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름날의 기억~

… 부자동네는 조용하고 안락했다. 황갈색 2층 목조건물엔 음악을 하던 더벅머리 남자가 살았다. 그는 프랑스 여자와 결혼하여 파리로 이사 갔다. 그 집에 호리호리한 남자가 이사 왔다. 나는 피자집에서 알바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 집에 피자를 배달했다.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그는 스물여덟 살의 배경 좋은 남자였다. 그는 자주 피자를 시켰다. 그는 나에게 호의적이었다. 오토바이 사고로 무릎을 다쳤을 땐 나를 그 집으로 데려가 치료를 해주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면서 바람을 맞았다. 어릴 때 태풍에 변소 지붕이 날아간 일이 떠올랐다. 바람이 좋다. 엄마는 협심증으로 돌아가시고 아빠는 몇 년 전에 집을 나갔다. 내가 서울 소재 대학에 합격하고 나서 누나와 나는 서울로 이사 왔다./ 그에게서 포도 냄새가 났다. 부모님은 포도농사를 지었다. 그 포도밭에서 맡던 냄새다. 그와 난 형 동생 하는 사이가 됐다. 배달한 피자를 함께 먹으며 동네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그는 집을 꾸미는데 관심이 없었다. 그런 점이 좋았다. 그는 종종 늦은 시간에 피자를 시켜 함께 나눠 먹었다. 축구경기도 보고 당구도 치고 맥주도 마셨다. 술에 취하면 그의 집에서 잤다. 우린 많은 사적인 대화를 나눴다. 가족 얘기도 했지만 누나 얘기는 숨겼다. 나중에 소개시켜 줄 속셈이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이 많이 빠져죽은 고향의 저수지 얘기도 했다. 그는 거기로 낚시 한번 가자고 말했다./ 그는 나의 주변에 대해선 관심이 없고 오직 나에게만 집중했다. 그게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었다. 우리는 수더분한 분위기에서 소탈하게 지냈다. 대학교수인 그의 어머니는 가끔 들러 냉장고를 채워주고 가는 듯했지만 직접 만나보진 못했다. 나는 점점 늪 속으로 빠져드는 듯했다. 가끔 가벼운 신체 접촉을 했다. 그가 나를 만지고 싶어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차를 몰고 나갔다. 내 고향으로 드라이브를 가자고 했다. 어린 시절 얘기를 하면서 노래를 흥얼거리며 고향으로 달렸다. 며칠 전 두 여자와 함께 걸어가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어색하게 웃었고 눈이 마주쳤지만 외면했다. 차안에서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땐 아침이었고 고향동네였다. 갈비탕을 먹고 저수지로 걸어갔다. 저수지엔 젊은 여자들이 배를 타고 있었다. 한 여자의 모자가 바람에 날려 물결 따라 흘러 다녔다. 그가 저수지에 뛰어들어 모자를 낚아챘다. 그 다음 순간 그는 물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는 차가운 그의 몸을 안고 울었다. 우린 자신일 뿐, 자신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우정이 성을 가리지 않는다면 사랑도 성을 가리지 않는다. 사람을 좋아하거나 사랑하는데 남녀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이상하게 서로 끌리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뭔지 잘 모르지만 서로가 공감하는 부분이 있을 터다. 혹자는 신분과 계급, 성별과 나이를 초월하는 치명적 끌림을 궁합이나 인연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럴지도 모르고 설명할 수 없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남녀 간의 사랑이 본능의 정상적 발흥이라면 동성 간의 사랑은 예기치 않은 돌발적 도발이다. 동성애가 자랑은 아니겠지만 수치나 범죄는 아니다. 정체성을 찾았다면 그게 남과 다르다는 이유로 숨기거나 드러낼 일도 아니다. 그냥 생긴 대로 살면 되지 않을까.

오철환(문인)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저작권자 © 대구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