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애 시인

문득 쌀 반 가마와 시 한 편의 원고료가 거의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늘 원고료가 너무 적다고, 우리 사회는 예술가들을 너무 박대한다고 푸념했는데 그걸 깨달은 순간 할 말이 없어져 버렸다.

시골에 온 이후 먹을거리의 대부분은 마을에서 조달한다. 쌀은 이웃집에 일년 치를 미리 주문해 놓았고, 콩이나 참깨 등등도 마을 할머니들이 지은 농산물을 산다. 무엇보다 이 곡란골의 구성원으로서 그래야 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처음엔 별 생각 없이 사 먹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이 무거운 쌀과 내가 쓰는 시 한 편의 값이 비슷하다는 것을.

내가 쓰는 시 한 편과 농부가 지은 쌀농사의 노고를 속으로 계산해 보았다. 시 쓰는 일이 아무리 가치 있는 일이라 해도 농부가 지은 농사의 가치 또한 적다고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시 쓸 때의 수고로움과 농사지을 때의 수고로움은 어느 것이 더 많고 적다고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마 모든 노동이 다 그러할 것이다. 다만 봄부터 가을까지 세 계절을 지나면서 농사에 쏟아부은 그 시간과 고생은 내가 시 한 편을 쓸 때보다는 훨씬 더 힘들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시 쓰는 일과 농사짓는 일의 수고로움을 물리적인 힘으로 따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농사짓는 일이 더 힘들 것 같았다.

쌀이 특별히 싸다거나 비싸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늘 비슷한 가격이어서 당연히 쌀값은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문득 쌀값이 싸도 너무 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내가 시골에 와서 농부들의 삶을 직접 지켜보면서 생겨난 깨달음이었다. 농사가 시작되면 농부들은 해가 뜨면 일을 시작해서 해가 져야 일을 끝낸다. 햇볕이 내리쬐는 들판에서 일하는 어려움이야 말하면 무엇하랴. 그렇게 농사지은 쌀을 6만 원 남짓 주고 사면 부부 둘이 사는 우리는 석 달 남짓 먹는다. 어떤 먹을거리를 그렇게 싸게 먹겠는가.

인간 각자가 하는 노동의 대가는 천차만별이다. 어떤 일은 별 수고를 들이지 않고도 고액의 대가가 주어지는가 하면 어떤 일은 몸을 혹사하고도 겨우 입에 풀칠할 만큼의 대가가 주어진다. 무엇보다 노동은 일률적으로 가치를 매기기가 어렵다. 그냥 우리 사회에 통념적으로 주어진 가치가 있고, 우리는 별 저항 없이 그 통념에 따른다. 그러면서도 유독 예술의 가치에 대해서만은 너무 저평가돼 있다고 늘 생각해 왔다. 예술이란 것이 실생활에 유용하게 쓰이는 것이 아니다 보니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이라는 생각에서였을까.

그러나 쇼스타코비치는 독일이 레닌그라드를 포위했을 때 시민들이 굶어 죽어가고, 사람이 사람을 뜯어먹고 살 때 교향곡 제7번 ‘레닌그라드’를 썼다. 그리고 지치고 굶주려서 악기를 연주할 힘도 없는 연주자들을 모아서 레닌그라드에서 공연을 했다. 그때 레닌그라드 사람들은 식량표를 바꾸어 음악을 들으러 왔고, 비썩 마른 한 군인이 군복을 입은채 ‘레닌그라드’ 초연 입장권을 사는 유명한 사진도 있다. 스탈린의 붉은 군대는 이 연주회를 무사히 마치기 위해 독일군을 향해 포격을 퍼부었고, 확성기를 통해 도시의 모든 거리에, 운하 너머까지, 독일 병사들의 참호와 포진지가 있는 적진에까지 들리도록 스피커를 설치했다. 레닌그라드 시민들에게는 위로와 인간의 존엄성 회복을 위해, 독일군에게는 레닌그라드 시민들이 아직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굶주림과 공포와 죽음보다 더 강력한 그 무엇은 바로 인간으로 남으려는 의지이다. 예술은 이 의지의 표현이다. 그래서 예술은 삶에서 무용한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 죽음을 넘어서는 강력한 의지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작품에 대한 대가가 너무나 적은 것에 대해 분노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곡란골에서 우리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중요한 식량인 쌀값이 터무니없이 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쌀값은 그래도 된다는 우리 사회의 ‘내팽개침’은 아닐까. 농부들의 그 묵묵한 수고로움의 대가 치고는 참으로 쓸쓸한 대가가 아닐 수 없다.

천영애 시인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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