세상의 정토구현’이 큰 원이 됐다. 부처님의 말씀이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진다면 그들의 삶이 진정한 행복으로 채워질 것이다”고 웃으며 말했다.끝으로 큰 스님은 예전에 직접 쓴 ‘유아독존(唯我獨尊)’이라는 시로 부처님 오신 날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다고 소망했다.“어느 한 공간에 우뚝 서면 동·서·남·북의 방위가 이루어집니다.그러므로 나는 우주의 출발점입니다.흐르는 시계의 바늘을 보는 순간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이 갖추어집니다.그러므로 나는 삼세의 연결고리입니다.지금, 이 자리는 시방세계에 열려 있고 영겁의 세월과 맞닿아 있습니다.전 공간과 전 시간의 좌표입니다.내가 허공이 되고 내가 영원이 됩니다.방위도 시간도 내 속에서 호흡합니다.나는 위대합니다. 유아독존(唯我獨尊)입니다.”-관세음보살 한국불교대학 대관음사 회주 무일(無一) 우학 합장구아영 기자 ayoungoo@idaegu.com

팔공산 은해사, 26일 조실 추대 및 주지 고불식 가져

경북 영천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 은해사가 26일 오후 2시 육화원에서 조실 추대 및 주지 고불식을 봉행한다. 조실은 산중을 대표하는 최고 어른을 이르는 말이다.지난 2016년 6월 전임 조실 혜인스님이 입적한 뒤 4년8개월여 동안 공석으로 남아있던 은해사 조실에는 은해사 회주로 있던 중화 법타대종사가 이번에 추대됐다.법타대종사는 1965년 속리산 법주사에서 추담대종사를 은사로 득도해 승려 최초로 북한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기도 했다. 1995년 조계종 총무부장을 거쳐 1996년부터 은해사 주지를 역임했으며, 동국대 정각원장과 조계종 원로회의 의원으로도 활동했다.이날 행사에는 은해사 주지 덕관스님의 취임을 부처님께 고하는 고불식도 함께 봉행된다.덕관스님은 지난 1월15일 은해사 산중총회에서 차기 주지로 당선됐으며, 고불식을 시작으로 은해사 사찰 종무행정을 본격적으로 이끌어 나갈 예정이다.1992년 통도사에서 청하스님으로부터 사미계를 받은 덕관스님은 조계종 총무원 재무·감사국장과 보문사 주지, 불굴사 주지 등을 역임했으며 조계종 17대 중앙종회의원으로도 활동했다.한편, 은해사 관장이었던 돈명 스님의 회주 추대식도 이날 함께 거행된다.은해사는 이번 조실 추대 및 주지 고불식을 코로나19 예방과 확산방지를 위해 외부인사 초청 없이 간소하게 치르기로 했다. 문의: 054-335-3318.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경북대 철학과 BK21 사업팀, 오경스님 초청 특강 개최

경북대 철학과 4단계 BK21 사업팀(갈등해결 철학 전문인력양성 교육연구팀)은 2일 경북대 인문한국진흥관 학술회의실Ⅱ에서 정해학당 원장 오경스님 초청 특강을 개최한다.경북대 철학과 교수와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열리는 이날 특강에서 오경스님은 ‘갈등해결을 위한 불교적 모색’을 주제로 강연한다.오경스님은 서울 법련사 주지와 실상사 화엄학림 강사를 역임했다. 현재 안동 보경사 주지와 정해학당 원장을 맡고 있다.이번 특강은 BBS 대구불교방송 라디오를 통해 추후 방영될 예정이다.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삼국유사 기행<97>양지가 지팡이를 부리다

