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정생의 마지막 동화 ~

… 그는 찻잔을 갖고 놀았다. 두 엄지가 찻잔 위로 솟은 모양이 말의 귀 같다. 마이산이 떠오른다. 그는 여자를 데리고 아이를 낳게 해준다는 마이산 신비의 샘물로 갔다. 어머니가 바닷가 모래알처럼 후손을 번성시키라고 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아이를 갖지 못하고 떠났다. 정신이 깜박깜박한다. 그 순간이 평온하다. 찻잔에 LED등을 비쳐본다. 빛이 찻물 위에 십자로 빛난다. 다섯 살 때 십자가를 만나 그 뜻을 따랐다. 찻물의 양에 따라 빛의 모양이 달라진다. 굴절의 작용이다. 현상은 그대로인데 굴절이 변화를 가져온다./ 시에서 문학에 조예가 있는 간병인을 붙여주었다. 유명 작가에게 나름 신경 쓰고 있다는 외부 생색용이다. 간병인에게 말을 붙여보지만 망언으로 흘려들었다. 눈도 꿈쩍 않았다. 굳이 소통하고자 애쓰지 않았다. 증세가 악화되었다는 말만 들을 뿐이다. 감옥에 갇혀 죽기 직전에 젖을 물린 딸의 이야기, 팔순에 소녀를 찾아 창녀촌으로 갔다는 마르케스의 소설, 돌보던 장애인의 자위행위를 도와준 일본의 수녀 이야기 등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나 일언지하에 치매 노인의 망발로 치부했다. 손이라도 잡으면 치매 노인의 추태라며 기겁을 했다. 몸은 늙어도 마음은 욕망한다는 사실이 신비하다. 인간이 창성하도록 신이 준 축복이다./ 그는 베스트셀러 작가다. 꽃이 된 똥 이야기로 돈을 많이 벌었다. 그에게 아들은 없었지만 아이들은 많았다. 유산을 아이들을 위해 써달라고 유언했다. 그는 교회 문간방에 살며 평생 종을 쳤다. 책이 많이 팔려 큰돈을 벌었지만 언덕의 작은 집에 살았다. 이기적인 사람들에게 이타심을 일깨워주었다. 자식이 없었지만 수많은 아이들의 어버이가 됐다. 강의를 할 땐 양복을 입었지만 집으로 오면 낡은 옷으로 갈아입었다./ 일흔이 넘어 몸과 마음의 균형이 깨어졌다. 요양병원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찻잔놀이에 빠져들었다. 찻잔놀이는 중요한 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팔뚝에 링거를 꽂고 코에 산소 호흡기를 달았다. 큰 병원으로 옮겨갔다. 거기에서 그를 알아보는 어린 수습 간호사를 만났다. 그의 동화책을 읽고 남의 아픔을 위로하는 간호사가 되었단다. 그는 무지개다리를 건너가고 있었다. 간호사가 낌새를 채고 의사를 불렀다. 그는 나직이 어머니를 불렀다. 수습 간호사만이 그 소리를 들었다. 그는 수습 간호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수습 간호사가 그의 손을 잡았다. 마지막 가는 사람답잖게 손이 따스했다. 강아지 똥을 주워 키운 꽃밭을 걷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종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가 그를 맞아주었다. 대를 이어줄 사람이라고 수습 간호사를 어머니에게 소개했다. 수습 간호사가 마지막 눈물을 보고 꽃잎에서 떨어지는 이슬방울 같다고 말했다. 수습 간호사는 그가 품고 있던 성경을 펼쳐들었다.…

권정생 선생의 삶은 이슬방울처럼 맑고 순수하다. 비록 후사가 없었지만 산소같이 청아한 그의 삶을 어린 수습 간호사가 계승한다. 그녀가 자식이다. 자기가 낳은 자식은 아니지만 자기를 어버이로 삼는 수많은 아이들이 있다. 몸을 준 부모만 어버이인 건 아니다. 정신을 기름지게 해준 스승도 또 다른 의미의 어버이다. 핏줄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 그 정신과 뜻을 이어갈 사람이 진정한 자식이자 후계자이다. 모든 건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굴절의 조화다. 인간은 어디서 와서 무엇을 위해 살고 어디로 가는가.

오철환(문인)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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