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독한 이 겨울을 나는 법

박운석패밀리푸드협동조합 이사장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오랜 시간 자영업을 해봤던지라 요즘 이들의 어려움을 누구나 잘 알고 있기는 하지만 밖에서 사람들을 만나기는 좀처럼 쉽지 않다. 음식점이나 카페에서 약속을 잡기가 상대에게서도 눈치가 보여서다.어쩔 수 없는 집콕의 시간을 보내기에는 라디오로 음악방송을 듣는 게 최고다. 대부분 가볍게 듣고 넘기지만 며칠 전 방송 진행자에게서 들은 한마디가 귀에 박혔다.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에 관한 이야기였다.정민(한양대 고전문학) 교수는 ‘정민의 세설신어’에서 구구소한도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동짓날에 매화 한 가지에 흰 꽃송이 81개를 그려두고, 날마다 한 송이씩 색칠한다. 색칠이 끝나 81송이가 피어나면 봄이 이미 깊었다. 이것을 구구소한도라고 한다.’ 가장 추운 동짓날부터 81일간을 구구(9×9)라 하고 색칠하지 않은 매화 81송이 그림을 그려둔 후 하루 한 개씩 채색해나간다. 마침내 그림 속 모든 매화가 붉은 색으로 피어나면 추위는 물러나고 뜰 앞의 매화도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하루하루 그림을 그려나가며 추위를 견디다 보면 드디어 봄이 온 것이다.구구소한도는 매화그림만 있는 게 아니다. 선조들은 문자로도 구구소한도를 그렸다. 정전수류진중대춘풍(庭前垂柳珍重待春風). ‘뜰 앞에 드리워진 수양버들이 봄바람 불어오기를 진중하게 기다린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글은 한꺼번에 쓰지 않고 동짓날부터 하루 한 획씩 써내려간다. 정(庭)이 열 획, 수(垂)가 여덟 획이지만 나머지 글자는 모두 아홉 획이다. 매일 한 획씩 써내려가다 보면 이 역시 81일이 걸리게 된다.동지로부터 81일째 되는 날은 경칩과 춘분 사이로 올해는 3월 12일이다. 추위를 삭인다는 뜻의 소한(消寒)이란 말처럼 81일간의 추위를 삭인 이날이 되면 버들에 물이 오르고 싹이 트는 봄소식도 따라온다.올해는 특히나 매서운 한파도 겪었다. 혹독한 추위에도 견딜 수 있었던 건 구구소한도처럼 봄이 올 것이라는 희망이 있어서다. 매일 하나씩 매화에 색을 칠하며, 매일 한 획 한 획 글자를 써내려가는 여유와 느긋함이 있어서다. 만일 동짓날부터 구구소한도를 그려왔다면 오늘, 서른일곱 송이의 홍매가 피어났을 테다. 이제 앞으로 윤곽선만 있는 마흔네 송이 매화가 붉게 색칠해지면 드디어 봄이 온 것일 게다.다만 코로나19로 꽁꽁 얼어붙었던 작년 봄처럼 될까 걱정이다. 지난 1년간은 신규 확진자 증감에 따라 일상생활에도 큰 변화가 따랐지 않았던가. 올해는 구구소한도를 완성하고 나면 과연 일상이 된 마스크를 벗어던지고 따뜻한 봄바람을 맞이할 수 있을까. 아니면 봄이 와도 봄 같지 않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 지속될까. 더욱 가슴 졸일 수밖에 없는 건 부자들의 겨울은 즐겁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겨울은 혹독하기만 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들은 코로나19의 고통까지 고스란히 받고 있으니 이번 겨울은 이래저래 더 가혹할 수밖에 없다.그런데도 불구하고 정치마저 한겨울이다.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보자. 지금은 한가하게 매화그림에 색칠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제부터는 붓을 들고 ‘정치소한도’를 그릴 때다. 얼어붙은 정치의 한겨울을 삭일 때다. 이때까지 어디 추위를 녹일 만한 하루라도 있었던가. 코로나19로 서민들의 삶은 갈수록 어려워지는데도 정치권은 변함없이, 끊임없이 제 살길만 찾고 있었다.계절의 봄은 제시간에, 어김없이 온다. 하지만 정치의 봄은 만들지 않고는 결코 오지 않는다. 대신 정치의 봄은 잘 만들기만 하면 언제든, 일년내내 찾아 올 수도 있다. 이제부터라도 정치소한도에 하루하루 화합의 색을 칠하고, 대화의 색을 칠하고, 용서의 색을 칠하고, 칭찬의 색을 칠하고, 존중의 색을 칠해나가면 어떨까. 정민 교수는 구구소한도를 두고 ‘봄을 맞는 데는 매일 한 송이씩 81일간 채색하는 정성이 든다. 여든한 번의 추위를 건너야 진짜 봄과 만날 수 있다’고 했다. 정치소한도도 마찬가지다. ‘정전수류진중대춘풍’이란 글자를 두고 하루 한 획씩 채워나가듯 정성을 들인다면 정치에도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그때가 돼야 비로소 봄이 왔다고 할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