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희 <정명희소아청소년과의원 원장>

하얀 억새풀과 구절초가 은빛으로 가을을 색칠한다. 황금빛을 더해가는 알곡들은 추석이 지났다며 어서 빨리 익어 고개 숙여보자고 하듯 바쁜 몸짓이다. 병아리 솜털 같이 여리게 시작하던 봄빛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한 해의 절반, 또 그 반이 지나간다. 머잖아 산과 들에는 울긋불긋 단풍이 물들어 일상에 바쁜 이들조차 가을 속으로 불현듯이 떠나보고 싶은 마음이 생길 것이리라.

발표되는 확진자 숫자에 귀 기울이고 방역수칙 따져가며 사람과의 모임을 자제하고 2주만 하던 것이 달이 가고 해가 바뀌고 또 한 해가 저물려고 한다. 환자들을 대하면서 그 질병에 대해 불안과 공포가 얼마나 더해졌을까. 죽음으로 이별해야만 했던 가족의 고통을 전해 들으며 슬픔과 아픔과 극심한 두려움에 떨었다는 이들. 그들의 아픔을 듣고 있기만 해도 가슴이 뻐근하게 아팠다. 이 질병이 언제 수그러들까 순간순간 아직도 두렵다.

오래도록 근무했던 예전의 병원이 코로나 환자를 전담하다 보니 코로나19 확진자 숫자가 치솟으면 그 직원들이 정말 고생이 많겠구나 싶어 가슴이 짠해진다. 명절이 지나자 아직도 기억난다는 이들이 종종 찾아오기도 하고 유선으로 소식을 전해온다. 개원했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전시상황을 생각나게 하는 방역수칙 때문에 불쑥 찾아왔다가 혹시나 문을 갓 열어서 시작한 병원에 확진자 다녀갔다는 오명이라도 남기면 어쩌나 싶어서 많이 망설였단다. 어떤 이는 화분으로, 멀리 있는 분은 서신으로, 축하인사를 잊지 않고 보내주곤 하신다. 요즈음엔 검색이 대세라는 이야기를 듣고 검색창에 병원 이름을 쳐봤더니 진료시간이 너무나 신선하다고도 하신다. 월요일, 일요일, 공휴일 휴진, 점심시간 1시간30분이라니. 생애 처음 개원이라면서 이래도 되느냐며 묻기도 하고, 어떤 분은 병원이 이런 스케줄로 진료하는 것을 보니 ‘심쿵’하게 됐다고도 하신다. 대학병원 명예교수로 개원의로 활발히 진료하시는 구순을 바라보는 선배님은 걱정 조금에 다가 부러움 많이 섞어서 축하를 보낸다고 하시며 진료 스케줄이 너무 신선하다 신다. 어찌 월요일 휴진 할 생각을 했느냐면서, 월요일에 환자가 제일 많이 몰리는 경향인데 그걸 모르고 그렇게 정한 것 아니냐? 진지하고도 긴 메일까지 보내셨다.

진료일정을 짤 때 정말 고민하지 않고 단숨에 정해버렸다. 봉직하면서 힘들었던 날과 순간은 피하고 새로운 일터에서, 나의 인생 후반의 근무지에서는 늘 즐겁고 행복하게만 진료하리라고. 예전 병원에서 월요일에만 초진 환자를 진료했기에 그날 정말 힘들었었다. 점심은 거르기 일쑤였고 퇴근하면 거의 무기력할 정도로 녹초가 됐으니, 바쁘고 힘들었던 월요일을 오로지 나만의 시간으로 비워두고 다른 날 더 열심히 환자들을 맞으면 되지 않으랴. 점심시간에 만나고 싶은 사람 만나고, 보고 싶은 곳 잠시 들러 푸른 하늘도 보고, 맛있는 음식도 맛보면서 정말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아보리라.

어느 월요일, 혼자 서류 정리를 하고 있는데 웬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내다보니 빈 대기실에 할아버지 할머니 세 분이 앉아 계셨다. 자세히 보니 10여 년도 더 된 환자의 부모와 친구분이었다. 휴대폰 교체하러 인근에 왔다가 눈을 드니 익숙한 이름을 단 병원이 보여서 무작정 올라왔다고 하신다. “술술 잘 풀리라~!”면서 두루마리 휴지 한 뭉치 사들고서. 얼마나 반가운 손님인가. 사심 없이 인바디 체크하고 혈압 재고서 상담해드렸더니, “직원은 없냐?”라고 물으신다. ‘월요일 휴무’인데 말이다. 불쑥 찾아오는 이런 반가운 이들을 여유롭게 맞이할 수 있는 것도 월요일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정말 마음 뿌듯한 일상이다. 인생이 진정 즐겁고 행복하려면,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먹은 대로 자신이 하고 싶은 것 하면서 늘 감사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개원하며 다짐했던 그 첫 마음으로, 열심히, 진심으로 환자를 대하다 보면 내게 오는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좋은 영향력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개원의로서의 생활, 가늘고 길게라도 언제나 즐겁고 신나고 당당하게, 하루하루 보람 있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면서 푸른 하늘 아래서 한 분 한 분께 답장을 올렸다. 지난 33년을 한결같은 보람으로 보냈듯이 앞으로 그 만큼의 시간도 동등하게 보낼 수 있기를 기대하며.

혹자는 묻는다. 공공병원 33년 지냈다는데 앞으로 33년 더 진료한다면 몇 세에 은퇴할 거냐고. 자신 있게 대답한다. 현재 나이 27세, 거기에 33년을 더하면 60, 그때에는 은퇴해도 되지 않을까요? 코로나 없어지면 신선하게 짜둔 스케줄 덕으로 들로 산으로, 비행기에 몸을 싣고 2박3일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언젠가는 블루트레인에 몸을 싣고 달릴 꿈을 꾸기도 하면서, 지금 제자리에서 날마다 모두 행복할 수 있기를.

정명희 정명희소아청소년과의원 원장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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