양지 스님은 삼국유사를 통해 소개하기 이전부터 녹유신장상의 복원 등으로 잘 알려진 통일신라시대 스님이다.삼국유사를 통해 양지 스님의 숨겨진 재주를 더 많이 알 수 있게 한다.스님이자 조각가, 서예가 등을 총칭한 종합예술가라고 해야겠다. 삼국유사에서 가장 두드러진 양지 스님의 이야기는 아무래도 지팡이다.석장이 혼자 자루를 걸머지고 도깨비처럼 마을을 날아다니며 탁발하는 장면은 신화 이상의 신비로움과 재미를 선사한다. 기와조각과 석재가 이곳저곳에 나뒹굴고 있는 양지 스님이 머물렀다던 석장사 터에서 영묘사 장륙존상, 사천왕상, 전각, 탑, 삼천불을 조각하고 영묘사와 법림사의 현판 글씨를 쓰는 양지 스님을 그려본다. 무엇보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와 국립경주박물관이 따로 보관하고 있던 사천왕사지에서 출토된 녹유신장의 조각을 퍼즐 맞추듯 완벽하게 재현해낸 역사적인 사건을 만나볼 수 있어 다행이다. ◆삼국유사: 양지가 지팡이를 부리다승려 양지의 조상과 고향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다만 신라 선덕여왕 대에 그의 행적이 나타났을 뿐이다.지팡이 머리에 포대 하나를 걸어 놓으면 지팡이가 저절로 시주하는 집으로 날아가 흔들거리며 소리를 내었다.그 집에서 이를 알고 재에 쓸 비용을 넣어주었고 포대가 차면 날아서 되돌아온다.이 때문에 그가 머물고 있던 절을 석장사라고 이름지었다. 그의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신이한 행적이 모두 이와 같았다.그는 여러 가지 기예에도 두루 능통하여 신묘함이 비할 데가 없었다.또 글씨와 그림을 잘 그렸다.영묘사의 장륙삼존 및 사천왕상과 아울러 전각과 탑의 기와, 사천왕사 탑 아래의 팔부신장과 법림사의 주불삼존 및 좌우 금강신 등이 모두 그가 만든 것이다. 영묘사와 법림사 두 절의 현판을 썼고, 또 일찍이 벽돌을 다듬어 작은 탑 하나를 만들고, 아울러 부처 3천 불을 조각해 그 탑 안에 안치하고 그 탑을 절 가운데 모시고 예를 올렸다.그가 영묘사의 장륙삼존을 만들 때 스스로 선정에 들어가 삼매에서 뵌 부처를 모형으로 했다.그래서 온 성안의 남녀들이 다퉈 진흙을 나르면서 그가 지은 풍요를 불렀다. 지금까지 이 지방 사람들이 방아를 찧을 때나 힘든 일을 할 때에 다들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은 대개 이로부터 시작된 것이다.불상을 만들 때 든 비용은 곡식 2만3천700석이었다. 논평해서 말한다.양지 스님은 재주를 다 갖췄고 덕행이 충만하다고 할 수 있지만 큰 인물로서 하찮은 재주만 드러내고 자기의 실력은 숨긴 것이라 하겠다. 다음과 같이 찬미한다.’재 마친 법당 앞에 석장은 한가한데/ 정적 깃든 오리 모양 향로에 홀로 향불 피우네/ 남은 불경 읽고 나니 더 할 일 없어/ 부처님 모습 빚어 합장하고 뵈오리.’ ◆100년 잠에서 깨어난 녹유신장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국립경주박물관과 공동으로 사천왕사 녹유신장상의 3가지 유형을 사천왕사지 발굴이 시작된 지 100년 만에 완벽하게 재현해냈다.문화재연구소와 경주박물관이 학술교류 협약을 체결하고 각각 보관하던 7점의 파편을 복원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로써 통일신라를 지켜온 녹유신장상이 백년의 잠에서 깨어났다.사천왕사를 지켜온 녹유신장상이 깨어진 채 발견되고도 제자리를 못 찾고 기다리다 100년 만에 제 모습을 찾은 것. 사천왕사는 679년에 문무왕이 경주 낭산 신유림에 당나라 50만 대군의 침략을 막기 위해 승려 명랑의 밀교의식을 실행하며 건립한 호국사찰이다. 사천왕사 녹유신장상은 1915년 최초 발견 당시 세 종류의 벽전은 무엇인지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깨어진 조각만이 사천왕사 목탑 자리에 묻혀 있었다.큰 눈과 콧수염, 날개가 달린 투구와 화려한 갑옷, 신발 또는 맨발로 칼 혹은 화살을 든 무장 3명이 험악한 표정의 생령을 깔고 앉아 보는 이를 주시한다.앞을 지나가면 각기 달라져 보이는 장수의 표정에서 이들이 범상치 않은 존재임을 직감할 수 있다. 조선총독부는 1918년에 사천왕사 발굴을 개시했고 1922년부터 고적발굴조사사업의 하나로 본격적인 발굴을 진행했다.