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풀 피가 돌아 빗돌끼리 엉긴 눈물/봄볕에 정을 틔워 원을 풀고 사는 숲/이 한 몸 다 적시거라 산새소리 내 소리//몸 앓아 누운 달빛 한가로운 강둑길/보내는 대화마다 정겨움 남는 연민/열두 짐 켜놓을 불빛 눈짓하며 살더라//잔속에 가라앉은 몇 모금 순한 사랑/잡은 꿈 줄이 풀려 하늘가로 떠가고/밤마다 새순 뿌리 끝 물소리로 깨어나네

「하늘이 들고 나온 노란 시집」(2018, 이든북)

박헌오 시인은 충남 예산 출생으로 1987년 등단했다. 시조집으로 ‘석등에 걸어둔 그리움의 염주 하나’, ‘산이 물에게’, ‘우리는 하얀 솔잎이 되어’, ‘그 겨울 이야기’, ‘뼛속으로 내리는 눈’, ‘시계 없는 방’과 시조선집 ‘하늘이 들고 나온 노란 시집’이 있다.

한식은 동지로부터 105일째 되는 날이다. 예로부터 한식은 설날, 단오, 추석과 함께 4대 명절로 일컬어졌다. 이 날은 불을 피우지도 쓰지도 않고 미리 장만해 놓은 찬 음식을 먹는다는 옛 습관에서 나온 풍습인데 요즘 한식은 성묘와 연관될 뿐이다. 시의 화자는 ‘한식날’에서 마른 풀 피가 돌아 빗돌끼리 엉긴 눈물을 본다. 그리고 봄볕에 정을 틔워 원을 풀고 사는 숲에 들어서서 이 한 몸 다 적시거라 산새소리 내 소리, 라고 노래하면서 내 소리와 산새소리가 어우러져서 몸을 맑게 적시는 느낌을 받는다. 몸 앓아 누운 달빛 한가로운 강둑길에서 보내는 대화마다 정겨움이 넘치고 연민은 남아 마음속에 파문이 일어나는 것을 느낀다. 이어서 열두 짐 켜놓을 불빛을 눈짓하며 사는 모습을 엿보며 살가워한다. 여기서 열두 짐이 뜻하는 의미는 다소 모호하지만 삶이 감당해야 할 갖가지 어려운 난제로 읽힌다. 잔속에 가라앉은 몇 모금 순한 사랑을 음미하면서 잡은 꿈 줄이 풀려 하늘가로 떠가는 것을 본다. 끝으로 밤마다 새순 뿌리 끝 물소리로 깨어나네, 라는 결구는 한식날 전후로 느끼는 소회를 감각적으로 형상화한 마무리다.

그는 ‘아궁이’라는 작품에서 쪼그리고 앉아서 불 때시던 어머니, 를 떠올린다. 어린 시절 자주 그러한 장면을 봤을 것이다. 다음으로 무쇠솥에 지그르르 흐르다 타는 눈물, 이라는 대목에서 어머니의 고된 삶의 한 단면을 읽는다. 지그르르 흐르던 것이 끝내 타는 눈물이 된 것은 그만큼 신산의 세월을 견뎌내고 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구들장 긴 세월 데워 어린 자매를 키우셨던 것이다. 이젠 그러한 삶의 현장이 너무나 달라져 버렸다. 날 저문 초막에 불 꺼진 아궁이, 라는 둘째 수 초장의 정황에서 그것은 여실히 드러난다. 가족들 기대던 벽 허물어져 누웠고 냉골만 앙상히 남아 가슴 깊이 흘러드는 것을 혼자 바라보면서 화자는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아련한 슬픔을 오래 다독이고 있다.

우리는 그 누구든지 토포필리아 즉 장소에 대한 사랑과 바이오필리아 즉 생명에 대한 사랑에서 벗어나서 살 수 없는 존재다. 어린 시절 놀던 동네 골목길이나 조그마한 공원이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면 그곳에서 함께 뛰놀던 친구들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질 때가 있다. 거꾸로 어머니나 아버지가 생각나면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집과 마을이 떠올라서 그곳에 가보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그런 점에서 ‘한식날’이나 ‘아궁이’는 모두 다시 돌아가고 싶지만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그날 그곳을 애절하게 떠올리게 한다. 특히 아궁이 앞에서 불을 때던 어머니 모습은 언제까지나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때로 한 번씩 울컥하게 해 눈물 머금게 되는 것이다.

몇 천 번이고 어머니를 불러보고 싶은 칠월의 아침이다.

이정환(시조 시인)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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