이는 조선총독부의 필요에 따라 이루어진 발굴로 사찰과 녹유신장상에 대한 정보를 축적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광복 이후 발굴 자료와 연구 결과를 토대로 벽전 파편을 조립한 결과 왼손에 칼을 든 신장과 활과 화살을 든 신장 등 두 종류의 신장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06년부터 2012년까지 체계적이고 정밀한 발굴을 거쳐 200여 점의 파편을 3차원 입체 3D로 스캔하고 이를 참고로 세 종류의 신장을 복원하는데 성공했다.또 이들이 사천왕사지 동서목탑 기단 벽면을 장식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사천왕사 녹유신장벽전은 세 종류의 신장이 한 묶음으로 탑 한 면에 두 묶음씩, 동서 목탑 기단에 16개의 묶음으로 배치되어 녹유신장으로 이루어진 벽전은 모두 48점인 것으로 확인됐다. 일제강점기에 수습되어 국립경주박물관이 보관하던 왼손에 칼을 든 녹유신장상의 하단부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서탑지 북편에서 발굴 수습한 상단부 6점이 같은 상이었음을 확인했다.2017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7점의 파편을 조립하고 빠진 부분은 같은 유형의 왼손에 칼을 든 녹유신장상의 파편을 참고하여 벽전을 복원했다. 국립경주박물관은 처음 사천왕사 발굴을 진행한 지 100년 만에 최초로 원래 짝을 찾아 복원된 왼손에 칼을 든 녹유신장상을 비롯해 3쌍의 녹유신장상을 전시하고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양지스님의 지팡이석장사는 양지 스님이 들고 다니던 지팡이 이름을 따서 그렇게 부른다.스님의 지팡이는 100년 묵은 대나무로 만들어 가벼웠다.오래되기도 했지만 스님이 다니다 절로 돌아와서는 굴뚝에 세워두기 때문에 연기를 먹어 그렇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스님의 지팡이는 현명하여 스님이 불공을 드리는 시간을 아끼도록 매월 1일과 15일이면 혼자 포대를 짊어지고 날아가 시주를 해 돌아와 스님이 공양을 거르지 않도록 했다. 서라벌의 왈패들이 지팡이와 양지 스님의 도력을 시험해보기로 했다.힘깨나 쓴다는 왈패들이 3월 보름에 자루가 두둑하도록 탁발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목에서 지팡이를 잡았다.그리고 탁발한 자루를 빼앗으려고 다섯 명의 장정이 달려들었으나 결국 석장에서 자루를 벗기지 못했다.지팡이는 돌로 내리쳐도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오히려 석장이 자루를 움켜잡은 채 장정들을 떠밀어 모두 북천의 찬물에 빠뜨려버렸다. 그리고는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방울을 요란하게 흔들며 춤추듯 날아 가버렸다. 왈패들은 그날 이후로 지팡이가 나타나면 멀찌감치 떨어져 큰절을 하고 지나갈 때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그리고 스님의 지팡이가 돌보다 더 단단하다고 하여 석장(石杖)이라고 불렀다. 또 석장이 가진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당시 서라벌에는 호랑이와 같은 맹수들이 자주 출몰해 사람을 해치기도 했다.민가에서는 해가 지면 아예 문밖 출입을 하지 않았다. 석장사는 깊은 산중에 있어 짐승들이 먹이를 찾아 수시로 나타났다.이를 경계해 양지 스님은 석장에 주문을 걸었다.굴뚝에 세워둔 지팡이가 어두워지면 석장의 크기로 길어져 괴물의 모습이 됐다.간혹 날카로운 울음을 울기도 하며 가까이 오는 짐승들을 물리쳤다. 두세 차례 호랑이가 접근했지만 석장이 크게 울며 다가가자 호랑이는 그 이후로 석장사 가까이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사람들이 양지 스님의 지팡이가 석장의 크기로 늘어난다 하여 석장이라 불렀다. 석장을 가지고 도를 닦는 양지 스님이 사는 곳이라 하여 절 이름을 석장사라고 불렀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동화사 회주 의현 스님, 비구승 최고법계인 대종사 올라

1994년 ‘조계종 사태’로 승적이 박탈됐던 동화사 회주 의현 스님이 승적을 회복한 뒤 대한불교조계종 비구승의 최고 법계인 대종사 자리에 올랐다.12일 조계종 중앙종회(조계종 입법기구)는 제219회 정기회를 열고 의현스님을 포함한 23명에 대한 ‘대종사(비구)·명사(비구니) 법계 특별전형’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대종사는 수행력과 지도력을 갖춘 승랍 40년 이상, 연령 70세 이상의 스님들에게 종단이 부여하는 최고 지위다. 특별한 혜택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종단의 큰 어른이자 수행이 깊은 선지식으로서 지위를 인정하는 의미로 받아들여 진다.의현 스님은 지난 1994년 총무원장 3선 연임을 강행하다 종단 개혁 세력의 반발에 부딪혀 자리에서 물러났으며, 승려대회 결의에 따라 승적에서 삭제됐다.의현 스님은 승적이 박탈된 지 21년 만인 2015년 ‘당시 징계 의결서를 받지 못했다’며 재심을 신청했으며 다시 열린 재판에서 ‘공권정지 3년’으로 감형 받기도 했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운곡사 법광스님, 대구 164번째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 가입

운곡사 법광스님이 지난 16일 지역 종교인으로서 처음으로 대구 164번째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으로 가입했다. 법광스님은 1960년 충북 제천 출신으로 순천 선암사에서 출가했다. 이후 중앙승가강원 사교과를 졸업하고 현재 중앙승가강원 대교과 입승 재직 중이다.특히 출가 전 발명가로 활동하며 독일 국제 발명품전시회와 미국 LA세계발명품 전시회에서 동상을 수상한 특별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법광스님은 “나의 작은 기부가 마중물이 돼 희생과 보시의 따뜻한 마음이 대구 곳곳에 퍼져나갔으면 한다”며 “전달된 성금이 지역에 도움이 꼭 필요한 이웃들에게 잘 전달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한편 아너소사이어티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사회지도층이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나눔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만든 개인고액기부자들의 모임으로 1억원 이상 기부 또는 매년 2천만원씩 5년 동안 기부할 경우 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다. 이동현 기자 leedh@idaegu.com

‘이주민 인권보호 앞장’ 캄보디아 스님, 구미경찰서 감사장 전달

“쏨어꾼.”캄보디아말로 감사하다는 뜻이다.‘꿈을 이루는 사람들’의 외국인주민센터에 소속된 캄보디아 출신 포브 쏘페악 스님이 지난 7일 이갑수 구미경찰서장으로부터 감사장을 받으며 건넨 인사다.포브 쏘페악 스님은 2010년 1월23일 구미에 정착한 후 지금까지 캄보디아 출신 노동자와 결혼이민자의 인권보호와 범죄예방을 위해 구미경찰서에서 무료 통역봉사활동을 하고 있다.특히 스님은 캄보디아 전통명절 문화를 한국사회에 알리는 축제를 매년 설날과 추석에 연다. 국내에서 사망한 노동자의 장례절차와 병원비가 부족한 노동자를 돕는 활동도 펼쳐왔다.지역 사회에도 눈을 돌려 지역 어르신을 위한 수요일 점심제공 봉사활동을 꾸준히 해 온 결과 최근 한국으로의 귀화를 인정받았다.구미경찰서 이갑수 서장은 “먼 나라에서 온 외국인 스님이 지난 10년 동안 구미지역을 떠나지 않고 외국인 노동자를 위해 헌신한 데 존경의 말씀을 드린다”며 “감사장을 통해 조금이라도 캄보디아와 한국이 더 좋은 국가 관계로 발전하길 바란다”고 축하했다.포브 쏘페악 스님은 “그동안 임금체불이나 아파서 통역이 필요할 때 쉬는 시간도 없이 밤낮으로 사업장이나 병원과 경찰서를 쫓아다닌 것이 꿈만 같다”며 “10년 전에 비해 한국 사회가 많이 발전했고 한국 사람들도 더 친절해졌다”고 말했다. 신승남 기자 intel887@idaegu.com

수행하듯 써내려간 한 줄 시집 ‘흰 눈 속의 붉은 동백’ 출간한 스님

일행일수.수행하는 마음으로 쓰는 한 줄의 시 ‘일행일수(一行一修)’.매일같이 수행하듯 쓰는 한 편의 시 ‘일행일수(日行日修)’.‘게으르지 않고 꾸준하게 정진한다’는 의미에서 수행이나 창작은 닮은 점이 참 많다. ‘한 줄 시’라는 독특한 문학 장르를 개척하고 있는 스님 시인을 만나러 산사를 찾았다.팔공산 자락 천년고찰 ‘거조사’에서 만난 태관스님은 시를 쓴다기보다는 한 줄 시를 연마하고 있다. 세속 나이로 환갑인데 문단에 등단해 새로운 형식을 선보이는 그에게서 첫 번째 시집인 한 줄 시집 ‘흰 눈 속의 붉은 동백(도서출판 서정시학)’을 세상에 낸 사연을 들었다.“내게 시를 쓰는 일은 곧 부처로 가는 길”이라는 스님은 “매일 밥 먹듯이 한 줄의 시를 쓰고, 이 습관이 수행의 일과”라고 소개했다.수행처럼 시를 쓴다는 스님은 처음부터 한 줄 시를 구상한 것은 아니다. 긴 문장을 압축하는 방식으로 제목과 본문을 단 한 줄로 축약해 ‘한 줄짜리 시’를 완성한다. 매일 수행하듯 쓰자는 의미에서 이름도 ‘일행일수’라 부른다. 총 4부로 구성된 시집 ‘흰 눈 속의 붉은 동백’은 한 줄짜리 시 86편이 수록돼 있다. ‘각시 붓꽃’, ‘겨울 낮잠’, ‘바다가 마르면 바닥을 드러내지만’, ‘추워야 피는 꽃이 있다’, ‘같고 같다’, ‘헐’ 등 수록된 시 전부가 한 줄이다. 제목도 한 줄, 시도 한 줄이다.시집 한 권이 모두 한 줄 시로 꾸며진 것에 호기심을 갖자 “이 시를 읽고 누구든 시를 만만하게 봤으면 좋겠다. ‘나도 할 수 있겠다’라고 접근해 한 줄로 시작한 글이 두 줄이 되고, 그러다 세 줄, 또 열 줄이 됐다가 다시 한 줄이 되고, 그러다보면 누구나 시를 이해하고 쓸 수 있게 될 것”이라며 “누구나 쉽게 한 줄의 시쯤은 쓸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도록 내가 먼저 포문을 연 것 뿐”이라고 했다.2년 전 등단을 계기로 본격 창작활동을 이어가는 그는 “스님이 하는 말은 장황할 필요가 없다. 복잡한 시대에 나까지 말을 보탤 필요가 뭐있나 생각해서 한 줄의 시를 써 보기로 했다”며 “솔직히 문단에서 어떻게 평가할지 반응이 궁금하기도 하다”며 환하게 웃었다.수록된 시 가운데 가장 애착이 가는 시를 꼽아달라는 짓궃은 부탁에 서시 ‘등짐 지고 눈썹 위를 걷는 사내’를 꼽았다. ‘수행자는 매순간 깨어 있어야 한다. 항상 자신을 살피고 모든 유혹으로부터 성문을 굳게 지켜야 한다. 삐끗하면 천 길 낭떠러지가 바로 코앞이다’는 해제가 붙은 시다. 수행자 뿐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이가 공감할 내용이 짧은 한 마디에 함축된 경구 같은 시다. 시집 ‘흰 눈 속의 붉은 동백’은 각각의 시 마다 해제를 따로 붙였다. 독자들이 한 줄 짜리 시를 어렵게 여길 수 있어 어떤 생각으로 이 시를 쓰게 됐는가를 안내하는 길잡이로 각각의 시에 해제를 달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태관스님의 ‘일행일수’는 영감이 풍부하다. 수록된 시 ‘파뿌리가’는 제목에 문장의 주어만 툭 던져놓고 어떤 목적어와 서술어가 들어올 지를 기다리는 모양새다. ‘파뿌리를 다듬고 있네’라는 한 줄의 본문은 어머니의 고된 삶을 회상하는 시인의 심정이 간절하게 압축돼 있다. 너무나 무심하게 압축돼서 그것이 간결한지 모를 정도다. 따로 적어 둔 해제를 보고서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늙은 어미는 쉼이 없다. 한 줌 뙤약볕도 아깝다. 윤기는 없고 헝클어진 머릿결만 파뿌리처럼 하얗다.’‘파뿌리’. 함부로 헝클어진 백발이 곧 어머니의 정체성이다. 그러므로 어머니의 삶은 ‘윤기 없고 헝클어진’ 파뿌리와 동일시된다. ‘파뿌리가 파뿌리를 다듬고 있다’는 불완전한 문장이지만 ‘일행일수’의 양식에서는 가능한 시적 표현이다.시를 짓는 일이 수행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는 스님은 “한 줄 시는 감정이 과잉돼도, 시장판처럼 잡돼도 안된다”면서 “간결하고 단출하며 일상에서 발견하는 삶의 지혜를 압축한 ‘압골미’가 뛰어나야 한다”고 했다. 또 “압골미는 생각의 구조와 뼈대만 추리는 것인데 한마디로 요약하는 힘, 그것이 곧 수행”이라고 덧붙였다.시를 쓰는 것도 넒은 의미에서 포교활동이라는 스님 시인은 “내년 봄쯤에 시집 하나를 더 낼 생각인데 그때도 한 줄짜리 시집을 낼 요량”이라고 귀띔했다.1974년에 입산해 팔공산 거조사 주지 소임을 맡고 있는 태관스님의 첫 시집 ‘흰 눈 속의 붉은 동백’(도서출판 서정시학)은 지난달 초판이 발간 됐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